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생신은 음력 11월 11일, 엄마 생신은 음력 8월 19일. K-장녀의 여러 역할 중 하나는 부모님 생신을 챙기는 것이다. 동생들에게 엄마 아빠 생신날을 몇 주 전에 알리고,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날을 잡는다. 그러고 나면 본격적으로 일을 꾸미는데, 바로 ‘부모님의 서프라이즈 생일 이벤트’이다. 인터넷에 ‘부모님 생신 이벤트’라고 검색하면 ‘용돈 박스, 돈 케이크’ 등 엄마 아빠의 웃는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기발한 상품들이 많다. 마음에 드는 몇 가지를 톡 방에 올리고 이번 이벤트는 무엇으로 할지 정한다.
아빠 생신날이 되었다. 가방에 담아온 파티용품을 동생에게 보여주었다. ‘KING’이라고 적힌 번쩍이는 왕관, 파란색 어깨띠, 화려한 왕의 지팡이를 보면서 동생과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용돈 뽑기 판을 꺼내어 어디에 거금을 숨길지 의논했다. ‘여기는 꽝, 여기는 만원, 여기는 오만 원, 삼십만원.’ 손자 손녀도 손을 보태어 뽑기 판을 완성했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활짝 웃으실지 기대하는 딸의 마음은 연인의 이벤트를 준비하는 그것에 지지 않을 듯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케이크 상을 차렸다. 이제 작전 개시다. ‘부모님 사랑해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벽에 붙였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아빠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드리고 어깨띠를 둘러드렸다. “이게 뭐냐?” 하시는 아빠의 말은 기분이 참 좋으시다는 뜻이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손자들이 케이크에 눈을 붙이고 입으로는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사이 나는 한 해를 건강하게 잘 살아내신 부모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부모님의 몸은 조금 더 작아지고, 얼굴엔 주름이 늘어나셨다. 일 년 사이에 아빠는 틀니를 끼셨고 엄마는 빠진 앞니 자리에 임플란트로 새 치아를 넣지 않으셨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감정이 스치듯 지나가고 따로 시선 둘 곳이 없어 촛불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타고 있는 촛불을 보니 열심히 살고 계신 우리 부모님이 떠올랐다.
“아빠, 여기 돈이 숨겨져 있어요. 꽝도 있고 만원, 오만 원, 십만 원, 삼십만 원도 있어요. 골라보세요.” 아빠는 이거 고를까 저거 고를까 하시더니 삼십만 원짜리를 딱 골라내셨다. 다들 눈이 동그래지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엄마 생신에는 한창 유행했던 요술공주 왕관, 미스 코리아 어깨띠, 분홍 장갑과 돈 부채를 준비했다. 웃으라고 준비했던 왕관이며 분홍 장갑을 오히려 찰떡같이 소화한 우리 엄마는, 감탄할 만큼 예쁘셨다. 돈 부채로 돈바람을 부치시며 활짝 웃는 우리 엄마의 사진을 백 장 찍었다.
우리 부모님 생일 파티는 친지를 초대해서 식당에서 성대하게 여는 잔치도 아니고, 해외 여행이 옵션인 것도 아니다. 케이크 하나에 왕관과 어깨띠, 그리고 용돈 선물만이 더해진 소박한 생일 파티지만 우리 가족에겐 이보다 행복할 수 없는 멋진 날이다.
아빠께 생신 선물로 드린 용돈은 겨우내 친정집을 따뜻하게 데워 줄 보일러 기름이 되고, 엄마께 드린 돈은 온 식구들 일 년 내내 먹을 김장김치가 된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생신 파티는 우리 가족의 웃는 모습을 가득 담은 앨범이 되어 ‘작년에 그랬지’ 하며 웃음을 몇 배로 불려줄 거다.
“다음엔 돈벼락 용돈 상자 어떨까?”
새로운 아이템을 장바구니에 담으며 앨범의 다음 페이지를 미리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