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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부방 그만 보낼테니 환불해줘!

공부방 신입원장 고혜라

by 고해라

‘모든 이름은 가명이며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세 번째 씨앗은 서하,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였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였고, 상담은 엄마가 아닌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왔다.


“집 근처 학원을 보내고 있는데요,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아파트 공동현관 번호도 매번 까먹어서 내가 매일 데리고 등하교랑 학원도 데려다주고 있어요.”


2학년인데... 혼자 집엘 못 들어간다고요?”


"예~ 참나. 선생님도 답답하시죠? 얘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에요. 근데 꼭 한국 사람처럼 생겼어요.

그래서 아무도 외국 사람인 줄 몰라요. 그래서인지 서하가 말할 때 이상한 말도 쓰고, 어투도 좀 이상할 때가 있어요. 애 엄마가 학원을 보냈는데 거기서 도대체 어떻게 배우는지 도통 늘질 않아요. 내가 답답해서 광고 보고 데려왔어요. 잘 가르쳐 줄 수 있겠어요?"


공부방을 구해 준 부동산 앞에 세워둔 배너를 보고 오셨다.


“아... 그래요?”


나는 대답하며 조용히 서하를 쳐다보았다.

작고 예쁜, 평범한 2학년 여자아이. 말도 잘 들을 것 같고, 성격도 얌전해 보였다.


"서하 어머님 하고는 상의해 보셨나요?"


"상의는 무슨! 내가 보내면 보내는 거지"


"손녀 학습에 관해서는 할머님이 책임지시고 계신 거예요? 서하어머님은 한국말을 잘 못하시나요?"


"아니요, 한국사람만큼 잘해요. 근데 내가 여기 보내려고 데려왔어요. 광고 보니까 우리 서하가 딱 다녀야 하는 곳이더라고. 그리고 지금 다니는 학원은 이번 달까지만 다닐 거예요 "


"그래도 서하어머님 하고 의논을 하고, 다시 오셔서 등록하시는 게 나으실 것 같아요"


"아니에요. 이걸로 결제해 주세요. 우리 아들카드예요. 내가 보낸다면 보내는 거예요! 걱정 말고 우리서하나 잘 가르쳐 주세요"


"그래도... 어머님과..."


바쁘시다고 가야 한다면서 막무가내로 카드를 내미시며 결제를 요청하셨다.


“제가 경력이 많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이가 좀 있어서요. 중국, 필리핀 등 다문화 가정 아이들도 가르쳐본 경험이 있어요. 서하도 잘 지도해 보겠습니다!”


결제를 하면서도 영 찜찜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읽으신 할머님은 주섬주섬 들어올 때 쓰고 왔던 갭모자를 챙기시면서 말씀하셨다.


"정 걱정되시면 서하엄마한테 선생님에게 전화 한번 하라고 할게요. 난 이만 가봐야 해서.. 가자! 서하야"


조용히 앉아서 내가 준 음료수를 다 먹지도 못하고, 들고 할머니를 따라나서며 꾸벅 인사를 한다.


"그래 서하야, 내일 2시에 공부방으로 와. 내일 보자"


이렇게 세 번째 씨앗이 공부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그렇다 할 테스트도 할 수 없었고 30분 만에 상담이 마무리되고 등록까지 속전속결로 끝나버렸다.

‘그래,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들보다는 수월하지. 서하 정도면... 유안이, 영민이보다 훨씬 편하겠지.’

예쁜 여자아이가 들어오니, 공부방 분위기가 금세 핑크핑크 해 졌다.

두 사내아이들 역시 어느새 마음이 말랑해진 듯, 작은 설렘이 얼굴에 스치듯 비쳤다.






그런데... 두 번째 수업 날,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내가 지금 밖에 나왔는데 우리 서하를 공부방에 못 데려다줄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못 갈 것 같아요.”


“... 네? 무슨 말씀이시죠? 서하가... 혼자 공부방에 못 오나요?”


“걘 혼자 아무 데도 못 가요. 내가 데려다줘야지. 아니면 못 가요.”


학교 정문에서 도보 5분 거리인데... 정말 혼자 못 온다고? 아직 아이들이 올 시간이 남았고,

결국, 내가 직접 데리러 가기로 했다.

서하를 만나 손을 잡고 공부방 오는 길을 설명하며 함께 걸었다.

그런데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도착하자 서하는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호출도 못 하고, 키패드만 멍하니 쳐다보고 서 있었다.

아, 맞다... “자기 집도 혼자 못 들어간다”는 할머니 말씀... 번호를 못 눌러서란 말을 그땐 그냥 흘려들었었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서하 할머니가 서두르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걸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날, 현관 앞에서 서하와 함께 몇 번이고 버튼을 눌러가며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번 알려준다고 외워지는 일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공부는 해야 하고...

결국, 서하의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어서 알려주었다.


서하야, 이거 봐봐. 여기 이 버튼 누르는 거, 이 동영상 여러 번 보고 외워. 그리고 혼자 눌러서 들어와야 해. 알았지? 2학년인데 이것도 못하면... 진짜 안 돼.”


나는 말투를 조금 강하게 말했다.

갑자기 강한 말투에 서하는 무서웠는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얼어버렸다.

그렇게 3일 동안 직접 데리러 가서, 같이 걷고, 비밀번호 누르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혼자서 공부방을 오고 가게 된 서하.

공부도 그만큼 느렸다. 2학년이었지만 1학년 갓 입학한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어찌 보면 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서하상태를 할머니와 상담해야 했다.


"할머님, 서하가 또래아이들보다 많이 느립니다 혹시... 알고 계신가요?"


"알죠. 아니까 내가 거기 공부방으로 데려간 거예요. 근데 서하 엄마는 내가 맘대로 공부방으로 옮겼다고 좀 안 좋아하네요"


역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늘 할머니와 상담하고 나면 아이어머니들이 나중에 와서는 딴소리를 하곤 했던 경험이 있다.

양쪽으로 상담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누구와 소통을 자주 해야 할지도 난감할 때가 많다.

중간에 끼어서 두 사람과 나눈 대화가 자칫 잘못 전달되기라도 하면 오해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그러시면... 제가 어머님과 통화를 해 볼까요?"


"그러실래요? 내가 선생님한테 들은 얘기를 서하엄마한테 해도 못 알아듣는 것 같고, 자기가 등록해 놓은 학원을 맘대로 끊고 내 맘대로 공부방으로 옮겼다고 좀 뭐라 하네요"


"카드는 아드님 걸로 결제하셨는데... 그건 의논되신 거예요?'


"그럼 아들이 준걸로 한 거지. 아들은 내 말을 이해하는데 서하엄마가..."


"네 알겠습니다! 제가 서하어머님과 통화해 보겠습니다"





스물아홉 공부방 1년 차 신입원장이었던 나는 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상담을 오는 것이 낯설었다.

할머니들이 손주 학습상태를 이해하실까? 내가 상담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으실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대한 선입견이 있을 젊은 나이였다.

상담을 하러 오신 할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인 손녀를 데리고 오셨다.

그 당시 기억으로는 60대가 훨씬 넘으셨던 것 같다. 흰머리에 짧은 파마머리였고 알록달록한 꽃무늬 티셔츠와 몸배 바지를 입은 전형적인 할머니 모습이었다.

지금 60대에 그런 복장을 하고 있는 할머니는 시골에서 볼 법한 비주얼이다.

그것도 70대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50대가 넘어선 나를 봐서도 인간은 점점 어려지는 것 같다.

방부제가 들어간 음식을 많이 먹어서 천천히 늙어가는 것일까? 방부제로 인한 저속노화를 의심해 볼 만하다.

25년 전만 해도 방부제가 들어간 음식보다 건강식을 더 먹었던 내 기억으로 참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우리 손녀가 공부를 잘했는데 4학년이 되고 나서 어렵다고 해요. 자꾸 학원을 보내달라고 해서 문방구에서 물어보니 여기 공부방 있다고 해서 왔어요"


그 당시 문구점을 하고 있던 권사님이 소개를 하신 것이다.

유빈언니에게만 소개를 하시다가 그 공부방에 더 이상 받아 줄 자리가 없어서 내게 소개를 한 것 같았고, 내 예감은 정확했다. 감사인사를 드리며 소정의 소개비를 함께 드렸다.


"어머? 자매님 뭐 이런 걸 줘요? 나 못 받아요"


극구 사양하시더니 계속되는 실랑이에 결국 받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기저기 소개를 했지만, 나처럼 감사인사를 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잘 오셨어요. 그런데 지아어머님은 바쁘신가요?"


내가 말을 하자마자 지아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엄마가 안 계신가?... 어쩌지?


"아.. 지아엄마는 일하러 가서 가끔 와요. 그래서 내가 지아를 돌봐주고 있어요"


엄마가 계시는데 지아는 왜 그런 표정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할머니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셨다.

만 원짜리 10장이 들어있었고 잘 부탁한다는 말씀과 함께 지아를 두고 나가셨다.

그날부터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등록하고 일주일 동안은 성실히 공부방에 와서 공부를 하고 갔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지아가 수업시간에 조금씩 늦게 오더니 30분, 1시간을 늦게 등원하는 것이었다.


"지아야, 요즘 점점 늦게 오는데 5분 10분 정도는 그럴 수 있지. 학교가 늦게 끝날 수도 있고 청소당번일 수도 있으니. 근데 1시간 이상 늦는 건 좀 곤란해. 너도 시간을 정해서 등원하는 것처럼 다른 아이들도 정해진 시간에 오거든. 한 타임 공부하는 학생들의 인원이 정해져 있는 거, 너도 알지?"


막 1년이 지난 시점이라 아이들이 계속 등록을 하고 있었고, 나도 아이들이 갑자기 늘어나니 한 타임당 아이들이 들쑥날쑥하면 가르치기가 벅차고 힘들었다.


"네... 근데 일이 좀 있었어요"


"무슨 일? 학교에서 청소나 그 밖에 스케줄은 이해해 주지만 친구들과 놀다 오거나, 너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각하는 건 선생님이 봐줄 수 없어. 그리고 다른 학년 수업시간에 지아가 계속 오게 되면, 그 시간아이들에게도 피해가 되고. 너도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돼"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이 없었지만 왠지 눈빛이 순간 싸하게 변하는 걸 느꼈다. 사춘기라 짐작하고 더 이상의 말을 삼켰다.

그리고 그다음 날 수업시간이 다 돼도 지아가 오지 않았다.

지금이야 아이들마다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니 전화를 바로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속수무책으로 아이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딩동~

누구지? 공부하는 시간에는 아이들은 현관문을 그냥 열고 들어오도록 열어두고 있어 벨을 누르지 않는다.


"누구세요?'


"여기가 우리 지아 다니는 공부방인가요?"


웬 중년아주머니 두 명이 문을 벌컥 열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당황해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공부하던 아이들도 어리둥절해서 일제히 현관 쪽을 쳐다보고 있었고, 어느새 한 아이는 책을 든 채로 잽싸게 현관 앞까지 와서 내 옆에 서 있었다.


"아~ 니가 우리 지아한테 피해 주지 말라고 한 선생이야?"


엥? 순간 공부방은 찬물이 천정에서 쏟아져 순식간에 언 것처럼 사늘해졌다.

아이들도 나도 얼음인 상태였다.


"그니까. 니년이. 우리. 지아한테. 피해 준다고 뭐라 했냐고?"


이제 그 여자의 검지손가락이 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들바들 떨면서 천천히 말이란 걸 했다.


"누.. 구.. 신.. 데, 말씀을 그렇게 하시나요? 혹시... 지아 어머님 되세요?"


그녀는 히죽 웃으며 옆에 같이 온 중년여자를 한번 쳐다보았고, 그 여자도 재밌다는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것이 확인이 되자, 한 손은 허리에 한 손으로는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 지아가 피해를 준다며? 이 공부방 그만 보낼 테니 돈 환불해 줘! 씨발! 그런 소리 들으며 우리 애를 여기 왜 보내? 안 그래? 얼른 돈 내놔!"


이건 또 뭔 시추에이션인가? 피해 준다고 했지만, 그 말 한마디가 이렇게 화낼 일인가? 그리고 화가 났다고 한들 수업하고 있는데 들이닥쳐 다짜고짜 돈을 달라니? 당신이 진짜 지아 엄마가 맞긴 해? 할 말은 많았지만 풍성한 몸통에서 울리는 걸걸한 목소리와 찰진 욕에 그만 주눅이 들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 어머님 하고 상담한 게 아니라... 지아 할머님 하고 상담했어요... 환불을 해도 할머님한테 할게요..."


부들부들 떨면서도 나보다 10살 이상 나이 먹은 여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은 분명 내가 아니었다.

그 여자는 내 말을 듣자마자 약이 올랐는지 더 큰소리로 소리 질렀다.


"뭐라고? 내가 지아엄마야! 니년이 뭔데 돈을 나한테 안 준다는 거야? 씨발년아!"


이젠 아이들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 향해 뒤를 돌아서 얼른 집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너무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손짓으로 다들 가라고 반복해서 손을 휘적거렸다.

손끝이 떨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으며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는 사이 지아엄마는 십 원짜리 욕을 연신 해대고 있었다.

아이들이 다 나가자 더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고 나는 아무 댓구도 하지 않은 채 그 욕들을 고스란히 다 듣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얼음이 된 상태로 서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도 가지 않던 몇몇 여학생 중 한 명이 소리쳤다(그 학생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줌마! 왜 우리 선생님한테 욕해요? 욕하지 마세요!"


나도 한마디 못하고 서서 그 여자가 쏟아내는 갖가지 욕을 다 듣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무슨 깡으로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대드는지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뭐야? 이년은? 넌 뭔데 지랄이야? 어린것이 싸가지 없이 저리 안 가!"


"왜 애들한테까지 욕하세요? 저하고 얘기하시죠. 어서들 가. 선생님 걱정하지 말고"


"선생님 가만있지 말고 선생님도 소리치고 욕하세요! 왜 듣고만 계세요? 흑흑"


급기야 훌쩍대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인지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이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 지아엄마에게 주려고 들고 나왔다.

돈을 보자마자 지아엄마와 같이 온 여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 손에 든 돈을 낚아채 듯 빼앗아서 침을 뱉어 돈을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했다.


"여기 공부방비가 10만 원이야?"


혀가 반토막인지 시종일관 반말이었다.


"지아가 보름정도 공부했지만 한 달 치 다 환불한 금액이에요. 돈 받으셨으니 어서 가주세요"


"아 그래? 돈 받았으니 가야지!"


하더니 두 여자는 돈을 보며 깔깔 웃으며 돌아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경찰에 신고 안 하고 돈을 왜 주었냐며 난리를 치며 문 앞에서 떠들고 있었다.






한바탕 소동은 빠르게 아파트에 소문으로 번졌다.


"자매님, 놀라셨죠? 그 욕을 다 들으면서도 한마디 안 하고 있었다면서요? 잘하셨어요. 그런 사람하고는 상대를 안 하는 게 나아요"


"여기까지 소문이 났어요? 창피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날 한참 울었어요."


"그랬을 거야. 나라도 심장이 벌렁거렸을 테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래도 다행인 게 자매님이 진짜 선생님 같았다고 대단하다고, 다들 좋게 말하던데요? 학부모들이 말하는 거 들었어요"


진짜 선생님 같았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선생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선생님으로 인정을 해 준다는 뜻인가? 어찌 됐든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좋은 이미지로 소문이 났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요? 전 또 나쁘게 소문 났을까봐, 엄청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 애 엄마가 중국사람인가? 그렇다는 것 같아. 그 할머니가 와서 얘기하는데 애엄마가 도박에 미쳐 집을 자주 나갔다가 한 번씩 이따금씩 들어오는데 올 때마다 돈을 달라고 한대요~ 지난번에도 아이를 학원에 보냈는데 거기서도 환불을 해가서 공부방으로 보낸 건데 여긴 또 어떻게 찾았는지, 갔다면서 할머니도 챙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이 소동으로 공부방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공부방을 알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는데 이렇게도 홍보가 되는구나. 지금으로 따지면 노이즈마케팅을 한 셈인가?'

아이들이 많으니 수업하느라 이 일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지아 할머님이 약간 술기운이 있는 상태로 공부방에 오셨다.


"지아 할머님, 웬일이세요?"


할머니는 약간 비틀거리며 현관 앞에 서서 들어오시라는 권유에도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서 계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셨다.


"선생님 죄송해요. 지아엄마 때문에 속상하셨죠? 이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감히 학생 가르치는 선생님한테 그런 험한 일을 겪게 했으니 내가 면목이 없어서 술 한잔하고 왔어요. 사죄드리려고 아휴..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너무 창피해서... 선생님 진짜 죄송해요"


내 손을 잡고 몇 번이고 꾸벅 인사를 하시며 용서를 구하셨다.


"괜찮습니다. 할머님 다 잊었어요.... 지아는 잘 지내요?"


"창피하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전학 보내 달라고 해서 지아아빠가 데리고 갔어요"


"그랬군요..."


수십 번을 죄송하다고 술주정처럼 무한반복하시더니 현관문을 열고 나가셨다.

지아의 표정과 눈빛, 왜 공부방에 지각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니 공부방 지각했다고 혼냈던 것이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지아할머님이 나간 현관문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여보세요? 서하 어머님이세요?”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화를 받은 서하 어머님은 말투와 목소리만으로도 한국인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베트남 분이라고 들었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약 한 시간 동안 서하에 대해 이런저런 상담을 나누었는데, 어머님은 이미 서하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내가 걱정했던 부분과는 차이가 있었다. 문제는 단지 서하 할머니와 어머님 사이에 소통의 오해가 있었던 것뿐이었다.

사실 서하 어머님도 다른 학원을 알아보고 있었으나,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 미루고 있던 상황이었다. 성격이 급하신 할머님이 우리 공부방 상담만 받고 오겠다 하셨다가 바로 등록까지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상담을 마친 뒤에는 어머님도 우리 공부방에 서하를 보내는 것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은 할머니가 아닌 서하 어머님과 직접 소통하며 잘 이어가고 있다.


서하는 공부방에 가장 먼저 온다. 작은 체구와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처음엔 쉽게 위축되는 모습이 보였다.

옆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보다 유난히 자신감도 부족했고, 문제를 풀 때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서하에게는 다른 강점이 있었다. 느리지만 꾸준히 따라오는 성실함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신기한 스쿨버스’ 속 피비 테루스를 떠올렸다. 피비는 전학생으로 등장해 처음에는 낯설고 주저하는 아이였다. 새로운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 쉽게 나서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만의 속도로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했다. 늘 빠른 친구들 사이에서 조용히 꾸준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아이였다.


서하도 그렇다. 금방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다시 도전한다.

속도는 느리지만, 그만큼 단단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성장하고 있다.

친구가 옆에서 휘리릭 풀어가는 동안, 서하는 한 걸음씩 차근차근 따라간다. 겉으로 보기엔 더딘 것 같아도, 결국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힘은 누구보다 크다.

프리즐 선생님이 피비를 대하듯, 나는 서하에게도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 주려 한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네 속도로 잘하고 있어.”


그렇게 작은 성취를 하나씩 쌓아가도록 도와주면, 서하 역시 언젠가 자신 있게 웃으며 말할 것이다.


“선생님, 저도 해냈어요!”


그 한마디가 바로, 아이가 자신을 믿게 된 순간이자, 내가 공부방선생님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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