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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일 봐요 선생님

공부방 신입원장 고혜라

by 고해라

‘모든 이름은 가명이며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선생님, 블로그 보고 전화드렸습니다.”


처음 전화를 걸어온 어머님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절박해 보였다.


“통화하다 보니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아요. 우리 아이랑 바로 상담받고 싶습니다.”


유안이는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다.

상담 당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작고, 2학년도 채 안 되어 보였다.

가냘픈 체구에 차분한 얼굴. 유안이는 엄마 곁에 살짝 기대어 앉았고, 상담 내내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내가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눈빛은 맑았지만 깊고 멀었다.

무표정의 얼굴은 마음이 굳게 닫혀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상담을 이어가며 슬쩍슬쩍 아이를 살폈다.

엄마의 눈치도, 아이의 표정도 조심스럽게 읽어보았다.

이미 전화로 ADHD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느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지, 수업을 따라올 수 있는지는 직접 봐야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이가 ADHD가 있어요. 난독증도 조금 있다고 해요. 그래서 공부방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생님 블로그를 보고 뭔가... 믿음이 갔어요. 그래서 용기 내서 전화드렸어요.”


어머님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말 끝에는 간절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날의 방문은 단순한 상담이 아니라, 이미 마음을 정하고 등록하러 오신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나의 선택뿐이었다.

‘지금 이 첫 학생이 공부방의 시작이 될 텐데...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첫 등록이 중요한데, 너무 무거운 짐부터 시작하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는 조심스레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유안아, 선생님이랑 공부해 볼래? 지금은 친구들이 없어서 너랑 선생님 단둘이 공부할 건데... 괜찮겠어?”


말하고 나서 조금은 뜨끔했다. '괜찮겠어?'라는 질문에 내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지는 걸 막으려 애를 썼다.

아이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네... 선생님이랑 할래요.”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이며 대답한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진짜? 선생님이랑 단둘이 수업해도 괜찮겠어? 심심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이번엔 기쁨과 안도감도 약간 섞여있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한번 눈을 맞추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좋아요.”


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내려놓았다 망설이고 있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 밤,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래. 이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얼마나 오래 고민했는데...

뭘 망설여. 그냥 해.’





유안이는 처음에 자주 울었다.

수업 중에, 문제를 풀다가, 설명을 듣다가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예전에는 공부만 하면 울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수업을 마치면 우리는 10분 동안 오목을 두었다.

오목은 내가 유안이에게 처음 가르쳐 준 놀이였다.

공부방을 처음 시작했을 때, 공부 말고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빨리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아빠와 함께 오목을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는 매일 회사에 일찍 나가 늦게 돌아오셨다.

말수가 적으셨고, 쉬는 날이면 하루 종일 잠만 주무셨다.

집에서는 대화도 많지 않았고, 그저 피곤해 보이는 모습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동생이 5학년이 되던 해였다.

아빠가 미국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되면서 출국날을 기다리며 잠시 쉬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무뚝뚝한 아빠가 우리 남매와 시간을 보내주시면서 가르쳐준 것이 바로 ‘오목’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두고 또 두어도 지루하지 않았던 그 오목. 그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즐겁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공부방에 들어오면, 나도 오목을 가르쳐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놓는 거야” 하며 차근차근 알려주고, 일부러 져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슬쩍 이기기도 하면서 유안이와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오목은 우리 공부방의 작은 놀이이자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유안이는 오목에서 지는 날이면 입술을 깨물고, 눈을 반짝이며 겨우 참다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다음 날이면 전날에 일은 까맣게 잊은 듯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유안이를 보며 내가 프리즐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 25년 전에 했던 고민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공부방을 시작했을 당시, 나는 가르치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곤 했다. 그러다 과학 공부를 위해 우연히 집어든 동화 <신기한 스쿨버스>속에서 프리즐 선생님을 만났다. 아이들을 존중하며 각자의 개성과 필요에 맞추어 지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큰 울림을 주었다.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 순간이었다.

프리즐 선생님이 보여준 교육 방식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두려움이 많은 아이, 산만한 아이, 호기심 많은 아이 등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은 그 당시의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내 학생 유안이는 늘 아놀드라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했다. 소심하고 걱정이 많으며 신중한 성향이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두려움이 앞서는 아이. 하지만 수학 앞에서는 달랐다. 숫자 위주의 문제는 유안이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글씨가 많은 다른 과목과 달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긴 글을 읽어야 하는 문제도 고작 두세 줄이면 충분했으니, 난독증이 있는 유안이에게 수학은 오히려 편안한 과목이었다.


다행히 수학 학습장애는 없었기에, 유안이는 꾸준히 문제를 풀며 자신감을 키워갔다. 영상 수업과 지면 수업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프리즐 선생님이 아놀드를 대하듯, 유안이에게도 두려움을 인정해 주면서 작은 성취를 쌓아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문득 프리즐 선생님을 떠올린다. “모든 아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배운다”는 그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를 잊지 않으려 한다.




유안이는 가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선생님, 저... 내일은 공부방에 못 올 수도 있어요.”


“왜? 무슨 일 있어?”


“몰라요... 엄마가 그러셨어요. 내일은 결석한다고.”


하지만 확인해 보면 사실이 아니었다.


“아니요, 결석 안 해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며칠 뒤에도 또 비슷한 말을 한다.


“저 내일 못 와요. 아니, 못 올 수도 있고 올 수도 있고...”


온다는 건지, 안온다는 건지, 매번 그렇게 말하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며 쏜살같이 뛰어나간다.


나는 이제 유안이가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유안아, 내일 오지? 내일 보자.”


그러면 유안이는 웃으며 “네, 내일 봐요” 하고 인사하며 현관문을 열고 조용히 나간다.


프리즐 선생님의 제자 아놀드도 불안하거나 새로운 상황이 닥치면 늘 이렇게 말했다.

“역시 집에 있을 걸 그랬어!”

하지만 에피소드의 마지막, 친구가 “오늘 집에 있지 않길 잘했네, 아놀드!”라고 말하자,

두려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일을 성취한 한후, 아놀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음, 이 알이 다시 돌로 돌아가면 정말 기쁠 거야. 훨씬 안전하거든.”

초등학생들이 자신감이 차오를 때 으시대면서 엉뚱하게 말하는 모습이 연상되어서 피식 웃었던 장면이었다.


나는 유안이에게서도 아놀드의 모습을 본다.

두려움에 흔들리면서도 결국 스스로 다짐하며 말하는 아이.


“내일은 공부방에 와요. 내일 봐요, 선생님.”


나는 그런 유안이에게 프리즐 선생님이 되어 주고 싶다.

프리즐 선생님이 아놀드에게 작은 성공을 경험하게 하여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곁에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주는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늘 첫 제자는 특별하다.

지금도 25년 전, 내가 처음 가르쳤던 아이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99년도 12월 오픈을 앞두고 밤늦게 전단지를 집집마다 붙이고 다녔었다.

그 해는 유난히도 추웠었다.(마음이 더 추웠는지 모르겠다)

전단지를 붙이고 나면 그다음 날 청소아주머니들이 다 떼버리기도 하고 상담전화 대신 "다시 전단지 붙이면 신고할 거예요!"라는 항의전화만 받을 때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도 그렇게 아무 성과 없이 지날 것 같아 우울하던 날이었다.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 누구세요?"


"혹시... 여기 공부방인가요?"


'전화도 없이 바로 찾아오는 거였어?'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의 상담을 하러 온 어머님은 40대쯤 보였다.

난생처음 상담이라는 걸 하게 되었는데 준비 없이 무방비로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경력이 전무한 상태라 초등학생만 모집 중이었다. 중학생을 가르칠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때였다.

두 달 후면 중학교에 입학하는 6학년 남학생이라...


"태권도선수를 하고 있어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어요.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걱정이 돼서 학원을 알아보다.가 문 앞에 붙여있는 전단지를 보고 무작정 찾아왔어요"


"... 초등학생만 모집하고 있는데요..."


말끝을 흐렸다. 처음 상담 온 어머님, 직접 이렇게 왔다는 건 등록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였기에 속으로 갈등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처음인데 중학생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럼 6학년은 안 받아주나요?"


순간 고민하던 나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1명이 간절했던 터라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아니요! 중학생도 가르쳐요. 언제부터 시작하실 건가요?"


'에라 모르겠다!' 심정이었을까?

머릿속생각이 미처 정리되지 않았는데 먼저 튀어나와 버린 마음속의 말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바로 해야죠. 곧 졸업이고 중학생이 될 건데 오늘부터 바로 보낼게요"


그렇게 내 첫 씨앗이 등록했다.

누가 선생이고 누가 학생인지 모를 수업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중학교수학문제집을 사 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이 오기 전에 오늘 공부할 내용을 미리 공부해야 했다.


"안녕? 반가워"


지훈이는 6학년 남학생이라곤 하기엔 키가 작고 몸이 왜소했다.

태권도 선수라고 해서 많이 클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실망보다 안심이 됐다.




겨울방학 내내 지훈이랑 단둘이 공부를 했다.

그렇게 매일 공부를 하고 가르치기를 반복하다 보니 지훈이는 교복을 입고 공부방에 오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곧 중간고사를 보았고 수학을 100점을 맞았다.

초등 때도 100점 맞은 적이 없었단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꼴이었다. (난 소띠다. 아니 그렇다고 ㅋㅋ)

이렇게 한 학기를 마무리하던 시점 공부방에 아이들이 5명으로 늘었다.

지훈이가 기말고사를 보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 지훈이가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태권도 도대회에서 3등을 했거든요. 그래서 태권도팀이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면 그 코치선생님이 용인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다고 해서요. 지금까지 잘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의 첫 씨앗은 미처 제대로 키워보지도 못한 채 헤어지게 되었다.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초보였던 나는 중학생을 매일 공부해서 가르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이들이 몇 명 안 돼도 학년이 제각각이니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요령도 없었고 진짜 밤길을 등불 없이 걷는 느낌이었다.

기말고사 시험대비까지 마치고 지훈이랑 헤어지던 날,


"공부방 끊었다고 선생님 보면 모른 체하지 마. 그럼 너무 서운 할 것 같아. 우연히 보게 되면 우리 서로 반갑게 인사하자! 전학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지훈이 꿈이 이루어지길 응원할게!"


학교를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갈 뿐 집이 이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집에 온다고 하니 가끔 만나면 인사나 하고 안부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네 선생님, 꼭 인사드릴게요!"


우리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단단히 약속을 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나가는 지훈이를 바라보며 수만 가지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첫 번째 제자 지훈이의 퇴원으로 인한 서운함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 경험은 25년을 겪었으면서도 극복하기 힘든 일 중 하나이다.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근처 초등학교 앞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집은 이사를 했지만 여전히 공부방을 했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학원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중국집 배달원이 뛰어와 같이 가게 되었다.

맛있는 냄새에 저녁으로 중국음식을 시킬까? 고민하며 자연스레 중국집배달통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중국집인지 슬쩍 보려고 했다.

근데 배달원이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서 있는 모습이 꽤나 부자연스러웠다.

'뭐야? 왜 저렇게 서있는 거지?' 순간 머리가 번쩍하며, 나도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얼굴이 뜨거워지며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도 쿵쾅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배달할 층에 다다르자 배달부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나는 그 짧은 순간 정신을 다시 부여잡고 있었다.

'지훈이... 맞는 거 같은데?'키가 훌쩍 커서 어른처럼 보였지만 어렴풋이 남아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지훈이 얼굴이었다. '태권도 선수 관뒀나? 용인대를 못 가는 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나?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씁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표현 못할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서 정신까지 멍했던 적이 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모습의 지훈이를 보게 될 거라 상상도 안 해봤다.

그렇게 나와 지훈이는 둘 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서로 우연히 보면 반갑게 인사하자고 했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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