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 신입원장 고혜라
우리 집을 학원처럼 보이게 꾸밀 수 있을까?
집을 얻고 공부방을 꾸미기 시작하면서 그 질문이 머릿속을 오래 떠나지 않았다.
30대와 40대에도 공부방을 했었지만, 그 시절엔 가족과의 경계가 늘 고민이었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남편은 재택근무가 잦았고, 거실은 수업 공간으로 쓰자니 부엌이 훤히 보였다.
방 한 칸을 쓰자니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고 출퇴근이 없다는 장점이 오히려 집도 일터도 아닌 애매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인이 된 아들은 독립해서 직장에 다니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퇴근 없는 일터, 생활과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간. 지금이야말로, 집에서 공부방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방 대신 거실에서 공부방을 하기로 했다.
두 개의 방이 남아 있었지만, 거실은 탁 트였고 채광이 좋았다.
거실 한편에 책상을 들이고, 의자를 놓고, 하나씩 공부방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자
' 진짜 시작하는구나' 실감이 났다.
프린트, 스템플러, 빨간펜, 연필깎이까지.
하나하나 고르는 데도 심사숙고하게 되고, 작고 사소한 물건들이었지만, 그걸 고르는 순간순간마다 마음은 묘하게 떨리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일을 20년 넘게 해 왔고 관둘 때는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이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을 하며 살 거라고 결심도 했었다.
그런데 돌아 돌아, 또 이 길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아 교재를 펼치고, 빙 둘러 배치된 책상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하는구나.”
무엇보다 상담을 위해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마다
“공부방이라 좁을 줄 알았는데 넓네요 꼭 학원 같아요”라는 말씀을 자주 한다.
그 한마디가, 거실을 교실로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부엌을 정리하고 거실을 교실로 바꾼 건, 단순히 보기 좋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예전에 어떤 어머님이 상담 중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한 번은 공부방 상담을 갔다가 그냥 나왔어요. 살림과 공부방이 너무 뒤섞여 있어서요.”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공간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 공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는 아이를 가르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활의 흔적을 정리하고, 아이와 부모님 모두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교실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가스레인지는 덮개로 덮고, 그릇은 수납장 속으로 모두 정리했다.
건강식을 기본으로 하다 보니 부엌 사용도 간소했고, 예전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했던 덕분에 불필요한 물건은 애초에 많지 않았다.
부엌은 마치 탕비실처럼 깔끔한 공간으로 바뀌었고, 거실은 자연스럽게 교실이 되었다.
우리 집, 공부방이 될 수 있을까?
2년이라는 시간, 아니 사실은 코로나 이후 바뀐 모든 환경이 낯설게 느껴진다.
겨우 2년인데, 마치 10년쯤 흘러버린 사람처럼 세상과 어긋난 기분이었고 내가 잘하던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으면 어쩌나...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럴 때면 20여 년 전, 스물여덟의 내가 떠오르곤 한다.
방 한 칸에서 공부방을 시작했던 그때, 나이는 오십인데 마음은 그때로 돌아가 있는 듯했다.
길은 아는데 분명 알고 있는 길인데... 처음 가는 것 같은 기분.
지금의 내가 꼭 그때의 나와 닮아 있다.
그 모든 감정을 안고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시작했다.
지금 나는 마치 이 일이 정말 처음인 것 같다.
다시, 공부방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10층 언니는 식탁과 밥상을 그대로 활용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집에서 입던 옷차림 그대로 수업하고, 그 상태로 외출도 했다.
솔직히 처음엔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집에서 하는 일이니 딱히 갖출 필요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공부방 인테리어도 특별한 게 없었다.
거실 한편 식탁에 교재만 올려두고, 아이들을 불러 공부를 시키는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비록 방 한 칸에서 시작했지만, 제대로 갖추고 싶었다.
학원용 책상과 의자를 사서 정돈했고, 옷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집에서 하는 수업이라 해도, 마음가짐만은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었나 보다
학생 한 명 없는 상태에서도 나는 수업하는 시간만큼은 책상에 앉아, 마치 누가 보고 있는 듯 교재를 펼쳤다.
영상 강의를 틀고, 내가 직접 교재를 풀어보며 설명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언제 학생이 올지 몰라, 늘 준비된 상태를 유지했다.
초보였던 나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나하나 처음 해보는 일에, 준비만큼이나 시행착오도 많았다.
아이들이 한두 명씩 늘어날 때마다 책상 배치를 바꾸고, 공간을 새로 정리했다.
그렇게 공부방을 조금씩 꾸며가고 바꿔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공부방과 10층 언니의 공부방을 끊임없이 비교했다.
유빈 언니는 오히려 꾸미지 않는 것을 자부심처럼 느끼는 듯했다
본인의 커리어만으로 아이들을 모집하는데 충분하다고 느꼈고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나는 반대로, 어떻게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남몰래 혼자 공부방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유빈 언니네 공부방을 찾았던 날도 있었다.
수업 시작 전에 10분, 20분 정도 들러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충분히 느껴졌다.
식탁과 좌식상 앞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그 자체로는 정겹고 따뜻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설거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거실 바닥엔 아이 장난감과 교재가 뒤섞여 있었다.
유빈 언니는 회색의 면으로 된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집게핀으로 대충 묶은 채였다.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었고, 앞가슴엔 국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으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딸아이가 아플 땐 보육도 맡기지 않고 직접 안은 채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언니는 항상 당당했다.
“지금 공부방에 인원이 다 찼어요. 대기해 주세요.”
학부모들은 기다려서라도 등록하려고 난리였다.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히려 ‘네가 잘되는지 보자’는 시선들에 둘러싸여, 혼자 고군분투하는 1년을 보냈다.
그러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명을 왔다 갔다 유지하던 인원으로 1년을 채운 어느 날, 갑자기 등록 문의가 하루 3~5건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물어보기만 하고 말 줄 알았는데, 하루하루 등록이 이어졌고, 13개월 만에 등록 인원은 30명을 넘어섰다.
심지어 유빈 언니네 공부방에서 옮겨오는 아이들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비로소 분위기는 역전됐다.
처음에는 소개만 해주고 자기 자녀는 보내지 않던 권사님도 찾아왔다.
“자매님, 우리 애가 공부가 어렵다는데 자리 있어요?”
유빈 언니네가 아닌, 나에게 보낸 것이다.
몇 달 후, 소문이 돌았다.
유빈 언니가 공부방을 접고 이사 간다고 했다.
초등학생이 아닌,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나도 얼마 후, 학원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