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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십팔! 저 언제 끝나요?

공부방 신입원장 고혜라

by 고해라


‘모든 이름은 가명이며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네 번째 씨앗은 시우, 사립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다. 블로그를 보고 상담이 들어왔다.

내가 운영하는 공부방과는 근처 학교도 아니었고, 공부방에서도 두 블록이나 떨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블로그 글을 보고 전화를 주셨다.

시우는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등록했다 예의 바르고 얌전해 보이는 남자아이였고, 글씨도 또박또박 잘 썼다.

사립초등학교를 다닌다면 엄마가 아이에게 꽤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일 텐데... 뭐가 문제일까?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시 나는 세명의 아이들과 수업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자연히 블로그에도 ADHD와 경계선 지능에 대한 글을 올리게 되었고, 조회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 글 하나만 유독 높았다. 시우 상담은 바로 그 글을 보고 들어온 케이스였다.

수업을 한 달 정도 진행하는 동안 큰 문제는 없었다 단 하나, 숙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그건 공부방에서 같이 하면 되는 일이라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숙제까지 공부방에서 하다 보니 60분 수업이 70분, 80분... 점점 늦게 끝나게 될 수밖에 없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시우는 갑자기 책을 책상 위로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십팔! 저 언제 끝나요?”


....................





며칠 전에도 시우와 단둘이 수업하던 날이었다 그날, 시우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저... 약 먹어요.”


“약? 무슨 약? 어디 아프니?”


“분노조절약이요. 분노 조절이 잘 안 돼서 약을 먹어야 한대요~”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시우를 보며 순간 '어쭈, 날 상대로 협박하는 건가? 수업 빨리 끝내라는 거지?' 약이 오르는 걸 참고 말했다.


“그래? 난 혈압약 먹어.”


“그게... 뭔데요?”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면 혈압 조절이 안 돼. 그래서 먹는 약이야. 안 먹으면 죽을 수도 있어. 넌 그 약 안 먹으면 죽니?”


“... 그건... 아니에요”


당황한 듯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아까와는 다른 얌전한 말투였다.


“그래? 그럼 별거 아니네. 공부하자.”


그 일이 있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오늘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십팔! 저 언제 끝나요?"


책상 위에 책을 던지며 시우가 말했다.


공부하던 아이들은 일제히 나와 시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고, 너무 놀란 서하는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으며, 영민이는 입을 두손으로 틀어막고 킥킥 웃고 있었다.

순간 혈압이 머리끝까지 치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의 반응을 살피는 시우의 태도에서 내가 화를 내고 큰소리로 쫒아내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책가방을 싸고 보란듯이 나가며 사악한 미소를 띌 시우얼굴이 번개처럼 눈앞에서 보였다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지금 내가 하는 노력을 눈치채면 안된다.

시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도록 놔둘 수 없다.

나는 이래뵈도 불혹을 넘고 지천명 이른 선생님이 아닌가? 시우를 바라보며 살짝(아마 조크와 같은 미소였을 것이다. 눈은 무섭게 뜨고 입만 웃는) 미소를 띠며 최대한 차분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사실 시우는 엄마와 부딪칠 때마다 엄마가 팔짝 뛰는 포인트를 기가 막히게 알고 건드려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끌고 가곤 했다.

엄마가 큰소리로 잔소리를 하면 아기 고양이처럼 큰 눈을 하고 잠자코 듣고만 있으면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다음은 자신이 하루종일 하고 싶은데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시우였다.

하지만 그건 엄마한테나 먹히는 것이다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니까!


“욕한 거야? 십팔? 근데... 발음이 틀린 것 같은데... 뭔가 어설퍼. 분명 욕인데 그... 뭐랄까? 느낌이 안 사네.

선생님 따라 다시 해 볼래? ‘십’ 아니고 ‘씨’라고 해야지. 그리고 ‘팔’이 아니고 ‘발’.

강세는 발에 두지 말고 씨에 두고, 다시 말해봐! 그럼 훨씬 욕 같을 거야. 아닌가? 발을 더 세게 발음 해야 하나? 아뭏튼 다시 말해봐 씨~발!”


우는 ‘이 반응 뭐지?’ 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욕은 기세야. 어서 해봐?"


하지만, 시우는 입도 뻥끗 못하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시우가 진짜 욕을 할까? 궁금해 하며 일제히 시우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시우쪽에서 다시 나에게로 옮겨왔다.


"발음도 어설프고, 욕도 잘 못 하면서 왜 욕을 흉내 내? 욕 제대로 못 할 거면 아예 하지 마.

오히려 웃음거리나 되는 거야. 욕은 입에 걸레를 물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어쩌면 걸레보다도 더 더러운 것일 수도 있어.”


"선생님, 양말은요? 양말보다 더 더러운 거예요?"


꼭 이런아이들 한명 쯤 있다 지금 상황이 혼나는 상황인지, 수다 떠는 시간인지 구별을 못하고 낄낄빠빠가 안돼는 아이. 영민이었다.


"양말? 신고 다녀서 더러운 양말이어야 겠지? 그만큼 욕하는 사람이 더러워지는 게 욕이야. 욕이 하고 싶으면 입에 걸레를 물고 해 볼래?"


"아휴~더러워요"


아이들은 킥킥대며 신나서 조잘거렸다.

늘 그렇듯 나만 아니면 되고, 남이 혼날 때가 제일 재밌는 초등학생들이다.


"그래 욕은 걸레보다 더러운 거야 다들 알았으니까 욕은 하지 말자!"


"네~전 진짜 욕 안 할 거예요 더러워요"


"으.. 나도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아이들과 공부를 시작했다.

가만히 이 상황 지켜보고 있던 유안이가 멋쩍게 서 있는 시우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근데요.. 선생님... 선생님이 욕 가르쳐주면 안 되지 않나요?”


요놈 보게. 질문 한번 신박한데? 순간 쫄았네. 유안이는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것이다 시우의 편을 들려고 한게 아니다.


“그럼~ 안 되지. 하지만 욕을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없어. 욕을 하면 욕한 사람이 더러워지니까 안 하는 거야.

욕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서워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야. 선생님이 욕을 가르친 게 아니라, 지금 시우가 한 욕이 어떤 건지 가르쳐 준거야"






분노장애나 ADHD 등이란 말을 들어본 적 없었기에 그 당시에는 조금 아이가 이상하면 사춘기라는 말로 퉁치거나 집안교육을 잘 못 받은 예의 없는 아이정도로 여겼었다.

내가 사는 복도식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10가구가 양쪽으로 나누어져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6호였던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 돌면 바로였기에 우리쪽 복도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집을 거쳐야 집으로 갈 수 있는 구조였다.

작은 방에서 공부방을 하다 보니 창문으로 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복도 맨 끝집 10호에는 노부부가 살고 계셨는데 항상 지나다니면서 유심히 창문쪽을 보시며 지나가셨다.

수업 중 우연히 눈을 마주칠 때면 고개를 살짝 숙이거나 작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매번 인사만 하고 지나쳤는데 그날은 수업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이 없는 것을 보시고는 지나가시는 걸 멈추고 자세히 공부방을 살피셨다.


"저... 새댁.. 아니지 선생님, 우리 손자가 4학년인데 공부를 싫어해요. 우리 민수도 여기 보내도 될까요?'


"호호~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두 분만 사시는 줄 알았는데 손자랑 같이 살고 계셨어요?"


"아... 한 달 전부터 우리랑 같이 살게 됐는데 우리가 뭘 알아야지. 공부는 시켜야 하는데 어디로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나다니다 보니 여기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 같다고 할아버지가 물어보라고 하더라고"


"아~그래서 할아버님이 지나가실 때마다 공부방을 유심히 보셨군요? 전 시끄러워서 그러시는 줄 알고 많이 긴장했어요. 거기 서서 말씀하시지 말고 들어오세요"


"아니에요. 내가 들어가면 뭘 아나? 우리 민수 학교 끝나고 오면 데리고 와 볼게요"


손을 내저으시면서 빠르게 집을 향해 걸어가셨다.






민수는 심술궂게 생기신 할아버지의 미니어처 같았다.

입술이 두툼하고 몽땅한 바디가 영락없이 할아버지 판박이였다.


"민수야, 할머니가 너 공부시키려고 데려온 거야 이제부터 선생님이랑 여기서 공부해.

선생님한테 인사하고"


할머니는 민수의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인사를 시켰다

민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꾹 다물고 할머니가 누르는 데로 머리를 숙였다.


"안녕? 민수야 반가워! 오늘부터 선생님이랑 공부 열심히 해 보자."


그렇게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은 공부를 생각보다 열심히 하는 듯했다.

공부를 싫어한다고 하셨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해야 하니까 했던 것 같다. 민수도 그 정도겠거니 짐작했다. 아이들을 가르쳐 본 적이 없으니 어느 정도로 싫어하는지 솔직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민수를 맡겨 놓고는 예전보다 더 자주 복도를 왔다 갔다 하셨다.

어찌 보면 감시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오해였을까? 민수가 수업하는 한 시간 동안에는 두 분이 번갈아가며 복도를 오고 가셨다. 혹시 민수가 아닌 다른 아이들을 혼내다가도 나도 모르게 창문 쪽을 살피는 일이 많아졌다.


"민수야, 똑바로 앉아야지 선생님 설명 다시 듣고 풀어와"


민수에게 말을 할 때면 특히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수는 그런 사정을 알리 없었다.

민수가 하루가 다르게 태도가 안 좋아지고 나의 말에 말대꾸를 하거나 싫다고 말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을 때쯤이었다.


"민수야, 오늘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하고 언성이 나도 모르게 창문 밖으로 새어나갈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싫어요 하기 싫단 말이에요! 어렵다고!"


"어머? 얘 좀 보게. 선생님한테 반말로 말했어 지금? 몇 번을 설명했잖아 다시 해보자 오늘 다 못하면 안 끝내 줄 거야"


나도 씩씩 거리며 아이를 혼내는 건지, 싸우는 건지 모를 말씨름이 오고 가고 있었다.

그 때는 나도 어렸던 것 같다 학원을 하면서 강사들이 아이들을 혼내지 않고 같이 싸우는 모습을 볼때면 옛날생각이 불쑥 튀어나와 어느새 얼굴이 붉어지곤 했었다.

"선생님, 아이들과 싸우지 마시고 혼내셔야지. 아이들하고 똑같이하면 선생님을 무시해서 더 그러는 거예요." 라고 조언했지만...부럽기도 했다.

원장을 오래하다보니 아이들의 무시(?)는 조금 달라졌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죄송합니다 원장선생님"하거나 "선생님 연세도 있으신데 너 그러면 안돼 빨리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오히려 옆에서 훈수두는 학생이 더 얄미울 지경이다. 이렇듯 싸움조차도 할 수없는 나이가 됐다.


"왜? 선생님이 뭔데 안 끝내 줘? 씨발!"


급기야 욕을 하면서 대들었다.

한두 번 해본 욕이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찰진 발음... 순간 나는 놀랐지만,

고작 4학년 짜리 남자아이한테 밀릴 내가 아니었다.

난 그때 팔팔하다 못해 쌩쌩한 스물여덟 살이었다.


"어디서 욕을 해? 혼나야겠네!"


얼굴이 붉어지고 숨을 거칠게 내쉬며 씩씩 거리던 민수는 급기야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 나에게 던지려고 했다. 그 의자는 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의자보다 약간 가볍긴 했지만 나무로 의자 바닥과 등받이가 되어있고 쇠로 된 의자였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악!" 하며 소리를 질렀고 민수 수업시간마다 번갈아 왔다 갔다 하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순간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보고도 모른 체 하시는 것이거나,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계시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에도 열두 번씩 왔다 갔다 하셨던 복도를 이 사달이 난 지금에는 한 번도 오고 가지 않고 계셨으니 말이다.

결국 나도 민수를 이겨먹겠다고 끝까지 수업을 시키고 말았다.

수업이 다 끝난 후에는 녹초가 되었고, 그 다음날 수업에는 민수는 아주 딴 아이가 되어 나타났다.

언제 그랬나는 듯이 수줍어하면서 대답도 잘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그 상황에 상담을 하거나 아이를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하던 생초보였기에 그렇게 참고 또 민수를 가르쳤다.

이런 일이 몇 달간 가르치면서 드문드문 일어나다 보니 나도 익숙해졌는지 노하우가 생겼는지 민수를 어떻게든 휘어잡고 수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점점 강도는 세졌고 횟수도 많아지던 어느 날 민수가 공부방에 오지 않았다.





민수할머니 할아버지도 연락이 없으셨고 며칠 동안 복도를 지나가는 것을 뵐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지?' 집 앞에 가서 초인종도 눌러보고 했지만 인기척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 소식도 연락도 없이 민수도 공부방에 안 오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저녁 현관문을 누군가 두들기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분은 한분뿐이다.

민수 할머니였다.


"아이고 선생님 연락도 못 드리고 미안해요"


"민수할머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민수도 공부방에 안 오고 두 분 다 안보이셔서 엄청 걱정했어요"


나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어서 상기된 목소리로 들어오시라고 말씀드렸다. 민수 할머니는 잠시 고민이시더니 현관까지는 들어오셨다.

하지만 극구 거실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사양하셨다.

할아버지가 혼자 계셔서 빨리 가봐야 한다고 하시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는 우물쭈물 말씀하시는 것을 망설이셨다. 나는 그 잠깐동안 온갖 생각이 오고 갔고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날까봐 조심스럽게 침을 목뒤로 넘기며 할머니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언가 결심을 하신 듯 고개를 들고 크게 한숨을 내쉬셨다. 내얼굴을 잠시 보시고는 천천히 입을 여셨다.


"... 그게... 어디 낯부끄럽고 창피해서 말도 못 하겠는데... 선생님이니까... 민수 가르치던 선생님이니까... 믿고 말할게요..."


나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시나 궁금했지만 민수 할머니가 말씀하실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민수가 어려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민수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하면서 우리 집에 맡겼는데..."


"저도 그건 이미 알고 있는 거잖아요? 무슨 다른 일이 있으셨어요?"


기다리지 못하고 촐싹 되고 민수 할머니의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차 하면서 입을 바로 닫았지만 나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박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 선생님도 알다시피 요즘 누가 이혼을 하나요? 연예인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아들이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나도 그런데 어린 민수는 얼마나 상처가 있겠냐고 안 그래요? 선생님?"


"그렇죠..."


"민수 마음에...(주먹으로 가슴을 치시며) 어린 마음에 화가 쌓였나 봐요 그래서 선생님에게도 민수가 대들고 욕하고 하는 거 우리 둘이 보고는 너무 놀라고 창피해서 집에 들어가 모른 척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하며 민수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렸다.


"근데 민수가 화를 주체 못 하고 할아버지나 나한테도 자주 덤볐어요. 하루는 할아버지가 참다참다가...

불쌍하다고 내가 혼내지 말라고도 했고... 할아버지가 몇마디 하면서 혼냈지. 때릴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 시늉만 했을 뿐인데...민수가 소리를 지르며 할아버지를 때려서...그만..."


"어머!"


민수 할머니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나와 버렸고

두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 일로 할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됐고 어제 퇴원해서 왔어요"


놀란 가슴을 쓸어 담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몸이 떨리고 후들거려서 목소리가 지멋대로 요동치고 있었다.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근데... 마음이... 손자한테 맞고 나서 할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아들이 민수를 데리고 갔어요"


전후사정을 다 들었지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저녁에 잠깐 왔다가신 후로 민수 할머니를 복도에서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도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가끔 복도 끝집을 보면 굳게 닫힌 현관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은 감정을 설명할 말이 없어서 말 대신, 폭발을 선택한다.

나는 생각했다. 폭발하지 않아도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걸 아이들에게 가르쳐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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