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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생으로 연재에 펑크가 났었네요. 죄송..
해령은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고 그녀의 모친도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은호와 선호가 머그잔 하나씩 들고 거실소파에 앉아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은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알았다면서 왜 굳이 가자고 했어?”
“그 할머니 복잡하라고. 일종의 폭탄 던지기.”
“못됐다. 못됐어”
“당신이 불완전, 불안정하게 키우고 방출했으니 A/S 해서 보내란 거지. 이 상태로는 안 돼.
내가 안 하면 아들 며느리 일생을 홀랑 벗겨먹을 거야. 돈만 축낼까? 아니, 또 다른 가스라이팅이 시작되겠지. 이건 경험자로서 말하는 거야.”
“내가 상황을 그렇게 놔둘까?”
“아니. 아닐 거 알아. 근데 최봉이는 다르지.”
“다르지 않아. 봉이는 나보다 더 똑똑하고 나보다 더 현명해. 누가 됐든 우리 울타리를 박살내면 바로 코뿔소로 빙의할걸.”
“에휴, 시부모랑 갈등 있는 며느리가 뭐 안 똑똑해서 그러는 줄 알아? 예의와 의무 사이에서 길을 잃는 거야. 특히 남자 놈이 모지랄 때 더더욱.”
“니 걱정이나 하셔.”
“보헤미안 스피릿이니 걱정하지 마. 하늘 지붕, 풀밭 카펫, 그리고 바이올린.. 그거면 돼.”
“그럼 보헤미안한테 시집보내줘야겠구나. 혼수비용은 안 들겠어.”
은호는 피식 웃었다.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최봉이랑 맛있는 거 먹어. 파인다이닝에 예약했어.”
“봉이 그런 거 싫어해.”
“그런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냐. 좋아하는 척을 못하는 거지. 오빠 니 상황 아니까.”
“........”
“최봉이 지금 메이크업받고 있을 거야. 샵으로 픽업 가. 방문에 걸어 둔 옷 입고.”
선호의 시선이 닿은 곳에 근사한 세미 정장이 걸려있다.
“돈을 왜 그렇게 막 써. 본격 백수가.”
“쟁여놓은 도토리가 좀 있어. 있는 사람은 써야지. 그게 의무라고 본다.”
“소상공인한테 써야 시장이 돌지. 멍충아. 있는 것들이 있는 것들한테 쓰는 게 뭔 의무야.”
“아후, 그냥 좀 순순히 좀 가라. 결제 끝났다고.”
“내 일상이 너 때문에 변주되는 거 질색이야.”
“알았어, 이제부턴 오빠 너한테 찐짜붙을게. 됐지? 아, 빨랑 나가. 최봉이 기다려.”
봉이는 뭐 하느라 아직도 안 나온다. 신부화장 하나.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문자 남기고 선호는 30분을 더 기다렸다.
나가서 제자리 걷기라도 해야겠다 할 차에 문이 열리고 팅커벨이 걸어 나왔다. 예쁜 원피스와 화사한 메이크업을 한 봉이는 너무 예뻤다.
“나, 어때?”
잠시, 선호의 시선이 갈 곳을 몰라 헝클어졌다.
“예뻐?”
“.............”
“예스 오얼 노도 안 해주는 이딴 놈 뭐가 좋다고.”
“못생긴 날에만 얘기할게. 됐지?!”
뭔 소린가 버퍼링 되다 봉이 입꼬리가 실룩 올라갔다.
“절대 처음 온 티 내지 말자.”
봉이는 선호에게 다짐을 받아냈다.
“그런 말 하는 거부터가 티 내는 거야, 최봉이.”
“주문은 어떻게 하는 거지?”
“뭘 하려고 하지 말자. 한은호가 다 알아서 했대. 순차적으로 나오는 접시 맛있게 비우면 돼.”
“진짜 티 나겠네. 시골쥐커플.”
“이런 거에 기죽지 마. 니가 원하면 일 년에 한 번은 사줄게.”
“평생?”
[평생]이란 말에 선호는 잠시 멈칫했다. 뭔가 떠보고 싶었던 봉이는 겸연쩍었는지 시선을 돌렸다.
“응. 평생.”
선호는 근사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문을 열었다.
은호는 빈 거실 소파에 벌렁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휴대폰이 울려 보면 모르는 번호다. 설마 그 은발의 여인?
[네.]
[접니다. 부산]
자신을 부산이라고 표현하는 다소 황당한 자존감. 존대형 어미를 써도 느껴지는 메탈릭 한 냉정함...
[왜 제 번호로 전화하셨죠? 한선호 쪽에 더 호의적인 줄 알았는데요.]
[더 무례한 쪽으로 전화한 겁니다.]
역시나 뼈를 때리는 냉정함.
[아, 무례한 말씀을 하시려고요?]
[비슷합니다.]
[들어나보죠.]
[이해령 씨를 부산 쪽 병원으로 이송하겠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단절된 시점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집에서 쫓겨난 시점. 두 분이 존재하지 않던..]
[한선호랑 상의해 볼게요.]
[아뇨, 그렇게 하겠단 소립니다. 그리 아세요.]
은발할머니는 전화를 뚝 끊었다. 역시 사람의 온도란 보고자란 대로 설정되는 법이다. 허긴 같은 피를 물려받은 한선호라고 크게 달랐겠냐만 오빠 걔는 아빠와 할머니의 집중케어로 그토록 따순 인간형이 되었겠지.
엄마의 품만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은호는 욕망은 씨앗이 심겨진대로 인성태부족의 현실을 절감할 뿐이다.
그래서 한선호가 그리웠나 보다. 어쩌면 실제 누렸을지도 모를 아빠와 할머니의 온기.. 물론 한선호는 은호에게 퍽 다정한 오빠는 아니었지만 그가 내뿜는 공기는 따뜻하고 신맛이 없으니까.
은호는 더 이상 스케줄을 잡지 않았다. 과거에 진행했던 공연기획은 물론 하기 싫다고 뒤엎을 순 없고 더 이상 일정을 잡지 않는 선에서 차대표와 논의했던 바이다.
떠나기 전, 이 집을 세상 꿀맛 나는 한선호의 신혼집으로 바꿔줘야겠다 생각했다. 그것도 질색을 하려나... ‘떠나기 전...’ 은호는 그 말을 반복해 떠올렸다.
떠나기 전...
봉이가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자 선호도 무의식적으로 같은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짜증 나.. 이런 페어링.”
“히힛... 짜증 나지? 나도 울 아빠 노동요 따라 부른다니까.”
“근데 이거 무슨 노래였지?”
“영화 ost인데 그거 재개봉하더라고. 옛날에 너랑 보고 싶었는데...”
“보러 가자, 지금.”
“진짜..??”
“그까짓 게 뭐라고.”
“히히... 한선호랑 19금 보러 간다.”
이건 꿈일까.. 해령은 어릴 때 살던 집의 마당에 서있다. 한 켠에선 바이올린을 켜는 예쁜 아이가 보이고 그녀의 부모로 보이는 이지적인 부부가 어린 딸의 연주에 감탄하고 있다.
“이해령...?”
어린 딸은 고개를 홱 돌려 초췌한 해령을 쏘아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