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으로 뛰쳐나오는 선호를 따라 은호가 나왔다.
“내가 괴물을 만들었어.”
“오버하지 마. 그게 뭐든 오빠 니 잘못 아니야. 나도 기억 안나는 사건이면 ”
“...........”
“최봉이 생일이라며. 일단 올라가. 은발 으르신한텐 내가 말할게. 근데 운전할 수 있겠어?
차대표 부산에 있는데 부탁할까?”
“아니..”
선호는 차에 오르고 은호는 착잡해져 멀어지는 선호의 차를 바라본다.
잠시 후, 도우미여사와 고은애가 장거리 들고 들어온다.
“선호 군은 어디 가나요?”
“일이 좀 터졌네요.”
은호는 체념한 듯 도우미 여사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주방 수습 좀..”
도우미 여사가 들어가고 고은애와 은호가 마주 선다.
“이제 본격적으로 a/s 해주세요. 저도 그만 가볼게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엄마... 돌아왔어요. 제 자리로.
그 과정에서 곰탕을 엎었네요.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나 봅니다.
엄마 손이 오그라든 이유, 한선호를 미워하게 된 이유... 그 트라우마가 엄마를 깨웠나 봐요.”
“또 다친 건 아니죠?”
“한선호는 마음을 또 다친 거 같네요.”
“.......”
“애정결핍이 확실합니다.”
“그건 좀 억울하네요. 우리 딴엔 충분히 사랑을 부어줬거든요.”
“사랑받기 위해서 용 썼을 수도 있죠.”
“네?”
“잘 생각해 보세요. 칭찬에 목마른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기를 녹이는 거예요. 그 틀에 자기를 녹여서 새로운 행태로 만든다구요. 캔들처럼요. 참고로 이건 경험담입니다.”
은호는 벌떡 일어나 대문으로 향하다가 뒤를 홱 돌아본다.
“엄마가 보낸 콘서트 초대장.. 왜 무시하신 거죠?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그렇게 밉던가요? 못 이기는 척 와서 박수한번 쳐줬으면.. 고생했다, 잘했다 해줬으면.. 저렇게 이상해지지도 않았어요. 인정욕구 쩌는 사람이라고요. 그게 사는 이유라고.”
“갔었습니다. [클레어 한] 공연장. 비록, 다른 좌석에 앉았지만.. ”
“그건 더 비겁하죠. 아니 온 만 못한 거고.”
“.........”
“수신자가 원하는 사랑을 주세요. 여사님의 엄격한 룰 말고...
난 그게 a/s의 핵심 같은데.”
은호는가버리고 홀로 남겨진 은애는 순간 두려워졌다. 뒤틀릴 만큼 뒤틀어진 수십 년 만의 이 지독한 관계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
은호는 정민의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어르신이 고생하시겠네.”
“엄마랑 딸이 오래된 기싸움 할 거야. 자존심 그게 뭐라고... 아이고, 의미 없다.”
“오빤 좀 괜찮아?”
“이 집에서 제일 어른이야, 오빠 걔가.
잘 정리하겠지. 근데 좀.. 너무 착한 건가... 뭔 원죄의식이 생겨서는 괴로워하고 난리.”
“원죄의식이라니..?”
“엄마 손... 한선호 때문인가 봐. 근데 너무 어려서 기억도 안 나는 건데 바보 같이..”
“신경 쓰이긴 하지.”
“이럴 때 보면 둘이 비슷하다니까.”
“어르신 혼자 감당하실까.”
“두 분이 아주 그냥 쎄하니 동족 맞아. 잘 해내실 듯.
아마 ‘자기애’랑 비슷할 거야. 난 그 힘을 믿어. 어쩌면 사랑이 기막힌 시작될 수도..”
“그러네..”
“그 옛날 노래 알지? 사랑이 오려나 봐요~”
“야, 넌 노랜 아니다.”
은호는 팔꿈치로 장난스럽게 정민을 찍어대고 정민의 얼굴엔 미소가 번져간다.
가게문을 닫으러 정리 중이던 봉이와 봉이 삼촌은 벌컥 열리는 문에 돌아봤다.
“영업끝났.. 어?! 한선호.”
“아들내미 부산 갔다더니.”
“........”
“기운이 한 개도 없네... 밥부터 한 술 뜨자, 잉?!”
“삼촌.. 저 지금 아무것도 안 들어가요.
저 실은... 여쭤볼 게 있어서 왔어요.”
“뭔데..?”
“저 어릴 때 있던 일..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은호엄마요.. 손에 화상 입은 거...”
“왜. 너 때문이라고 하디?”
“...........”
“나야 뭐 대충만 알지, 자세히는 모른다. 헌데.. 니가 궁금타 하니 아는 대로만 말하자면..”
“.....”
“유학준비하던 잘 나가는 집안 딸내미 영어 과외를 해주다 선호 니가 생겼어.
앞길 창창한 두 사람이 어린 나이에 갑자기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양쪽 집에서 뜯어말렸지.
그래도 어쩌겠어. 그렇게 이쁜 꼬물이가 태어났는데..
한동안 눈꼴시게 이쁘게 살두만.. 느그 에미가 눈이 한 번 돌아버렸어. 다시 유학 간다고 난리 쳤지. 만년 이인자였던 친구 한 명이 미국에서 터진 거라. 큰 상 받고 갑자기 거장이 돼서는 느그 에미 속이 디비진 거지.
그다음부터는 상상이 가지? 뭐 이해는 간다. 사랑 그 까잇게 얼마나 가겠냐고. 한없이 초라해졌으니 성공한 친구 소식에 각성 지대로 된 기지.
친정이랑은 진작에 등졌고 남편하고까지 불화가 시작되니 일단 유학비 번다고 레슨 다니고 애들은 그지꼴에 집안 꼴 엉망이니 형순이 가가 폭발해 버렸고.. 암튼 분위기 살벌했다고.
어느 한 날 느그 에미가 와서 애들 먹일 곰탕 끓인다고 재료 부탁을 했어. 내가 시장 다니니 좋은 고깃감 싸게 살 수 있었거든. 곰탕 한솥 쟁여놓고 유학 떠날 눈치였어.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곰탕재료 준 날 느그 에미 병원에 실려갔어.
뭔 난장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곰탕이 사단인 건 확실하다. 니들이 너무 어렸으니 기억도 못하겠지만.. 그렇게 니 에미는 또 유학이 좌절됐어. 손가락이 오그라 붙었거든. 바이올린은 뭐 더 이상 할 수도 없었겠지. 근데 니들이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거라. 특히 선호 너.
꿈을 잃고 절망하던 니 에미한테 이제 자기의 꿈을 대입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콩쿠르인지 뭔지 시킨다고 애를 잡더라고.
콩쿠르에서 니가 겁먹고는 도망쳤으니 아마 느그에미는 모든 희망을 잃었을 거야.
그다음부터는 은호를 잡기 시작했지. 너는 완전히 눈밖에 나고..
느그 에미 손.. 너 때문에 다쳤냐 물었지? 그건 맞아. 형순이 금마한테 들었으니까 맞을 거다.
근데 선호야.. 느그 에미가 왜 다쳤겠어. 아무리 미워도 내 새끼 다치는 꼴을 어느 에미가 보겠냐고...
결과적으로 니가 더 미워졌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성이 발동하지 않았을까.
나도 이상하게 변해버린 느그에미.. 꼴사납고 싫다. 너한테 함부로 하는 것도 빡치고...
그래도 그 손의 상처.. 그건 어쩌면
그 여자가 품고있던 순수한 모성이 아닐까.. ”
100%의 미움과 환멸이 존재할 때가 좋았다. 그녀의 불행에 선호의 원죄지분이 있다는 건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니. 선호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봉이가 와서 옆에 누웠다.
“딱 5분 있다가 갈게. 타박하지 말아 줘.”
“짜증 나.. 생일 축하하러 온 건데..”
“생일 그까이꺼 뭐.. 평생 챙겨주면 되지.”
“또 곰탕이야. 불 앞에서 곰탕이 끓었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렸어.”
“마녀의 컴백이네. 근데 넌 그때의 무기력한 상꼬마 아닌 거 알지?”
“......”
“절대 니 탓하면 안 돼. 괴로워도 말고. 그렇다고 잊지도 마.”
“알아.”
“그냥 천둥번개처럼 자연현상, 자연재해라고 생각하자.”
전/모친과 은호가 사라진 뒤 할머니만큼이나 선호의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주던 봉이였다.
“사랑이 오려나 봐.”
“어?”
“니 옆에 있으니까 그런가... 제대로 싸워 볼 힘이 생겼어. 오늘까지만 허우적댈게. 오늘까지만.. ”
하품하며 웅얼거리는 선호의 목소리에 봉이는 울컥해졌다.
봉이의 품에서 선호는 깊게 깊게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