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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욕하는 법(1): 고상하게 '멕이기'

형용사, 부사 등을 쓰지 말라고 교육받았지만...

by 방구석 특파원









기자들이 욕하는 법1.jpg



형용사/부사와 거리두기


우선, 형용사/부사 사용을 줄인다. 이쪽 업계에서 글 쓰려면 통과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나. 신문 지면이든 방송 리포팅이든 정해진 분량이 있으니, 글을 경제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분량 제한 없는 인터넷신문인데 왜?'라는 생각도 해보긴 했는데, 아무튼 나 또한 착실히 교육받아 형용사/부사를 다소 적대시해 왔다.


'기자의 글쓰기'를 집필한 박종인 기자. 그는 해당 저서에서 글쓰기 방법론과 관련 "이도 저도 귀찮으면 딱 네 가지만 지켜라"라고 강조했다. 1. 설계해서 써라 2. 팩트를 써라 3. 짧게 써라 4. 리듬감을 맞춰라 등을 설명했다. 이러한 글쓰기 원칙에 따르면, 형용사와 부사 등은 입지가 위태해 보인다.



고상하게 '멕이는' 방법?


그런데 요즘 신문 사설을 필사하면서 깨닫게 된 점이 있다. 어떤 사안을 지적할 때 '바보 해삼 말미잘!' 또는 '멍텅구리야!'라며 목소리 높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비판 방법이 있음을 말이다. 이는 기자초년병 때부터 의식적으로 멀어져 온 형용사/부사와 다시금 가까워지는 데서 출발한다. 정갈한 문장 속 은근슬쩍 형용사/부사 찔러넣어 상대를 '고상하게 멕이는' 방법이 되겠다.


고상한 글로 상대를 멕일 수 있다고? 약간 긴가민가할 수 있는데, 매일매일 생산되는 양질의 교보재가 있다. 신문 사설들이다.


가령,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등 범야권을 지적할 때다. 경향신문이 사설을 통해 국민의힘 등 이른바 보수 진영 쏘아붙일 때도 비슷한 맥락이다. D일보나 J일보, H신문 등도 이쪽 분야에서 '한 따까리'들 하시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조선' '경향' 사설이 제일 눈길이 갔다. 고상한 척 잘 멕이네, 생각하며...


사설이란? 언론사 이름으로 나가는 주장글이다. 사설은 글깨나 쓴다는 기자 집단에서 취재력과 문장력/논리력 등을 인정받은 베테랑 기자들이 사활을 걸고 쓴다. '회사의 얼굴'이 되는 글이자 국내외 오피니언 리더들이 읽을 것을 감안하기에, 여느 기사보다 내용과 형식, 어휘 등에 대한 기준이 까다롭다. 그 결과 사설들은 대체로 '엄근진' 그 잡채스러운 외견을 띤다.


그런데, 올해 초 읽었던 < 李 대표 비판은 '입틀막'한다니, 反민주당인가 >라는 '조선' 사설에서 눈이 번뜩 뜨였다. 이 회사의 주장이 공감됐다거나 참신했다 같은 건 아니고... 글쓰기에서 형용사/부사의 위력을 여실히 절감케 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TV토론에선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이상한' 판결을 내렸지만, 대법원도 그 발언이 거짓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이재명 대표가 경기지사 선거 토론 당시 허위발언 논란 비판)


"민주당은 민주화 세력이 모인 당인데 '반민주적' 행태를 예사로 한다."

(민주당의 '민주파출소' 개설 비판)



이 문장들을 맞닥뜨리기 이전까지, 해당 사설글은 내게 세상 진중하게 다가왔다. 따분했다거나 하품 나오는 이야기였단 소리다. 그러다 대법원 판결 앞에 "이상한"이라는 형용사를 은근슬쩍 끼워뒀는데 그 부분에서 피식했다. 솔직히 판사님도 읽다가 피식하셨을 거다. 아울러, "반민주적"이라는 형용사는 '민주당'이라는 단어와 찰떡 같이 호응하고 있어서 '스리슬쩍 잘 멕이네' 하고 생각케 했다.


'네가 그쪽 성향이라 그런 거 아니냐'는 반론을 들을까 봐 참고로 말씀드린다. 본인은 지난 2023년 언론계 원로 입을 빌려 "조선일보, 건설노조 왜곡보도 기가 막혀... 소설 쓴 셈"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낸 적 있다. 아울러 조선미디어그룹사 면접에서만 수차례 탈락할 만큼 '반조선'의 싹수를 보였고, 본인 서재에는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라는 책이 꽂혀 있기도 하다.


아무튼, 비록 '조선'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었으나 해당 사설의 형용사/부사의 적절한 사용에 무장해제되는 경험을 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경험을 했으니, 야당 쪽 관계자들도 '조선'의 주장을 탐탁지 않아 했겠지만서도 끝까지 이야기는 들어봤을 듯하다. 평소 지지고 볶던 직장동료가 예기치 않게 웃음 주면, 잠시나마 그에게 인류애가 생기지 않나.



형용사/부사와 친해지고 싶어


요즘은 그렇다. 내 기사 지적해 주는 사람이 도통 없다. 잘 써서 그런 게 아니다. 회사 구성원들이 서로 1인분 하기 바쁘다. 수습 시절 선배들로부터 '형용사/부사 사용 자제해라', '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써놨네' 등등의 지적을 받았을 때 불만이 많았다. 기사의 'ㄱ'도 모르면서 어깨에 왜 그리 힘을 줬는지.


시간 지나고 보니, 선배들도 그 잘난 속보 챙기느라 몸과 마음 바빴을 텐데 후배가 개발새발 쓴 기사까지 짐으로 얹어져 고생했겠거니 짐작케 된다. 언젠가 술자리서 '관심 없는 후배한테는 그냥 지적도 안 하는 편임. 내가 뭐하러 내 시간 투자해서 걔를 도와줌?' 했던 이야기에 가슴 찡하기도. 물론 '내가 너 1인분 하게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사전에 형용사/부사는 없다'는 기자초년병 시절의 호통이 희미해질 때쯤, 그리고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명시지가 아닌 암묵지로서 내면화하고 당연하게 여길 때쯤, 형용사/부사의 참신한 활용에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무척 역설적이고 상당히 공교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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