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글리 21화

어글리 21 _원위치

by 햇빛투게더

그토록 미워했던 무모성의 어미였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한 날, 어느 한 시점.. 그녀는 절절한 모성의 눈빛으로 한 아이에 대한 일생의 사랑을 고백했다. 휘발성이나마 어미의 사랑이 존재했다니.. 그녀에 대한 미움이 아주 조금은... 아주 조금은 흩어졌달까..

선호는 고은애가 노크하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반복해서 영상을 봤다.


“식사 준비됐는데 한은호 씨는 늦나요?”


고은애는 침대 위 낡은 캠코더에 멈칫했다.


“표정을 보니, 버리면 큰일 날 뻔했군요. 이럴 때 보면.. 나보단 저 친구가 더 현명하다니까....”

“............”

“결혼이고 뭐고 우린 무조건 데려다 놓자 했는데 선호 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 영상을 보내왔어요. 그래서 데리러 못 간 겁니다. 아니, 안 간 거지.. 아이를 품에 안아버린 에미를 무슨 수로 데려오겠어.”

“이런 시절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상당히 당황스럽네요.”

“혹.. 묘한 감동이 드나요?”

“그래서 더 밉네요. 영원을 약속해 놓고 겨우 몇 년 만에 변심한 거잖아요. 어르신은 그게.. 되던가요?”

“할 말 없게 만드시네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은애는 선호를 이끌었다.


“좀 늦었지만 식사하시죠.”


선호는 고은애의 뒤를 따르며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어미들의 모성에 이물질이 끼지 않았다면 계속 훈훈하게 이어졌을 두 개의 천륜.

모든 것이 뒤틀어진 지금.. 원위치될 수 있을까..




밤바다에 앉아 은호와 정민은 맥주를 마시고 있다.


“여사님 때문에 힘들겠다.”

“아니. 차정민 때문에 힘들어.”


정민은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볼 뿐 별말은 없었다.


“뭐야, 놀라지도 않네. 왜 무반응이야.”

“은호야.”

"....."

“천벌 받을 소리지만 난.. 그 자리 그대로 있어.”

“역시 재미없어.. 차정민.”


정민을 타박하면서도 은호는 어쩐지 안심하는 눈치다.


“다시 회사로 와. 니가 만들었잖아.”

“기계약 건을 마치면 나 진짜 그만둘 거야. 금방 잊혀질테고 그쯤되면 핫셀럽도 아닌데 뭐 하러.”

“플레이어 말고.”

“어?”

“[클레어 한 키즈]들.. 니가 키워보라고. 어린 학생들 아니면.. 무대가 필요한 어글리 씨부터.”


은호의 눈썹 한쪽이 실룩 올라갔다.


“클래식, 크로스 오버, 아마추어 뭐가 됐든.. 아니면 교수가 되든.. 영재발굴을 하든.. 여사님 마수에서 벗어나

라고.”


쿵쿵쿵-

정민의 그 말에 은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심장이 뛰는 일을 해. 니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니 옆엔 나 있다.”


진작 떠났어야 할 엄마 옆이 아니라

절대 놓치지 말았어야 할 정민의 옆...

이토록 달콤한 원위치..


“실은 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어.”

“해. 뭐든.”

“내 채널에 콘텐츠 올리려고. 토크쇼 겸 미니콘텐츠.”

“첫 번째 프로젝트는...?”

“늦잠 자는 여사님 깨우기.”

“응?”




해령이 입원해 있는 병원 로비에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은호의 미니 콘서트를 알리는 배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정민은 촬영을 준비한다.

'클레어 한'의 유명세 때문인지 병원 측에서도 흔쾌히 협조했고 덕분에 청중들이 빽빽하게 모여들있다.


또각또각 경쾌한 하이힐 소리에 시선이 집중됐다. 아름답게 꾸민 은호의 등장에 로비를 메운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울려 퍼졌다. 무대 주변은 물론 각층의 회랑에도 환호하는 갤러리들로 가득하다. 2층의 회랑에는 고은애와 이해령, 그리고 선호가 위치해 있다. 은호는 가족을 향해 환히 웃음을 지었다. 은호는 화려한 독주를 시작했고 사람들은 숨이 멎을 듯 그녀의 연주에 집중했다. 미동 없이 지켜보던 해령의 눈동자에는 은호의 퍼포먼스가 가득 담겼다. 부러운 듯, 어쩌면 자랑스러운 듯..


선호도 마찬가지다. 에휴.. 한은호 저 자식.. 잘한다, 잘해. 어쩌면 전/모친의 선택은 옳았을지도 모른다. 무대의 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어린 날의 자신을 떠올리고는 선호도 씁쓸한 미소를 보낸다. 실력만큼 중요한 스타성과 무대 장악력... 세상이 원하는 육각형 인재는 누가 뭐래도 은호 그 애니까.


그때 훌쩍이는 해령을 보다가 고은애와 선호는 시선이 부딪혔다. 뭘까.. 저 눈물의 의미는. 은애가 설마 하고 해령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기억나니?”

“아뇨..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요. 저 언니.”


절망은 지루하게 지속된다.




다음 날, 해령이 퇴원했다. 하지만 해령의 퇴행은 여전했고 고은애의 한숨도 늘어갔으며 은호와 해령의 대립도 극심해졌다.


“거울을 봐. 도대체 무슨 근거로 열아홉이라는 거야. 아빠도 돌아가셨어. 이해령 씨 남편 한형순 씨.”

“열아홉이라니까 결혼은 무슨 결혼,”


주방에서 곰탕 불조절을 하는 도우미 여사를 보고 해령이 물었다.


“아줌마, 오늘 뭐 먹어?”

“따님이 곰탕 좋아하신대서 어제부터 끓이고 있어요.”

“잡채도.”

“이해령 씨는 잡채 거들떠도 안 봤어. 내가 좋아하지.”

“좋아해. 잡채.”

“나원 참.. 식성도 퇴행함?!”


은호는 삐쭉이는데 주방으로 오는 선호와 스친다.


“나 서울 다녀올 건데 넌 어쩔래.”

“서울? 왜?”

“봉이 생일.”

“오빠 너 없이 나 혼자 어쩌라고.”

“그래, 말씀드리고 다녀오자.”


도우미 여사는 고은애의 전화를 받으며 나갔다.


“네, 사모님... 시장으로 갈게요.”


해령은 곰탕 근처로 가서 뚜껑을 살짝 열어본다.

불 근처 아일랜드 식탁에서 바나나 까먹던 은호가 선호에게 묻는다.


“곰탕 좋아하는지 몰랐네. 오빠 넌 기억나?”

“전혀.”

“위험해요. 이쪽으로 나와요.”

“싫어, 저리 가.”


그때 해령의 머릿속에 비슷한 광경이 스친다. 그녀의 눈에는 미취학의 두 아이가 빽빽 울고 있다. 펄펄 끓고 있는 곰탕, 나를 방해하는 아이들 동선..

이게 뭐야... 고개를 흔들며 휘청하는데 선호가 해령을 부축한다. 기겁하며 선호에게서 벗어나던 해령은 곰탕 솥으로 뒷걸음치다 살짝 손을 데이고 만다.


“까악....!!”

“괜찮아요?”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내 손이 이렇게 된 것도! 내 인생 엉망으로 만든 것도!!! 나가!! 나가!!!”


해령의 악다구니에 놀라보는 선호와 은호인데..


“설마... 내가 손을 다치게 했어요?”

“그래!!! 너 때문이야, 너!!!!!!!!!!! 기억도 못하는 너 때문에 내 속만 썩지.”


선호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원위치다. 다시 전쟁이다. 기억나지도 않는 나의 원죄로 죄책감까지 장착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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