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 신입원장 고혜라
‘모든 이름은 가명이며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워킹맘이었던 어머니는 저녁 7시에 상담을 요청하셨고 예나동생까지 데리고 상담을 오셨다.
"아직 애들 아빠가 퇴근 전이라 작은애를 맡길 때가 없는데 둘 다 데려가도 될까요?"
예나는 2학년이라고 하기엔 키가 크고 성숙해 보이는 아이였다.
단발보다 조금 긴 머리카락을 옛날 여고생들처럼 양쪽 갈래로 대충 묶었고 마르고 팔다리가 길게 쭉 늘어진 모습은 흡사 윌리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같이 온 동생과 엄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직업병인지 모르지만 처음 상담 오는 아이들을 구석구석 관찰하는 것이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남동생은 유치원생이었고 두 남매는 들어오자마자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예나가 인사하자 동생은 따라 하는 듯 메아리처럼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상담하려고 앉기도 전에 공부방 여기저기를 신기한 듯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 집과 구조가 달라 아이들이 신기해하네요"
나는 괜찮다는 듯 애써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상담테이블로 안내했다.
상담은 거실에 커다란 식탁에서 했다.
두 아이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상담은 시작도 하기 전에 어수선해졌다.
어머니도 난감한지 아이들에게 연신 상담 중이니 가만있으라고 말했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동생과 같이 있으니 비슷한 또래처럼 행동하나 싶었는데 상담을 하면서 볼수록 2학년아이 같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 예나가 좀 남자아이 같아요 그래서 노는 것도 남자아이들 하고만 놀아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도 시선은 두 아이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래요?..."
닫혀있는 방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질문을 쏟아냈다.
"선생님 여기 뭐 있는지 보고 싶어요. 열어도 돼요?"
뭐라고? 거길 왜 궁금해하는 거니? 지금껏 공부방을 하면서 방안이 궁금하다고 한 학생은 처음이었다.
"아니 안돼... 방인데 뭐가 있겠어?"
대답하며 예나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요즘 젊은 엄마들 아이들이 예의 없게 행동해도 혼내지 않는 부모들이 많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그런 분일까? 내심 걱정하면서...
"가만있어! 거길 왜 보려고 해? 이상한 애네 진짜! 지금 엄마 공부방 상담받으러 온 거잖아? 얌전히 있어!"
다행이다...
돌아다니는 예나를 낚아채듯 잡아서 상담테이블 앞으로 데려왔다.
어머니는 예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약간의 짜증이 섞인 말투였지만 웃음기와 애교가 교묘하게 묻어나 있었다 나를 의식한 말투였을 것이다.
예나는 꼼짝없이 엄마에게 두 팔이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 광경을 동생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입속에 엄지손가락을 깊숙이 넣은 채 침을 흘리며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닥칠 위험을 감지한 듯 우둑커니 누나 옆에 서서 보고 있었다.
두 팔이 묶여 있는 동안 어머니는 예나에게 주의를 주고 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해맑게 웃으며 온몸을 흔들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얼굴은 엄마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몸은 90도 틀어 한 발을 크게 내딛이며 출발하려는 자세를 반복하며 두발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곧 말을 끝내고 길게 한숨을 내 쉬고는 나를 바라보며 붉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민망한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예나는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곧바로 이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까르르 웃었고 '열까? 말까?' 하는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눈치를 살피던 동생도 예나 뒤를 쫓아다니며 흉내를 내고 있었다.
"얘들아, 뛰면 안 돼. 지금은 저녁시간이잖아? 과자 줄 테니 앉아서 먹어 "
급기야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우리 집은 아래층에서 올라왔어요 시끄럽다고!"
예나는 자랑하듯이 신나게 말했다.
어머니는 당황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과자를 가져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해 놓은 텐트 안으로 두 아이를 밀어 넣었다.
"거기서 나오면 둘 다 집으로 보낼 거야!"
예나어머니가 이번에는 웃음기를 싹 빼고 아이들의 얼굴에 검지 손가락을 들이대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싫어~ 나 여기 계속 있을래~~~"
온몸을 비틀며 흔들어댔다.
그제야 아이들도 엄마가 한계가 왔다는 걸 알았는지 텐트 안으로 들어가 얌전해졌다.
아이들이 과자를 먹으며 조용해진 것이 확인되자 드디어 상담이 시작되었다.
“좀 산만하긴 한데요...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
지금은 아직 어려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곧 솔직한 이야기도 덧붙이셨다.
"사실 예전에 미술학원이랑 공부방을 보냈는데 두세 달 다니다 그만두었어요.
선생님들이 예나를 힘들어하시더라고요... 근데 2학년 되고 영어공부방을 보냈는데 몇 달째 잘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수학도 보내려고 알아봤어요”
"아... 예나가 영어는 잘 다녀요? 영어선생님하고는 상담해 보셨어요? 예나 수업태도는 어떻다고 하시나요?"
조금은 안심이 되었고 나는 곧바로 질문을 쏟아냈다.
놀 때는 산만하지만 공부할 때는 진지한 아이들이 간혹 있긴 있다.
상담 중에 상담테이블로 발을 올리고 오르려고 하다가 제재를 당하자 바닥에 주저앉아서 장난을 치면서 상담 내내 가만있지 못하던 초등1학년 남자아이를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
상담하면서도 등록을 고민했지만, 학부모소개로 온 경우라 쉽게 안된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받게 된 케이스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그 아이는 딴 아이가 돼버렸다.
한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서 공부를 했다.
그 일로 나의 좁은 경험에서 나온 선입견이라고 해야 할지, 아이를 잠깐 보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된다란 깨달음이 있었다.
"영어선생님은 별말씀 없으셨어요. 오히려 예나가 공부방에서 말을 안 한다고 하셨어요. 영어로 말해야 하니까 오히려 입을 다물어서 말 시키는 것이 좀 힘들다고 하셨고, 수업태도는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수학도 보내려고 한 거고요"
"아 그럼 공부할 때는 놀 때랑 다른가 보네요? 단원평가는 몇 점 정도 나오나요?"
나는 텐트 안에서 과자를 먹으며 조용히 앉아 동생과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예나를 힐끗 다시 보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자주 보지는 않는 것 같은데... 보면 80점 90점 정도는 나와요"
"그래요? 그럼 못하는 아이는 아니네요 혼자 공부했는데도 그 정도면 괜찮네요"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예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선. 생. 님"
필요이상으로 인사를 크게 하고는 곧바로 책상 쪽이 아니라 간식테이블 쪽으로 가는 예나를 보고 어제 느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과자 주세요! 과자 먹고 싶어요!"
공부보다 과자를 먼저 찾고 있었다.
우리 공부방은 아이들에게 등원하면서 먹을 수 있도록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래 예나야, 좋아하는 걸로 한 개만 고르자. 얼른 먹고 공부해야지"
눈 깜짝할 사이 다 먹고 나더니 한 개만 더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공부방 규칙으로 한 개만 먹기로 되어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얌전히 자기 양만 먹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조르는 거처럼 계속 칭얼거렸다.
"안돼. 더 먹고 싶으면 지금 선생님이 하라고 한 거 다 끝내면 줄게"
하지만 예나는 이미 공부할 생각이 없었다.
몇 문제 풀다가는 어렵다고 했다가, 다 아는 거라고 했다가, 하기 싫다고 하면서 계속 간식만 달라고 조르며
간식이 놓인 테이블과 자신의 책상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장난을 쳤다.
자신이 귀엽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기처럼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데 2학년이 하는 애교와는 다른 동생또래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내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동생과 엄마와 함께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될 게 뻔했다.
기 빨리는 첫 수업을 마치고 전화로 이 상황을 말씀드렸다.
"집에 있는 간식은 먹지도 않아요. 거기서는 왜 그럴까요? 어제 동생과 함께 상담을 갔더니 이웃집 놀러 간 줄 아나 보네요. 제가 오늘 다시 예나에게 설명 잘할게요. 공부하는 곳이라고..."
좀 나아지긴 했지만 60분 공부시간 중 10분 정도만 집중을 했다.
그런데 그 10분 동안 주어진 문제를 같은 또래애들보다 빨리 풀고 게다가 틀리는 것도 별로 없었다.
틀린 문제를 설명을 해주려 하면 이미 '아~ 이거였는데 내가 잘못 풀었네~'하며 고쳐버린다.
뭐지? 지금 하는 공부 수준이 시시해서 재미없나?
지금껏 공부방에 들어온 아이들 수준이 낮다 보니 원리나 기본정도의 문제를 풀고 있었다.
좀 더 높은 수준의 문제를 줘 볼까? 하고는 응용문제를 주니 보지도 않고 하기 싫다고 했다.
"간식하나 더 줄 테니 이 문제 풀어봐"
"진짜요? 빨리 풀고 간식 먹어야지~"
"맞았네? 사고력문제라 좀 어려울 텐데 어떻게 풀었어?"
"쉬운데? 그냥 풀었어요. 이렇게 조렇게요"
내가 준 동그란 모양의 감자맛 과자를 테두리부터 조금씩 갈갈 먹으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잘하는데 왜 안 하는 건데?"
"재미가 없어서요!"
어쩌면 학교교과 수업이 재미없기도 하고 난이도가 낮아서 예나에게는 지루하게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예나가 흥미를 가질만한 문제와 난이도의 교재를 찾는 일로 고민이 시작되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아이들이 예나를 포함 5명밖에 되지 않았기에 아이들이 없는 시간대로 옮겨 1:1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영민이 누나 때문에 상담받고 싶어요"
매달 마지막 주에는 학부모 상담주간으로 전화나 대면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영지가 다니던 공부방이 없어지게 되어 여기저기 상담받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고 한다.
곧 6학년이 되기 때문에 급하게 다닐 곳을 찾고 있었고
거기다 영지가 예민하고 소심해서 공부방 선택이 쉽지 않다고 하셨다.
"그럼 학생이 한 명 밖에 없으니 수업시간에 잠깐 영지 보내주시면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수업이 시작되어 예나가 간식을 먹으며 개념영상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영지가 혼자 안 간다고 저랑 같이 가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왔어요. 괜찮을까요?"
"아.. 네 그럼 수업 중이니 상담은 따로 전화를 드릴게요. 영지 테스트 보는 동안 여기 앉아 계세요"
영지는 6학년이 되는 여자아이였는데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거실을 들어서면서도 엄마팔을 붙들고 있었다.
내가 한쪽 책상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지만
어깨를 움치린 채 엄마 팔을 꼭 붙들고 놓지 않고 그대로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영지야, 선생님이 저 책상에 앉으라고 하잖아. 어서 가서 앉아서 테스트 봐. 엄마 여기 있을 거야"
영지엄마는 영지를 직접 끌고 내가 가리키는 책상에 앉히고는 상담테이블 쪽으로 가서 앉았다.
영지는 책상에 앉아서 엄마 쪽을 연신 바라보며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약간의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소심하기도 하고 예민하기도 한다고 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가만있을 예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들어올 때부터 일어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누구냐고? 연신 질문을 해대거나 간식을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예나를 얌전히 앉혀 놓는 것에 정신이 가 있었고 영지 어머님이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실까? 걱정이 앞서서 영지의 이상한 행동들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영지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이 관경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며칠 전 등록한 아이인데... 지금 적응 중이라 혼자 가르치고 있어요. 영지하고는 같은 시간대에 등원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선생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다행인지 영지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시며 예나의 돌발행동을 볼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입을 벌려 혀를 삐죽 내밀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게 분명했다.
다행히 영지는 테스트지를 금방 풀었고 간단한 질문형식의 테스트를 진행했다.
영지는 엄마옆으로 오자 엄마 팔을 두 손으로 다시 잡았고 집으로 갈 때까지 놓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수업과 테스트를 간신히 끝내고는 크게 숨을 마시고 내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갱년기와 고혈압으로 얼굴이 달아올랐고 겨울인데도 온 얼굴에 식은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선생님, 영지가 공부방에 다녀 보겠다고 하네요. 다음달부터 보낼게요"
예나와 공부한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공부 중, 아이는 책에 낙서를 하거나 한 페이지를 까맣게 칠해버리기도 했다.
의자 등받이에 두 다리를 올리고 엉덩이를 치켜세우고 얼굴은 책상에 박은채 엎드려 공부는 하지 않고 연신 웃어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똑바로 앉아. 위험해 어서 내려와"
"재밌는데..?"
직접 가서 바르게 앉히기를 몇 번을 하고 나서야 집에 가기 위해 공부를 선심 쓰듯 후딱 해 치운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더 창의적인 자세로 공부를 했다.
바닥에 책을 깔고 의자에 거꾸로 엎드린 채로 글씨를 쓰려고 하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런 자세를 연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나야, 왜 그렇게 공부해? 힘들지 않아? 바르게 앉자!"
"히히히 싫어요 저는 이렇게 해야 공부가 더 잘 돼요"
"그래? 그럼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돼?"
"왜요?"
"엄마한테 보내려고 예나가 공부하는 모습이 궁금하실 것 같아서... 찍는다!"
후딱 고쳐 앉는다 혼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데 어떻게 전달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ADHD가 분명하지만, 상담할 때마다 영어선생님이 예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별말씀 없으셨다는 답변뿐이었다.
"학교 담임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나요?"
"왜 그러시는데요? 학교 선생님도 다른 아이들과 별다를 게 없다고 하셨어요. 예나처럼 집중 잘 못하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많이 있다고도 하셨고요. 우리 예나를 가는 곳마다 다들 이뻐해 주시는데 선생님은 꼭 뭔가 문제가 있는 듯 말씀하시네요"
약간 화가 나신 모양이다. 목소리에 친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 다닐게요라는 말을 삼키며 애써 침착하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걸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설날 명절을 맞이해 공부방아이들 집마다 샤인머스킷을 보내드렸다.
공부방을 시작하고 두 번째 맞는 명절이다.
처음 받으신 학부모님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당혹함에 감사하다는 문자조차도 못 보내시는 분도 계셨고 감사하는 말씀과 과일과 선물을 보내시는 분들도 있었다.
"깜짝 놀랐어요. 샤인머스킷을 이렇게 큰 박스로 보내셨어요"
"예나가 좋아하나요? 지난번 추석 때도 보내드렸더니 아이들이 잘 먹는다고 좋아해 주셔서 이번에도 보내드렸어요"
마침 대면상담이 예약되어 있던 터라 예나어머님이 딸기 한다라를 사들고 방문해 주셨다.
며칠 전 약간의 기분 상한 일은 잊은 듯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하시며 나에게 딸기를 건네셨다.
"지난번 일은 제가 좀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 말씀드렸는데 어머니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처음에는 조금 기분이 상했던 거 사실이었지만, 제가 예나를 걱정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서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했어요"
샤인머스킷 덕분이었을까? 딸기 덕분이었을까?
우리는 세 번째 대면 상담만에 솔직한 진짜 상담을 할 수 있었다.
두 시간 넘게 온갖 얘기들이 오고 갔다 가끔은 수다로 샛길로 세기도 했지만 예나를 위해 꽤나 진지한 토론을 벌였던 것 같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도 그쪽으로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제가 혹여 잘못 판단 한 건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상황에서 ADHD증상이 나타나는 것인지, 일부로 말썽을 피우는 건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예나를 무조건 혼내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전문가의 판단을 받아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그다음은 결과를 보고 다시 말씀 나누시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씀이시죠?"
그리고 며칠 후 검사예약을 하고 예나는 검사를 받았다.
예상대로 ADHD였다 예나어머니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에 당혹해하며 내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약을 먹으라고는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선택이라고... 알아보니, 약을 먹지 않고 센터에서 훈련을 받으면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우선 약보다 센터를 다녀볼까 생각 중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아니요 약을 먹는 것이 좋지만 그 선택을 우리 보고 하라고 하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 먹는 걸 부모 보고 선택하라니요?"
"병원에 가보니 예나보다 심한 아이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이 별거 아닌 것처럼 말씀하셔서, 저도 약 먹이는 것은 조금 고민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약은 받아왔어요 혹시 모르니까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니 이해는 안 되지만 우선 그럼 예나 상태를 정확히 알게 되었으니 어머님이나 저나 무조건 예나를 혼내면 안 될 것 같아요. 스스로 자제가 안 되는 것이니까요. 센터에 다니면서 좋아지는지 한번 지켜보고 다시 말씀 나누시죠."
일주일에 한두 번 센터에서 훈련받는다고 생물학적으로 자제가 안 되는 상태가 훈련이 될 수 있을까?
좋아지기는커녕 3학년이 되니 성조숙증도 의심되어 병원 검사를 받는다고 했다.
아이가 자제가 안되는데 사춘기까지 온다면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다행히 예나는 학습능력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좋다고 하네요. 근데 정신연령이 2~3살 어리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IQ와 EQ의 불균형이었다.
날마다 심해지는데도 어머님은 여전히 약물치료를 주저하셨다.
“센터에서 훈련을 받으면 나아질 거예요.
아직 어린데 약을 먹이는 건 좀...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단지 센터를 다닌다고 해서 좋아지는 아이는 드물었다.
훈련은 보조 수단일 수 있지만, 약물 치료는 ADHD의 핵심 증상인 충동성과 산만함을 조절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나는 어머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사춘기가 오기 전에, 예나가 스스로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멀쩡한 아이들도 사춘기에는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해요. 예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학습능력도 좋은데 집중력이 떨어지면 고학년으로 갈수록 더 힘들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끼리도 예나의 다름을 눈치채고 같이 어울리기를 꺼려 할 수 도 있고요. 늦어질수록 아이는 크고 먹는 약개수도 늘어날 거예요. 지금 증상이 심하지 않다고 한다면 적은 약으로 스스로 자제하는 힘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긴 대화 끝에, 어머님은 결국 센터훈련과 병행해 약물치료도 시작하기로 결심하셨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몇 주가 지났지만, 예나의 상태는 오히려 나빠졌다.
의자에는 앉아 있었지만, 갑자기 노래를 부르거나, 예전보다 더 집중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아이가 ‘버릇이 없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아이 탓이 아니라는 걸, 나부터 잊지 말아야 했다.
‘약이 효과가 없는 걸까?’ 나는 다시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때 어머님은 울먹이듯 말씀하셨다.
“선생님... 제가 이번 주 너무 바빠서 약 챙겨 먹이기를 아빠에게 부탁했거든요.
근데 일주일 내내... 한 번도 안 먹였대요. 저만 아등바등하는 것 같아요. 아직 어린데 약까지 먹여야 하냐고...
저만 심각하고 저만 애쓰는 것 같아요... 선생님, 애 아빠랑도 상담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예나 아버님과도 상담을 하게 되었다.
나는 예나가 공부 중에 보였던 엉뚱하고 기이한 행동들을 사진으로 정리해 보여드렸다.
상황을 이해 한 예나 아버님은 협조를 약속하셨다.
“선생님, 이 정도로 심각한지는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저도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예나의 상태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엉뚱한 질문만을 쏟아내던 예나가 이제는 '선생님, 이거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푸는 거예요?' 하며 학습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내 설명을 1분도 집중하지 못하던 아이가 나와 책을 보며 설명에 집중하게 되었다.
예나는 '신기한 스쿨버스' 속 캐릭터 중에서 카를로스와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다.
예나도 즉흥적이고 산만해 보이지만, 그 안에 재치와 창의력이 숨어 있고, 맞는 방식으로 이끌면 몰입과 성취로 이어지는 아이다.
특유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선생님, 과자 하나 더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어요?"
이제는 과자를 달라고 조르지 않고 과자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 예나이다.
"더 먹고 싶어? 그럼 우리 영민이가 나눗셈을 어려워 하는데 설명 해 줄 수 있을까?"
"그럼, 설명 다하고 과자 하나 더 먹어요?"
"그래~예나가 먹고 싶은 걸로 먹어 그대신 영민에게 친절하게 제대로 설명해야 해. 영민이가 이해하지 못했다면 과자를 먹을 수 없어 할 수 있어?"
"네!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