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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할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왔다

집회 현장 바깥에서 만난 '태극기 부대'... 정치보다 인간이 우선

by 방구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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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울시민으로서의 삶을 마무리했다. 2017년 대학교 입학 이후 꼬박 8년 만이다. 소년이 청년으로 거듭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주장해 본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촌놈이 '사르트르 왈, 마르크스 왈, 까뮈 왈' 운운하며 풍월 읊는 서당개처럼 변모했으니.


짐 바리바리 싸들고, 이사 트럭을 타고 약 2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했다.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하루에도 수차례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가까운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전입신고까지 마쳤더니 지역번호 031로 시작되는 번호로 "전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경기도민이 된 것이었다.


경기도민이 되고 이틀째였다. 전날 다이소에서만 17만원을 소비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여전히 집안 살림을 꾸리던 와중이었다. 다이소 들렀다가, 그 옆 마트 들렀다가, 아 그쪽에 반찬가게도...? 이러면서 장 볼 물건들을 메모 중이었다.


'띵 동 ~ '


하는 초인종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남의 집 벨소리...라 치부하기에는 소리가 너무 컸다. 누군가가 '2일 차 경기도민' 자택 초인종을 누른 것이었다.


관리실에서 들른 것이었다면 미리 통화 등으로 언질을 받았을 테다. 방 상태가 집과 돼지우리 사이의 어떤 것에 해당하는 상황에서 내가 누굴 부르지도 않았다. 당황 또는 황당, 그리고 상당한 의구심을 안고 인터폰을 들어 대답했다.


"누구시죠?"


인터폰 화면 너머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인 한 분이 서 있었다. 캡 모자에 KF94 마스크 차림이었다. 그런데 본인의 '누구시냐'는 물음에 인터폰으로 도통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인터폰 문제인지 노인 쪽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답답한 마음에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본인 경험상 건장한 성인 남성이 (인상 잔뜩 찌푸린 채) 불쑥 튀어나오면, 적어도 한국 공동체에서는 일이 빨리 해결되곤 했다.


그 노인을 마주보고, 약간 긴장한 채 목소리를 한껏 깔고 "누구시죠"라고 다시금 물었다. 그러면서 노인의 모습을 한 번 쓱 훑어봤다. 키가 170이 좀 안 되는 약간 왜소한 체구였고, 짙은 남색 캡모자 사이로 희끗한 머리를 볼 수 있었으며, 흰색 KF94를 착용하고 있었다. 눈 말고는 인상착의 파악이 힘들었다.


그 와중에, 그가 쓴 모자가 눈에 확 들어 왔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떡 하니 붙어 있는, 본인이 최근 헌법재판소로 출퇴근할 때 안국역 일대에서 모이던 사람들의 그 복장이었다! 비록 성조기/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게 아니었지만 확실했다. '태극기 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Honeycam 2025-03-04 22-50-37.gif (요즘 이런 출퇴근길 겪으며, '태극기 형누님들'과 내적 친밀감이 쌓인 상황이다)



태극기 할아버지께서 이윽고 내게 말을 건넸다.


"지갑을 주웠습니다. 돌려드리러 왔습니다."


지...갑?


의아한 이야기였다. 본인은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지갑 돌려주겠다며 굳이 남의 집까지 행차한다고? 이른바 '쎄'한 느낌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더욱 목소리 깔고 "지갑 잃어버린 적 없으니 돌아가시라"고 답했다.


태극기 할아버지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약간 막무가내식으로 내게 검은색 반명함 지갑을 건넨다. 아무튼 난 돌려주려고 왔다나, 경비실에 맡겨두려 했더니 직접 세대에 전해주라고 들었다나, 그런 영문 모를 이야기를 했다. 일단 지갑을 받았는데 그 안을 살펴보진 않았다.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계속 그를 응시했다.


이에 태극기 할아버지께서는 약간 횡설수설 모드가 됐다. '이상하네, 여기 OOO동 OOO호 맞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정확히 본인 주소지(이틀 된)를 읊는 것이었다. 그래서 받은 지갑을 내용물을 쓱 살펴봤다. 신분증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지갑 주인은 1943년생 문OO 할머니인 듯했다. 문아무개 할머니 신분증과 함께 체크카드 등도 같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해당 신분증상 주소가 정확히 여길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입주하기 전 살았던 분이겠거니 짐작이 됐다.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지금 안 계신다"고 시큰둥하게 다시금 지갑을 건넸다. 그러자 태극기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면서 지갑을 내게 건네려고 한다. 명절에 용돈 필요 없다는 손주 상대로 '소매넣기' 시전하는 할머니/할아버지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


그는 "이 할머니가 43년생이시면 나이 80이 다 됐을 거다. 지갑 잃어버리고 얼마나 당황하고 있겠느냐"며 "그래서 내가 택시까지 타고 여기까지 직접 갖다 주러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제껏 횡설수설하시던 분이었는데 이 대목에선 약간 진심(?)이 느껴졌다.


본인이라고 그 할머니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나보다 앞서 이곳에서 머무르셨겠거니 짐작만 했을 뿐. 그 사람이 어디로 갔고, 지금 어디에서 지내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태극기 할아버지께서도 난처한 눈치라, 본인이 "제가 이거 받아서 관리사무소로 인계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이전 세대였던 만큼 관리실에서는 그 할머니 연락처가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다.


태극기 할아버지는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면서 그제야 미소를 띤다. 그러면서 "거, 노인(지갑 주인 할머니)이 애타게 지갑 찾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하면서 "꼭 좀 주인한테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하고 떠났다.


관리사무소에 자초지종 이야기하고 할머니 지갑을 넘겨주고 오는 길. '태극기 할아버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봤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그려진 모자를 쓰고, 약간 드세보이면서도 괄괄한 목소리...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즘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법재판관들 일일이 이름 호명해 가면서 날 세우던 그런 시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도 지갑 찾고 있지 않겠느냐'며 말꼬리 흐리던 모습은, 우리 이웃에 사시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흔히 '태극기 부대'를 생각하면 성격 세고, 고지식하면서도, 목소리 큰 노인 세대를 떠올리게 된다. 반공! 친미! 외치면서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가끔 이스라엘기까지;;) 흔드는 모습도 오버랩된다. 솔직히, 청년 세대로서 굳이 말 섞고 싶은 인간군상은 아니다.


다만, 정치적 성향이 많이 달라 그들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 우리 이웃이라는 걸 태극기 할아버지를 통해 깨달았다. 정치 이전에 사람이 먼저라는 상식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생각 다르다고 미워하면 안 되는데,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 시대 정치 지도자의 돌발 행동으로 깜빡 잊고 살았다. 국민 절반이 정치 성향 다른 사람과는 밥조차 먹기 싫다는 여론조사가 나오는 세상. 요지경 세상 속에서 편협해진 자신을 반성했다.


지갑도 제 주인 찾아가고, 정치도 제 자리로 돌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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