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 신입원장 고혜라
‘모든 이름은 가명이며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두 번째 씨앗은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 공부가 너무 싫은 영민이다.
어머님은 일부러 새로 생긴 공부방을 찾아오셨다고 했다.
갓 문을 연 공부방은 아이가 적으니, 선생님이 우리 아이에게 더 마음을 써줄 거라 기대하셨던 모양이다.
영민이가 공부방에 오게 된 계기는 전단지였다.
내가 매일 돌리던 전단지를 친구 엄마가 받아보고 "여기 공부방 새로 생겼네. 여기로 한번 보내봐" 하며 전해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그날 바로 상담이 잡혔고, 영민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공부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는 상담이 시작되자 입을 굳게 다문 채, 엄마 팔을 꼭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온몸으로 “싫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공부할래?”
"...."
“엄마 여기 등록할 거야.”
“...”
엄마 팔을 온몸으로 잡고 흔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영민이 쪽을 보며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2학년 되면 공부 시작하기로 약속했잖아.”
“아~앙 싫~엉~~~”
머리를 엄마팔에 비비며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바람에 쓰고 왔던 모자가 벗겨졌다.
눈이 크고 남자답게 생긴 영민이는 보기와는 다르게 엄마껌딱지 같았다.
어머님은 이미 마음을 정하신 듯 등록원서를 작성하고, 결제를 하려 했고, 영민이는 엄마의 손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상담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30분간 이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그 광경을 보는 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어찌할 봐를 몰라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등록해도 가르치기 힘들 것 같은데... 벌써 지치네... 어쩌지?'
"어머님... 영민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요. 다시 영민이랑 상의해 보시고 결정되면 다시 오세요"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대답은 단호하셨다.
"아니요, 꼭 등록해야지요 이젠 공부시켜야 해요"
영민이의 계속되는 애달픈 거부에도 어머니는 꼼짝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대부분 이렇게 억지로 보내봤자 몇 달 만에 영민이의 뜻대로 될 거라는 걸 나는 알았기에 이미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어머님은 책상에 놓여있는 태블릿을 보시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다.
“얘가요, 핸드폰만 봐요.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해요. 핸드폰을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혹시... 여기 공부방에서 태블릿으로 수업하나요?”
이 푸념은 두 가지 경우이다. 공부방에서 책으로만 수업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이거나, 아이가 좋아하는 태블릿으로 공부에 흥미를 주기 위한 것이거나 순간 두 가지 중에 어떤 의도였는지 파악해야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한쪽 눈을 찡끗하셨다. 후자였다. 5살 아이가 밥 먹기 싫다고 떼를 쓰면 숟가락을 비행기처럼 이용해 아이입에 음식을 넣는 것과 같은 일을 영민이에게 쓰고 계셨다.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휴대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큰 문제였던 영민이. 이 두 가지 문제를 하나로 엮어서 접근해 보기로 했다.
“그럼요~ 저희는 탭으로도 공부해요.(영민이를 바라보며)
너무 재밌어. 직접 한 번 해볼래?”
나도 영민엄마와 동조를 하면서도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가 태블릿으로 공부한다고 흥미를 느낄까? 결국 공부는 공부인 것을, 책으로 하든 태블릿으로 하든...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영민이는 달랐다. 그 말을 듣자마자, 호기심으로 영민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상담 내내 엄마 팔을 붙잡고 놓지 않던 손이 살짝 풀렸고, 태블릿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목을 쭉 빼고 화면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뭐야? 이게 먹히네?' 영민이의 그다음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한번 해 봐도 돼?”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엄마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나를 곁눈질로 살짝살짝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나는 일어나서 태블릿을 영민이가 잘 보이는 쪽으로 옮겨 전원을 켜고 있었다.
“그래 한 번만 해봐.”
영민이에게 붙잡혀 있던 팔을 살며시 빼며 태블릿 앞으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태블릿이 켜지면서 요란한 음악이 나왔고, 캐릭터들의 소개가 나오자 태블릿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나... 진짜 하나만 할 거야"
슬며시 엄마옆에서 나와 책상에 앉으면서 말했지만, 이미 영민이의 시선은 태블릿화면에 푹 빠져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고 어머니는 눈을 찡끗하며 됐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리고 그날, 탭 학습으로 30분을 넘게 집중하며 "하나만 더 할래요. 재밌어요"를 반복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어머님은 곧장 영민이에게 소리쳤다.
“엄마 등록서 쓴다! 딴소리하기 없기야!”
“으응? 응... 알았어.”
영민이는 탭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진짜 선생님이랑 공부할 거야?”
나 역시 다시 물으며 아이의 눈을 살폈다.
"네~네~"
그렇게, 어영부영 이렇다 할 테스트도 없이 아이의 정보도 제대로 모른 채 두 번째 씨앗이 우리 공부방으로 들어왔다.
‘ADHD도 아니고, 경계선 지능도 아니고, 난독증은 아니라잖아?
그냥 공부가 조금 싫은 것뿐이니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속으로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첫 수업을 준비했다.
그런데 수업 첫날, 또 하나의 변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왼손잡이.
연필을 들자마자 알았다. 불길함....태블릿을 만질 때 분명 오른손으로 터치하는 것 같았는데?
글씨도 서툴고, 한글도 겨우겨우 부들부들 떨면서 써 내려가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글씨를 몇 자 적더니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고 입을 꾹 나물채 요지부동이었다.
"저 글씨 못써요. 힘들어요."
공부도 하기 싫어하는 것도 큰 문제인데 거기에 왼손잡이, 게다가 연산은 전혀 안 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스스로 읽거나 쓰기 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다. 5 연타로 스트라이크를 맞은 느낌이었다.(난 야구를 전혀 모른다)
잠시 영민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갈등을 했다.
첫 수업이니 환불하고 그만둘까?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못 가르치겠으니 그만 나가주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 나는 25년의 경력의 베테랑이라고 자부했던 내 커리어에 흠집이 생기는 것도 싫었다. 지금껏 내가 못 가르치는 아이는 없었고 혹여 있었다면, 그 아이는 어떤 할아비선생님이 와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2년 전 학원을 갑자기 관두게 된 일이 떠올랐다.
스트레스가 쌓여 혈압이 오르고, 대상포진까지 찾아왔으며, 몸은 망가지고 번아웃에 시달렸었다.
그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일을 다시 시작할 때는, '돈보다 내 건강과 삶이 먼저'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모집하기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오픈하고 한 달이 지나서야 첫 씨앗이 등록했고, 또 한 달 보름 만에 두 번째 씨앗이 겨우 등록한 상태였다. 유안이 한 명보다는 힘들어도 두 명이 더 어찌 보면 더 나을 수 있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내 능력이 이런 학생들을 지도하고 성과가 나오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들로 수업 내내 머릿속과 마음이 번갈아 요동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왼손잡이를 체크 못한 것에 대한 자책도 포함되었다.
겨우겨우 수업을 마치고 첫 수업 마무리 전화를 드렸다.
"왼손잡이라 글씨 쓰기를 싫어해요. 그래서 공부도 지금껏 하나도 안 시켰어요... 근데 공부방 갔다 와서는 너무 재미있다고 하네요? 어떻게 수업하시는 거예요?"
"영민이가... 재밌었다고 해요? 다행이네요. 제가 영민이처럼 공부 싫어하는 아이들도 잘 지도했던 경험이 있어요. 최선을 다해 영민이도 가르쳐 볼게요"
'입 닥쳐! 뭐라고 하는 거야?' 마음속 외침과는 다르게 영민어머니의 칭찬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춤을 추는 고래가 돼버렸다. 입으로 내 뱉어버린 말은 다시 주워 담기도 전에 순식간에 공중으로 흩어져 영민어머니에게 전달돼버렸다.
"2학년이지만 하나도 모를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그렇게 유안이와 영민이, 두 명의 아이와 또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영민이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공부가 하기 싫거나 어려우면 갑자기 '냉면'이라고 말하는 거였다.
"냉면? 그게 무슨 말이야? 요즘 아이들이 하는 말이니?"
"냉면!"
영민이는 계속 이 말을 반복했고, 왜 그 말을 하는지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웃기만 했다.
"유안아, 요즘아이들 냉면이라고 말하는 뜻이 뭐야? 당근처럼 줄임말인가? 아님 냉면이라고 말하는 놀이가 있어?"
"아니요... 저도 몰라요, 냉면은 먹는 거잖아요...?"
두 손을 양쪽으로 벌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유안이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며칠째 수업을 하면서 냉면을 말하길래 검색도 해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줄임말이나 놀이로 검색이 되지 않았다.
"영민이가 냉면이라고 말한다고요? 왜 그러지?"
영민어머니도 모른다고 한다. 이제는 내가 당황해하고 궁금해하니 더 재미가 났는지, 더 자주 냉면이라고 말했다. 나는 냉면을 좋아한다. 그런데 냉면에 냉자도 듣기 싫어지고 있었다.
냉면이라고 말하는 순간 영민이는 연필을 내려놓은 채 공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실실 웃기만 하기 때문이다.
"냉면"
계속되는 냉면에 짜증이 슬슬 나기 시작했다. 확!....(뒷말은 생략하겠다)
"곱창!"
나도 영민이의 냉면에 대적할 만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곱창이라고 말했다. 순간 영민이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짜장면"
냉면에서 짜장면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떡볶이"
"치킨. 족발. 닭발................... 딸기. 딸기 아이스크림...."
몇 번을 둘이서 의미 없는 음식이름을 대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딸기라고 하자, 딸기 아이스크림이라고 대답하는 영민이를 향해 크게 웃으며, 양손을 엑스자로 만들며 말했다.
"영민이 졌어. 왜 선생님 따라 해? 딸기라고 말했는데 딸기 아이스크림은 반칙이지"
이것은 게임도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우기기 시작했다. 초등아이들은 초등아이들만에 눈높이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유치해야 하고 말도 안 되는데, 또 일리는 있어야 한다. 그들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야 한다.
"한 번만 봐주세요. 선생님 네? 한 번만요~ 다시 해요~"
영민이의 반응에 속으로 '오예~!'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표정으로 속마음이 들키면 안된다. 어른이 되고부터 "얼굴에 다 쓰여있어"라고 했던 어른들의 말을 이해한다. 하지만, 영민이는 아직 "얼굴에 글씨가 써 있어요?"라고 질문하는 아이다. 애써 감추지 않아도 영민이는 아직 내얼굴 표정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안돼 오늘은 네가 졌으니까. 오늘 공부는 너 혼자 스스로 해야 돼. 선생님이 읽어주거나 설명해 주지 않을 거야"
"그럼 내일 또 해요? 네?"
"그럴까? 영민이 오늘 연산 한 바닥 다 맞으면 내일 또 할게. 내일은 과일이름으로 해 볼까?"
"네 선생님! 저 진짜 잘할 수 있어요. 내일은 내가 꼭 이길 거예요!"
"두고 봐야지! 선생님이 또 이기면 영민이 어떡할래? 아이고 재밌네ㅎㅎ 영민이를 이기니까 선생님 오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갔어! 고마워 영민아~~호호호~~~~"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문제를 푸는 영민이 모습이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도 생각이 났다. "귀여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혼자 실실 웃고 있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끝말잇기도 아닌 정체 모를 놀이를 계속해야 했다. 그 놀이를 적당히 하고 끝내야 했다.
영민이를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규칙이나 벌칙을 만드는 일로 머리를 써야 했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냉면을 말하면 수업을 멈추고 냉면게임을 해야 했다. 이기거나 지는 결과를 확인해야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영민이와 실랑이를 하며 에너지를 허비하는 대신 냉면게임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점점 냉면이라고 말하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영민이가 몸을 배배 꼬며 내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엄마한테 하던 행동이다.
“선생님, 저 핸드폰에 선생님 이름 저장했어요.”
“그래? 뭐라고 저장했는데?”
(핸드폰 화면을 수줍게 보여준다)
예쁘 서 생님
나는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이미 터져버렸다. 사실 나는 ‘예쁘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외모를 가졌다.
그런데 초등 저학년 아이들은 선생님의 외모에 의외로 인심이 후하다.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들의 눈에는 어느새 내가 ‘예쁜 선생님’으로 보이는 마법이 펼쳐지곤 한다.
“고마워, 영민아. 그런데...‘예쁜 선생님’이 맞는 표현이야. 우리 같이 고쳐서 다시 저장하자~”
“어어... 잠시만요.. 내가 할래요”
모든 것을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던 유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놀리듯이 말했다.
“‘예쁜’을 ‘예쁘’라고 써놨어. 너 글씨 못 써? 선생님도 틀리고~ 야! 나는 아름다운 선생님으로 저장할 거야!
글씨도 안 틀리게 저장할 수 있어!"
경쟁심이 발동할 포인트는 아닌데... 고맙다 얘들아...사춘기가 와도 지금 그 마음 변치 말아 줘!
영민이는 얼굴이 빨개져 핸드폰을 뒤로 숨기며 다시 고쳐 쓴다. 또 틀렸다.... 아휴... 한글...어.쩌.지.
지금은 왼손잡이가 흔하지만, 25년 전만 해도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를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부모님들이 많았다. 모든 사람은 오른손잡이여야만 했고 왼손잡이는 신기한 존재이자,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왼손잡이들은 글씨 쓰기를 힘들어하고. 글씨를 예쁘게 쓰는 아이들도 없었기에 힘든 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첫 상담 때 왼손잡이인 경우 미리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우리 채린이가 왼손잡이예요. 어떡하든 오른손으로 고쳐볼까 노력했는데 결국 못 고치더라고요.
게다가 오른손으로 밥도 먹고 글씨를 쓰라고 강요했더니 아이가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했어요. 바보처럼... 그래서 포기했어요. 다행히 왼손잡이지만 글씨는 아주 잘 쓰고, 공부하는 데도 문제는 없는데 가끔 놀리는 아이들이 있나 봐요. 그것만 좀 신경 써 주세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요즘 미국드라마 보면서 왼손잡이 많이 보는데, 전 오히려 꽤 멋있어 보이던데요? 호호"
상담을 하고 채린이와 공부를 시작했다.
역시 글씨는 오른손잡이 못지않게 야무지게 잘 썼다.
"선생님, 채린이 팔 때문에 저는 글씨를 못 쓰겠어요" "선생님, 채린이 공책으로 제 책을 덮었어요"
"선생님, 채린이 엉덩이가 제 자리까지 넘어왔어요"
왼손으로 쓰다 보니 책이 반쯤은 돌아가 있고, 오른손잡이와 같이 앉아 공부를 할 때면
왼쪽에 채린이가 오른쪽에 다른 친구가 앉아야 글씨 쓰기가 편했다. 사소한 걸로 싸우거나 투닥거리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필요 없이 한 명씩 앉는 책상이 대부분이지만, 그 당시에는 둘이 앉는 책상이 많아 자리 앉기 전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이었다.
한동안 영민이가 공부방에 잘 적응하는가 싶더니 3개월 만에 또 다른 문제를 직감했다.
" 어머니, 요즘 영민이가 말이 없어진 것 같아요? 무슨 일 있나요?"
"그래요? 사실... 요즘 받아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데 영민이가 글씨 쓰기를 너무 싫어해서 안 하려고 해요.
어제도 많이 혼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매번 받아쓰기연습 할 때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어요"
"그랬군요... 말이 많았던 영민이가 요 며칠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길래 물어봤더니 받아쓰기 빵점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에휴, 그니까요. 큰일이에요. 글씨를 안 쓰려고 해서... 왼손잡이라 그런가 해서 오른손잡이로 바꾸려고 생각 중에 있어요"
"네?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 2학년인데 오른손잡이로 바꾸시려고요? 안 돼요. 억지로 바꾸면 스트레스받아서 말도 더듬고 안 좋다고 들었어요."
"말을 더듬는다고요? 저희 친정아빠가 왼손잡이셨는데 어른다 돼서 오른손잡이로 교정했어요. 그래서 영민이도 바꾸려고 하는데...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요"
"예전에 제가 가르치던 아이도 억지로 바꾸려다가 그런 경우가 있어서 제가 잘 알아요. 받아쓰기 때문이라면 제가 지도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2학기 내내 받아쓰기를 연습시켰다. 나만의 방법이 있었다.
나는 영민이의 예쁜 선생님이었고 그 마법은 받아쓰기연습에 유용하게 쓰였다.
영민이는 받아쓰기를 처음 90점을 맞았고 자신감이 붙은 이후로는 스스로 잘 해냈다.
여전히 왼손잡이로 글씨 쓰기를 힘들어하고 가끔은 싫어하지만, 오른손잡이로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왼손에 힘이 생겼다.
"선생님, 글씨를 너무 많이 써서 왼손이 저려요"
왼팔을 꾹꾹 누르며 얼굴을 찡그릴 때마다, 나는 얼른 영민이의 왼팔을 몇 번 재빨리 주물러준다.
"이제 괜찮지? 다시 써봐~~"
"... 그러네?"
수줍게 웃으며 다시 글씨 쓰는데 매진하는 영민이다.
한 번은 영민이가 공부를 열심히 안하고 딴짓만 하고 있을 때였다.
"냉.면."
내가 영민이에게 눈을 흘기며 말하자, 수줍게 웃으며 "곱창"이라고 대답하더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