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령은 은호를 향해 소리쳐 놓고는 은애 뒤로 또 숨어버린다.
“어떻게 사람이 이래. 자신을 돌이켜볼 기회를 또 이렇게 날려. 어? 끝까지 이기적이야, 정말.”
은호는 은애를 바라보며 까칠하게 말했다.
“대단한 따님을 창조하셨네요.”
“한은호, 그만해.”
은호는 씩씩거리며 해령을 노려보다 병실을 나가버렸다. 선호는 난감했다.
“은호가 맺힌 게 많아요. 이런 상황.. 죄송합니다.”
선호는 꾸벅 목례하고 은호의 뒤를 따라나서려는데.. 해령의 목소리가 귀에 박힌다.
“혹시 영어쌤 형이에요?”
적어도 열아홉의 해령에겐 그랬나 보다. 선호와 선호 아빠의 가느다란 접점을 캐치해 내곤 그 애들의 아빠 형순을 떠올렸나 보다.
“선호 군의 아버지를 말하나 봐요.”
“아니야, 영어쌤은 스물한 살이야. 병원으로 오라고 해, 엄마. 여기서 공부할게.”
선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한 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선호의 기억엔 매일 전쟁을 치렀던 엄마 아빠가 전부였지만, 한때나마 한 남자를 절절히 사랑했을 ‘전, 모친’의 낯선 모습에 신선한 소름이 돋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래요.”
선호가 나가자 새초롬하게 침대에 눕는 해령을 보며 은애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은호는 엄마가 환멸스러우면서도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 뭘 그리 바라나 자책했다.
은호가 앉아있는 벤치에 선호가 털썩 앉았다.
“힘들면 그냥 서울 가.”
“오빠 넌, 엄마가 밉지도 않아?”
“미워. 밉지. 근데 뭐라도 도와야지. 할머니 혼자 감당하겠냐고.”
“거울 보면 열아홉 아닌 거 알 텐데 쇼가 아닐까 싶다, 난.”
“나보고 형순오빠네 형이냐며.”
“헐..”
“니가 보기에도 나 아빠 닮았어?”
“그 피가 어디 가겠니. 암튼 열아홉으로 컴백한 게 마냥 거짓말은 아닌가 보네.”
그때 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민이다.
“뭐야, 벌써 나 찾았어?”
[외가 주소 알려준 거 나잖아.]
“맞네... 씨...”
[그 집 가보니 병원 알려주던데? 정문으로 와.]
선호는 환히 웃는 은호의 옆얼굴을 살폈다.
“차대표?”
“어. 부산에 왔대.”
“다녀와. 별일 없을 거야.”
“회의하러 온 거야, 차대표.”
“누가 뭐래.”
병실 앞 복도 벤치에 은애가 앉아있다. 걸어오던 선호는 그 옆에 거리를 두고 앉았다.
“힘드시죠?”
“아직은 견딜만합니다.”
“저희가 서울로 모셔갈까요?”
“아니에요. 해드릴게요. a/s.”
“.........”
“언젠가 숨이 멎는 날, 미안하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해령인 정신이 돌아오면 스스로 떠날 겁니다. 그동안만이라도 곁에 있어볼게요.”
“기억을 잃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근데 해령이 손이 왜 그렇게 된 건가요.”
“그즈음의 일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해령이의 전부였어요. 바이올린은.. 저 애의 마음이 뒤틀어졌다면 아마 다친 손 때문이겠죠.
선호 군 때문이 아니라..”
“.........”
“요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a/s.”
"응해 주셔서 감사하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어떤 딸이었나요.”
“우리 부부의 전부였지요. 그런데 영어과외 선생에 빠져서 우리 곁을 떠났답니다. 억지로라도 유학을 보내려 했는데 아이를 가졌더라고요. 그 아이 때문에 해령인 꿈을 버렸고, 심지어 행복하다고 했어요. 그 이후, 남편은 해령이에게 실망이 너무 깊어 완전히 등을 돌렸구요. 뱃속의 그 아이가 선호 군이었군요.”
“.......!!.........”
자신의 꿈을 버리면서까지 지켰던 선호라지만 선호의 기억 속의 엄마는 아이를 잡는 엄격한 스승이었을 뿐 분명 따뜻한 엄마는 아니었다. 심지어 행복했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호는 자책했다. 왜 전, 엄마의 손이 오그라들었을까. 나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내가 그토록 미웠을까..
“먼저 집에 가서 좀 쉬세요. 방 준비는 해두었답니다. 해령이 잠들면 저도 곧 갈게요.”
선호는 은애의 말대로 외가로 돌아왔다. 지난번 만났던 중년의 도우미 여인은 반갑게 선호를 맞아주었다.
“동생 분 방은 옆 쪽이에요. 쉬세요.”
침대에는 오래된 캠코더가 놓여있었다.
“저.... 이게 뭔가요?”
“이 댁 따님 짐을 정리하는데 이 물건이 나왔어요. 여사님은 다 버리라고 했지만 중요한 거 같아서 따로 보관해 두었는데 주인에게 전해주게 됐네요.”
도우미 여사는 다른 말 없이 꾸벅 목례하고 나갔다. 선호는 낡은 캠코더를 집어 들고 재생버튼을 누르는데...
갓난아이를 재우는 어린 엄마 해령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랑스러운 손길로 아기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해령이다. 그 모습을 찍는 아빠 형순의 목소리가 같은 노래를 흥얼거린다.
[우리 선호 너무 천사 같지 않아?]
[잠투정도 안 하고 완전 효자네. 날씨 풀리면 선호 데리고 부산에 가자.]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내가 빌게. 넌 그냥 내 뒤에 숨어.]
[이렇게 이쁜 선호 보시면 마음 풀리실 텐데...]
꿀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해령은 잠든 선호를 바라보다 그 작은 뺨에 살짝 입 맞춘다.
[좋은 꿈 꿔, 우리 아가. 니가 무슨 꿈을 꾸든 엄마가 다 밀어줄게. 그러니까 항상 기억해. 엄마 아빤 우리 선호 진짜 사랑해.]
휘둥그레지는 선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