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스타, 근데 나 왜 안 아파?
죄다 나쁜 놈, 쪼잔한 새끼, 하찮은 인간만 만나왔던 난.. 송기후가 아니었다면 남자란 종족을 크게 오해하고 갈 뻔했다. 말투와 행동이 초콜릿 케이크라면 인성은 뭐랄까, 일주일 포옥 끓여낸 곰탕같이 진하고 뽀얗다.
언젠가 숏츠에서 본 바 있는 좁은 골목 손등 스치기 플러팅은 꽤 유효했다. 뭔가 한걸음 훅 들어간 기분이랄까. 공통의 관심사도 즐거웠고 오버랩되는 다수의 취향도 기뻤다. 게다가 언제가 라스트씬인지 모르는 나로서는 마음이 급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일상은 선/사고 후/수습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걸음을 멈추자 송기후가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후회하지 않고 싶어요."
"네?"
나는 눈을 스르르 내리깔면서 송기후에게 다가갔다. 나 같은 숙맥의 최대치란 그저 관심이 많은 남자에게 입술 정도 부딪는 시도였다. 한동안의 정적이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괜한 짓을 했나. 오늘도 이불킥 예약이구나... 송기후가 나를 부르며 손목을 잡았지만 이미 열패감에 휩싸인 나는 잡힌 손목 끊어내며 우사인 볼트가 부럽지 않은 속도로 달렸다. 괜한 짓을 했어. 역시 송충이는 솔잎 뜯고 살아야 배탈이 안나는 건데 죽음 앞의 이벤트라니 나나 알지 송기후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상한 여자로 보는 게 당연해.
띡띡띡띡띡띡!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혹시나 송기후와 마주칠까 봐 현관문부터 쾅 닫았다. 거대한 거북이 등처럼 현관문을 딱 붙이고 과호흡을 하는데 락스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냐, 너."
"나 어뜨케어뜨케...!!"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그게 뭐냐. 이쁜 아기 조카랑 뽀뽀해? 반려견도 뽀뽀할 때 혀를 낼름거리두만. 넌 뭐냐. 네살이세요, 일곱살이세요?"
"조용히 하라구."
송기후네 현관문 소리가 탁 났다. 그제야 나는 침대로 달려와 회한의 다이빙을 했다. 용기의 핵심은 지속력이다. 팔자에 없는 용기 냈으면 적어도 24시간은 버텨야지. 슬쩍 시도해 보고 아닌 거 같으니까 아예 그 용기를 부정하다니, 그 용기를 수치스러워하다니. 못났다.
"암튼.. 너로선 최선을 다한 거잖아. 그게 용하다 난.
그래.. 응, 1센티 넘어섰어. "
"내일 송기후를 마주칠 자신이 없어."
"왜 없어."
"......."
"연애 안해본 것도 아니고."
"둘이 좋아서 시작한 건 처음이란 말이야. 지금까진 연애를 당했고."
"으이그 맹추야."
"나한테 다가오는 남자만 만났어.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후회하면 뭐해. 시간이 없는데."
"근데 내가 다 망쳤다고."
"작작해라. 넌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어."
"나 그냥 오늘 데려가줄래?"
"배터리 1%도 안 남은 주제에 어디 감히 특급배송을 운운해."
락스타는 이상하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내 수치심에 줄곧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바닥에 누워 몸을 뒤집는 락스타를 봤다. 헉... 피...!!!
"락스타! 너 왜 이래."
나는 화들짝 놀라 락스타 머리맡으로 내려앉았다.
"신경 쓰지 마. 너한테 얘기 못해. 저승계의 일이야."
"너네들도 싸워?"
"우리 동네가 얼마나 살벌한데."
"나 때문은 아니지?"
"은근히 자기중심적이야. 니깟 예비망자가 뭐라고 너 때문에 줘터지겠어."
"웅.. 그건 맞지. 하찮아서 다행이네요."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락스타도 치열한 삶을 사는구나. 내가 원인이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도대체 누구랑 주먹다짐을 한 거야.
"약 좀 발라줄까."
"효과가 있겠니."
"그럼 이거만 대답해 줘."
"뭘."
"일방적으로 맞은 거 아니지?"
"당연하지. 그 새낀 기어갔어."
"그럼 됐다. "
그때, 송기후에게 톡이 왔다.
[사람 놀래키고 가버렸으면서 굿나잇도 안 하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전전긍긍했다.
"락스타, 어떻게 해? 그냥 잘 자라고 할까? 놀래켜서 미안하다고 해?"
락스타는 내 휴대폰을 빼앗더니 [뭘 그 정도로 놀라요. 다음엔 으른 키스]를 보내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락스타, 미쳤어? 으른 키스라니!!!"
락스타는 뭐가 웃기는지 계속 풉풉 웃음을 뱉어냈다.
"웃지 마, 어쩔 거야. 어쩔 거냐구. 이게 뻘짓하다 도망친 여자가 보낼 톡이냐구.. 앞뒤가 안 맞잖아."
"금방 잊힐 거야. 천년만년 살 거 아니잖아."
"....!!!!...."
"훗날 송기후가 나처럼 웃을 거야. 재밌는 여자였어... 하면서."
"그러네..."
오늘은 락스타의 말에 깊이 베였다.
"눈감는 그 순간까지 그냥 즐겨, 이율이."
락스타의 그 말은 지금까지와는 분명 다른 어조였다. 맞네.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쓰레기 내놓는 날인데, 깜빡했다."
그제야 현실감각을 되찾은 나는 다 차지도 않은 종량제봉투 입구를 질끈 묶었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잠깐 행복에 겨워 본질을 놓쳤다는 수치심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이 한심한 이율이야. 그때 분리수거를 하는 익숙한 쉐입의 남자가 보였다.
"다음에 언제 볼까요? 놀이공원 갈까요? 다음, 언제?"
송기후다. 송기후도 예외없는 쓰레기배출일...
"그 톡은 장난친 거예요."
"난 장난 아닌데? 기대할게요, 으른키스."
"아... 아니.. 그게...."
"알아요. 그 친구가 장난쳤구나 싶었어요."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내 마음을 알아주네, 저 남자.
"아무리 봐도 이율이 씨 말투가 아니라서. 그 쎈언니구나 했죠."
송기후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슬리퍼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주인이 내려왔다.
"309호. 집 보러 온대. 주말 오전 괜찮지?"
괜히 송기후 눈치가 보였다. 뭔가 속인 듯한 기분도 들고...
"계약 기간 한참 남았는데 아가씨도 참...."
집주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송기후와 나는 계단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율이 씨, 이사 가요?”
이사... 그러네, 어쩌면 이사..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거처로 이동하는 것. 결국, 죽음도 같은 개념인 거지..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나의 현실이 다시금 비집고 나오자 울컥해졌다.
“그렇게 됐어요.”
“난 또 뭐라고... 어디로? 놀러 갈게요.”
“좀 멀리 갈 수도 있어요.”
“얼마나 멀리? 혹시 외국?”
“어쩌면...”
“아.. 유학 가시는구나. 잘됐네요. 축하해요.”
“축하할 일인가요..”
다소 떨떠름한 내 목소리에 송기후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등 떠밀려 가는 거면 가지 마요.”
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송기후의 아쉬움이 내 마음에 아로새겨졌으니.... 그걸로 됐다. 그걸로 충분해.
외삼촌의 출국 직전 공항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삼촌이 날 찾아낸 건 시골집에서 고모를 만났기 때문이라 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문전박대를 당하셨겠지. 취업이 된 후 시골집에 보내드렸던 명함을 전달받으신 모양이다. 외삼촌은 다시 미국에 가자고 제안하셨고 디자인 공부 계속하라셨지만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혹시 모르니까 매년 검진은 꼭 받아."
"네...."
"그래도 다행이야. 건강해 보이니."
".........."
"누나는.....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고 통증에 괴로워했어."
"그래요?"
"스트레스도 극심했지만 통증이 굉장히 심하다 들었거든, 그 병이."
그렇다. 병원에서 진단 후에 락스타가 나타나고 맘고생은 심했지만 병증에 의한 고통은 딱히 이렇다 할 게 없었다. 왜지? 죽을병이 아니라면 락스타가 나타날 리 없고 이렇게 병증이 없다면 진단이 잘 못 된 건가.. 허튼 기대도 품어보았다. 난 왜 자유로운가. 난 왜...
삼촌이 떠나고 나는 공항 벤치에 한동안 앉아있었다. 락스타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가자."
"얘기해줘."
"뭘."
"내 생각 다 읽었잖아."
"......."
"내가 죽는 건 엄마랑 병세가 같아서고 그래서 니가 배정돼서 온 거고."
"........."
"근데 왜 나 안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