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
이율이 땜에 내가 못살아.
하나의 연인, 하나의 친구..
이번 생은 그걸로 충분해?
아니, 차고도 넘쳐?
내가 이렇게 맨 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내가 뭐라고 나를 기다려. 송기후야 짝사랑했으니 그렇다 치자. 어떻게 친구가 나하나뿐이야. 짧은 인생 중 가장 춥고 가장 쓰디쓴 순간에 나타난 내가 왜 그리, 뭐 그리 애틋해.
나를 끌고 갔던 놈들은 결국 나의 결함을 찾아내지 못했어. 공항에서 총을 맞았던 부위가 파손됐겠지만 세탁머신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어차피 복원되어 제로세팅된다. 보통은, 모든 기억을 잃은 채로-
그러나 나는 이율이와의 며칠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다. 세탁머신에 연거푸 몇 번이나 돌려진 뒤 이율이에게 재배치됐다. 그들의 관리시스템에서 나는 완벽한 brand new였지만 선도부 그놈은 뭔가 께름했던 모양이다. 한동안 감시모드였다.
오, 그렇게 나오신다? 그럼 내게도 전략이 필요하지. 이번엔 남들처럼 예비망자의 모습 그대로 변모했다. 잔꽃무늬 원피스에 이율이의 뱅헤어로.... 원래 내 취향의 그 착장은 저들의 감시가 널널해지면 재시도할 생각이다. 일단 급한 대로 구리구리한 이율이 스타일로 눈속임을 했다.
나는 ‘세탁머신에서 다시 태어났고 예비망자와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 리셋’됐음을 어필해야 한다. 락스타처럼 예비망자와의 특별한 관계성을 멈추고 ‘예비망자의 생애종료를 선언’ 한 후에 그의 영면이 결정되면 라이딩하는 역할.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포.인.트.
다시 나타난 나를 이율이는 알아보지 못했다. 락스타가 끌려간 후 새로운 요원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이율이는 본인의 얼굴로 저승사자가 배치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고 락스타의 모습과 태도가 아니니 당연하다. 이율이는 한 번의 경험으로 두 번째의 저승사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도 삐딱하게 그 애를 대했고 이율이도 잔뜩 날이 서있었다. 차라리 저런 태도가 낫지 싶었다.
이율이 옆에 항상 있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락스타와 달리 불청이에게 이율이는 까칠했거든. 선도부 그놈은 나를 감시하며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락스타가 아닌 척 부러 이율이를 긁었는데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선도부 녀석이 이율이 에게로 뛰어내렸다. (공항에서도 선도부 그놈은 나를 부축했던 이율이를 친 바 있다. 이 부분은 내 반드시 문제 삼을 것이다.) 직접적인 공격이라기보다는 위협이겠지. 이율이는 자기 혼자 넘어졌다고 생각했겠지만 명백한 선도부 그놈의 계략이었다. 내 행동을 테스트하려 한 모양인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도 나는 그놈의 기습에 살짝 말렸다. 그놈의 착지 지점은 이율이가 아닌 바로 옆 텐트였으니까. 나는 이율이에게 달려가며 선도부 놈을 막아섰다. 녀석은 비릿하게 웃으며 모닥불 앞 의자에 앉았다.
살짝 당황한 나는 공연히 이율이에게 윽박질렀다.
“조심 좀 하자, 응?! 예정일 보다 빨리 가고 싶어?”
그 와중에 나는 이율이와 눈을 맞추고 동기화를 시도했고 다행히 이율이는 캐치해 냈다. 공항에서 선도부 놈에게 이율이가 밀쳐진 바 있기에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 일로 이율이의 소울 어딘가에도 흠집이 남았을 것이다.
내가 락스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율이는 안도하며 송기후가 있는 수돗가로 가 꽁냥거렸다. 그 사이 나는 선도부 놈과 한판 붙었다. 물론 공항에서의 이율이 공격을 문제 삼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리셋되지 않았다는 게 즉각적으로 입증이 되므로 그 카드는 최후에만 쓸 수 있다.
“예비망자를 그런 식으로 위협하는 건 불법 아닙니까.”
“그런 식?”
“제겐 예비망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만 당신은 위협할 권리 없습니다. 제게 이식된 매뉴얼 북에는 그렇습니다.”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그렇게 뛰어들진 않아. 의심 살 행동은 자제하도록.”
“제가 생각하는 보호는 그런 겁니다. 저를 제외한 모든 위협으로부터 안전확보. 문제 있습니까.”
“허튼짓 또 하면......”
“‘또’라뇨?”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선도부 놈은 저벅저벅 걸어와 내 귓가에 소름 끼치는 한마디를 남겼다.
“완전 소멸.”
저 자가 공항에서 내게 총을 쐈던 이유는 추정컨대 이율이의 그 질문과 닿아있다.
“근데 나 왜 안 아파?”
어쩌면 현신보다도 더 큰 인간사의 개입. 예비망자의 고통에 개입하는 일. 아주 특별한 동기화. 아니 위험한 덮어쓰기.
길이 막혀도 짜증 나지 않는 게 사랑이다. 시간 낭비가 아니니까. 송기후와 난 극악의 정체 도로 위에서 시덥잖은 얘길 하며 시간을 나누어가졌다. 몸에 해로운 간식도 거침없이 먹어치웠다. 노브레이크의 일상. 현재만 있는 삶. 나쁘지 않아.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발신자 [서대표]로 휴대폰이 울렸다. 아놔... 아직 수신 거부를 안 했다니.. 나도 참 나다. 그렇게 몇 통의 전화를 무시하다가 이참에 수신거부 하자 마음먹고 버튼 조작을 하는데 실수로 전화를 받아버렸다. 휴대폰 너머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 안 받아~~~~~]
서대표 아들 녀석 목소리다.
“너, 왜 울어.”
[이율이 지금 와, 당장 와.]
막무가내로 울며 오란다.
“나 지금 못 가. 아니, 안 가.”
[엄마가 안 움직여. 안 움직인다고]
헙...!! 놀랐지만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빠한테 전화해.”
[아빠 요즘 집에 안 들어와. 전화도 안 받아. 엄마는 며칠 째 잠만 잤어.]
이번엔 딸내미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죽은 거 같아, 무서워. 빨리 와.]
아들 딸 둘 다 숨넘어가게 우는 소리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며칠 째 잠만 잤다는 게 걸렸다. 일단 진정하고 직장 상사 최팀장에게 사실을 알렸다. 집에 올라가 보시고 119에 신고하시라고 부탁했다. 아이가 전화해서 상황은 잘 모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고, 나도 곧 가겠다고.
역시나 서대표의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남긴 뒤 한숨 돌렸다.
“서대표, 잘 못 되는 거 아니겠죠?”
“자책하지 마요.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 했잖아. 눈 감고 좀 쉬어.”
서대표의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달려와 안겨 울었다. 못돼먹게 굴던 아이들도 어떤 공포 앞에서는 한낱 꼬맹이였다. 아이들과 함께 있던 최팀장은 서대표가 119에 일단 실려가긴 했는데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서대표의 남편은 불륜 사건 후 보이지 않았고 서대표도 며칠 째 출근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 사달이 났다며. 최팀장은 병원에 가서 연락하겠다고 나갔다.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서대표의 침대 주변은 여러 개의 와인병이 뒹굴고 알 수 없는 약통이 쏟아져 난리가 나있다. 주방은 아이들이 시켜 먹은 음식들 잔해들이 쌓여있고 한마디로 엉망진창. 부티 좔좔 흐르던 아이들도 관리받지 못해 꼬질꼬질했다. 결국은 외할머니에게 연락이 닿았고 나와 송기후는 그제야 그 집을 나섰다.
서대표의 자승자박이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은밀한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외간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그녀의 선택이었을까.
한 번 웃고 겨우 1분 적립해 감읍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이기지 못해 절반 밖에 쓰지 못한 자신의 목숨을 내동댕이친 채 생과 사 경계에 있다. 이제 모든 건 그녀의 정신이, 육체가 결정할 것이다. 그 경계에서 모든 걸 놔버리든, 혹은 스스로 일어나 수습하든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그 대목은 진심 질투가 난다. 부여된 여생의 질량과 부피에 따라 이럴 수가 있나. 나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열망이 차올랐다. 내게 그토록 절실한 시간을 서대표 그녀는 쓰레기통에 처박은 것이다.
산다는 게 뭘까...
산다는 건 정말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