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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ul 30. 2024

경건하게 건강검진

여름방학 숙제 1호는 건강검진이다. 한 달 전부터 관리모드에 돌입했다.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외식은 삼갔다. 아침 러닝까지 시작하며 야금야금 오르는 체중계 바늘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마치 1년 치의 숙제 검사를 앞둔 학생의 심정 같다고나 할까?

병원 앞에 서면 묘한 긴장감으로 떨리기까지 한다 . 혹시 이상한 진단이라도 내려진다면, 만약 살 날이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 어쩌지? 불길한 상상이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걸 간신히 잡는다. 그래도 자꾸만 지나온 궤적을 돌아보고 아직 못다한 리스트도 챙긴다. 정해진 시간을 살다 소멸하는 생명에게 건강검진이란 어쩌면 운명을 거스르는 숭고한 의식이다.  

    

새벽같이 병원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검진센터는 북적인다. 20대 후반의 어린 직장인부터 중장년층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유독 눈길 가는 사람들이 있다. 여든 언저리 호호 할머니와 중년의 여인 둘. 자매로 보이는 두 딸은 노모를 살뜰히도 챙겼다. 외모와 체격까지 비슷한데 똑같은 옷까지 입혀놓으니 사진이라도 한 컷 찍어주고 싶다. 세 사람을 번갈아보며 닮은 구석 찾는 재미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어찌 들으면 경상도 말씨, 아니 북한 사투리? 아마도 할머니는 강원도 어디쯤에서 오신 것 같다. 구부정한 허리에 새까만 얼굴, 농부 특유의 굵은 손마디. 분명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농번기 일 팽개치고 잠시 상경했음이 틀림없다. 폭우에 더위에 고추, 양파 걱정이 태산 같을 할머니는 분명 내일이면 버스 타고 시골로 가시겠다고 고집부리실 지도 모르겠다. 자글자글한 주름을 비웃듯 금목걸이가 훈장처럼 반짝거린다. 환갑? 아니 칠순 선물일까.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세 모녀의 모습을 눈에 꼭꼭 담는다.

서울시립미술관서.


왜 나는 엄마 건강검진 한 번 못 해 드렸을까.  왜 우리집 세 모녀는 다정한 사진 하나 못남겼을까.


“체지방이 1.2kg 줄었네요. 근육량은 무려 300g 이나 늘었습니다.”

건강검진이란 걸 해본 이래 이런 칭찬 처음이다. 시작부터 예감이 좋다. 최근에 시작한 새벽 조깅 덕분인 것 같다. 노안이 오는지 가까운 글씨는 잘 안 보이지만 원거리 시력은 좋아졌다. 간에 있는 낭종이 커지지는 않았는지 초음파 하는 의사의 손놀림에 신경이 쓰였다. 외할머니, 이모들, 외사촌 등 외가 쪽 친척들이 온통 간이 안 좋아 고생한 걸 생각하면 늘 챙겨야하는 항목이다. “후~ 부세요.!” 통통 튀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은 센터 안을 활기차게 한다. 폐활량? 열심히 등산하며 키웠지. 유방촬영 할 땐 심호흡 번 하고 들어간다. 밋밋한 가슴을 사정없이 누르는 저 차가운 기계가 싫다. 결절이 있다고 했는데 정밀 검진을 내년쯤엔 해야겠다. 귀가 예민한 나는 소리에 민감하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웅웅 거리고 귀에서 '삐' 소리가 난다. 그런데 청력은 좋다. 부인과 검사는 매번 적응이 안 된다. 난포자극호르몬 수치 곧 줄다가 사라지겠지? 현대인의 필수병이라는 역류성 식도염과 경미한 만성 위염을 갖고 있는 는 늘 수면내시경을 진행한다. 프로포폴 수면주사, 순식간에 잠드는 느낌이 너무 신기해서 불면의 밤이면 합법적 그 순간을 기억해 내며 눈감곤 한다.      


건강검진의 마지막은 의사와 대면 상담이다. 문진표를 보고 전문의에게 이상 증상을 털어놓는다.  

“소변에 조금씩 거품이 보여요.”

“작년 검진 땐 괜찮았는데 언제부터인가요?”

사위 삼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젊은 의사가 다정하게  묻는다. 신장염을 앓았던 친정엄마의 40대가 기억났다. 주저리주저리 가족력을 읊었다. 양친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니 의사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록을 다시 챙겨본다. 혹시 소변검사에서 단백뇨가 나오면 신장내과로 가서 진료받는 걸 추천한다며 세심한 안내까지 해준다. 검진이 끝나기 무섭게 2주 후 병원예약을 했다.    


그렇다. 아빠는 58세에 뇌출혈로 엄마는 60세에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분 모두 예고도 없이 홀연히  가셨다. 그래서인가? 무의식 어느 구석탱이엔 나도 어쩌면 예고치 않은 죽음과 맞닥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과 산책을 할 때면 ‘내가 없는 그 언젠가’는 단골 레퍼토리다. 1절이 시작되면 남편의 첫 반응은  비웃음이다. 마누라 허벅지 굵기를 보면 자기보다 훠~~얼씬 오래 살 테니 그런 걱정이랑은  말란다. 그런 말 하거나 말거나 마누라의 2절이 이어진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남편과 딸들이 지켜야 하는 것들 하나 둘 셋. 재혼은 웬만하면 딸내미들 시집갈 때까지는 하지 말고, 재혼할 여자는 인성이 좋아야 할 것이며, 내 보험과 연금은 모두 딸들에게...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아내의 시나리오를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남편은 입을 다문다.  내 머릿속 남편의 반응은 이래야 한다.

‘그냥 오래 같이 살자. 당신 주문사항 너무 까다로워서 못 지켜.’

하지만 고단수 남편은 능글거리며 응수한다.

“뭐 그런 걱정을? 재혼은 무조건 젊고 키 크고 예쁜 여자 만나서 할 거야. 성격 좋은 울 애들도 새엄마랑 사이 정말 좋을걸? 돈은 알아서 잘 할게.”

뭐 어쩌고 저째? 이 괘씸한 남편 같으니, 절대로 그런 좋은 일은 없을 거다. 운동 더 열심히 해서 허벅지 더 키울테닷!!! 열 만땅 받아 혼자 쌩 앞질러 걷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매년 경건하게 건강검진을 받는 이유가 있었다.  

검진이 끝나고 나오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시청역 인근 직장인들이 비를 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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