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삐걱.. 하고 은애의 방문이 열렸다. 들어서는 그림자, 해령이다. 해령은 불 꺼진 방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낚아채었다. 소리 안 나게 서랍을 열어 뒤적거리는데 갑자기 불이 켜졌다. 화들짝 놀라는 해령과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은애-
“이거 찾니?”
차키를 들어 보이다가
“아님, 이거?”
지갑을 들어 보이는 은애다.
수치심에 잠시 시선이 헝클어졌던 해령은 미간 한번 꾸깃하다가 이내 뻔뻔하게 표정을 바꾼다.
“예전엔 이쁜 옷 많았는데 취향도 늙나 봐요. 도우미 아줌마한테 빌리는 게 낫겠어요.
할머니 옷 보단 낫겠지.”
“모욕하는 수준이 낮구나. 허긴 누굴 탓하겠어. 내가 싸지른 내 허물인걸.”
“모욕하는 수준이 높군요. 본인 탓 하면서 상대방 멕이는 스킬... 하나 배웠습니다.”
“어디 가려고?”
“여기 살 순 없잖아요. 날 내친 곳인데.”
“말은 바로 하자, 니 발로 나간 곳이지.”
은애는 해령이 들고 있는 옷을 보고는 말했다.
“불 켰으니 입을 만한 걸 골라보렴. 그 옷은 별로구나.”
은애가 나가면 깊은 한숨을 내뱉는 해령이다.
은애는 운전석에 앉아 선글라스를 썼다. 조수석의 해령은 은애가 가진 옷 중에 가장 화려한 색상의 니트차림이다.
“밥 먹고 쇼핑부터 하자꾸나. 할머니 옷 싫을 테니.”
“사줄 거예요?”
“그래.”
“근데 나.. 어떻게 여기로 왔어요?”
“니 아이들이 a/s 해달라고 찾아왔었다.”
“기막혀.. ”
“너 코마상태일 때 부산으로 이송했다.”
실은 해령은 엄마와 이렇게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저 깊은 마음자리 어딘가 그립기도 했다. 한때는 부모의 무제한 애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속여 그들의 틀에 맞춰 살았고 살면서 단 한 번, 사랑에 빠져 결혼을 추진했을 때 부모를 설득하지 못해 내쳐졌다. 그 패배의 기억은 늘 해령의 발목을 잡았고 메뉴를 정하는 사소한 경우까지도 인정욕구 쩔었다.
부모의 양육스케줄과 숨막히는 기대에서 이탈한 이후로 어떻게든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야 했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클레어 한]이라는 자산이었다.
허나, 은호는 과거의 자신처럼 폭발해 버렸고 강한 탄성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어쩌면 현재의 해령이 과거의 은애의 마음을 헤아릴 경험치가 생겼다는 것. 그러나 해령의 저항성은 순순히 응할 명분도 의지도 없었다.
누군가 처참한 현재를 욕 먹을 빌런이 필요했고 그건 당연히 은애였다. 먼 훗날 은호의 딸이 자신에게 a/s를 요청해 온다면 그제야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겠지만..
상다리 휘어져라 차려진 고급한정식당 내실은 수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흘렀다. 은애와 해령은 고행하듯이 이 지루하고 불편한 시간을 버텼다.
“어떤 a/s를 원하니. 뭘 요구하고 싶어?”
“글쎄요, 딱히. 흘러가버린 시간.. 누가 어떻게 뒤집겠어. 살던 대로 사는 거지.”
또 한동안 숨 막히는 고요가 두 여자 사이를 흘렀다.
“‘내 말 안 듣더니 쌤통이다..’ 고소하세요?”
“그닥.”
“갓난 선호 동영상 보냈을 때 받아줄걸.. 후회하세요?”
“약간.”
“여생에 제가 곁에 존재해 주길 기대하세요.”
“절대.”
해령은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내가 은호, 선호 입장에서 역질문 해볼게, [내 말 안 듣더니 쌤통이다.. 고소하니?]”
“그닥..”
“아이들이 반항을 할 때 [용서해 줄걸.. 후회해?]”
“약간.”
“[여생에 두 아이가 존재해 주길 기대해?]”
“... ”
은애와 해령은 재회 이후 유일하게 의미 있는 시선을 나누었다.
“서울에 갈 거지? 데려다 주마. 그건 할 수 있어.”
“5시간을 불편하게 가자고요? 밥 먹는 이 40분도 고행인데?”
“그 정도는 감내하렴. 이제 언제 또 보겠어. 난.. 언제 가도 호상인 노인네 아니니.”
“아무리 우리가 냉랭한 모녀래도 그런 농담은 좀...”
“앞으로 어쩔 거야?”
“글쎄.. 아무 생각도 안 나네요.”
“또 허튼짓할 거니.”
“허튼짓? 아, 이거... ”
해령은 붕대 감은 손목을 들어 보였다.
“다른 방법이라면 모를까..”
“남겨진 사람이 문상 가는 걸로.”
“a/s 해주신다더니.. 끔찍한 말씀을 드라이하게도 하시네요.
내가 못된 건 고은애 여사 때문이야.”
“네가 떠나던 날 난 다른 사람이 돼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거든.
변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불행히도 변하지 못했다.
아마 눈감는 날까지 좋은 에미는 못되겠지.”
은애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건조함에 해령은 왠지 울컥해졌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원망은 안 했어요.
미웠지만 원망은 안 했고 야속했지만 원망은 안 했다고.
지금도 짜증 나지만 원망은 안 합니다.”
“너도 아마.. 변하지 못할 거다. 반성도 안 하겠지. 나처럼..”
“아마도..”
“아이들도 그럴 거다. 너의 변화.. 솔직히 기대 안 할 거야. 자식들 상처받건 말건 손목까지 그어버린 못난 에미 징글징글하겠지. 그래도 어쩌겠니 너는 너만의 속사정이 있는 거고 아이들도 걔들만의 속사정이 있는 거겠지.”
“......”
“다만 시간이 흐르면 미움도 늙더라. 그러니 뭘 하려 말고, 니뜻대로 휘두르려 하지 마라. 한국에 있건 미국으로 가건 당분간 각자의 삶을 살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야. 물론 현명한 사람들은 묘책을 알겠지만 모성 부실한 내가 생각하는 a/s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서로에게 더 이상 상처가 아닐 때 만나는 거.
아, 물론 우린 심했다만.. 얼마간의 시간이 그 가족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누가 조언해 달랬나.”
해령은 냅킨을 던져둔 채 일어섰다.
"좋은 엄마가 아니라서 미안하구나."
문 앞의 해령이 엄마를 돌아본다.
"오버하시긴... 19살까진 좋은 엄마였어요."
해령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는 은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