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제 기사 그냥 삭제하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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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OOOO라는 시민단체에서 회사로 전화가 왔는데요. 천공이 왜 양평에서 나오냐, 그런 내용으로 기자님이 쓰신 기사 있잖아요. 기사 안 내리면 고소/고발 조치하겠다는데요. 기자님 연락처 알려달라기에 그럴 수는 없다고 했고, 대신 그쪽 연락처를 받아놨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벌써 2년 전 이야기다. '입틀막' 정권에 본인 스스로 자기검열을 시작하게 된 날이.
이날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나와 사측은 1년에 한 번 있는 연봉협상마저도 카톡 대화로 해왔는데, 대뜸 전화가 온 것이다. 이야기 들어보니 시민단체 측에서 내 기사를 고소/고발하겠다고 으름장 놓은 듯했다. 기사를 내리라는 요구를 했다나. 6개월 차 기자초년병 등줄기에서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입틀막'은 남 이야기인 줄 알았다. 당시 고초 겪는 언론사들은 대개 '메이저'였고, 그 기자들의 면면은 취재/보도 베테랑 선배들이었다.
나는 뭐 큰 언론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취재해서 특종기사 쓰는 것도 아니었다. 까놓고 말하면 '취재기자'라기보다는 '정치부 에디터'에 가까웠다. 사실을 발굴하기보다는 있는 사실을 조합해서 어떤 관점을 제공하는, 그런 부류 말이다. 그런데 이 정부의 '언론 입틀막'이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손아귀가 뻗친 것이었다.
부장께 보고 드렸다. 이야기 들은 내용 자초지종 설명한 뒤 "기사 내리면 안 될까요?"라고 요청했다. 나는 잔뜩 쫄아 있었다. '이번 정권은 언론사가 아니라 기자 개인을 상대로 소송 건다잖아' 같은 흉흉한 소문 돌던 때라.
부장께서는 잠깐 있다가 연락을 주셨다. "이거 MBC 라디오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쓴 거네. 사실을 토대로 쓴 거고 내가 읽어봤을 때는 문제가 없어."라고 하셨다.
나는 그래도 "시민단체에서 고발하겠다는데요... 그냥 기사 내리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따졌다.
이에 부장께서는 "건전한 비판도 못하는 게 기자냐"며 나무라셨다. 아울러 따옴표(")가 들어가지 않은 유일한 문단을 짚으셨다. 그 마지막 문단이 '~했다'라는 단정적인 표현으로 끝났으면 언중위 가볼 소지라도 있었겠지만, 기자가 "~해석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고 쿠션어를 잔뜩 써둔 덕분에 언중위 갈 건덕지도 안 된다나.
(영화 <내부자들>에서 최강희가 "'~라고 알려졌다'라고 합시다"라고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결론적으로 부장님 말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연이틀 오들오들 떨었다. 아니 회사가 나 고소/고발 당하면 책임져 주려나? 그런 불안감과 짜증도 없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종국에는 "잡혀 가면 MBC 측이랑 같이 엮여 들어가는 거 아니냐. 그거 훈장 삼아 나중에 MBC로 이직을 준비하겠다"며 이상한 합리화로 용기를 얻었는데...
이후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될 때까지, 이 정부에서는 '언론인 회칼테러 협박사건', '윤 골프 취재기자 입틀막' 등이 있었다. 그랬던 대통령은 파면되기 전 관저에서 수사기관에 체포되면서 여당 의원들에게 "요즘 레거시 미디어는 편향돼 있기 때문에 잘 정리된 유튜브를 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ㅡㅡ????)
심지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영부인께서는 "조선일보 폐간에 목숨 걸었다"고 말한 내용까지 나왔다. '영부인 담당일진' 순덕이 누나가 계시던 동아일보면 이해를 하겠는데, 조선일보는 도대체 왜...?
아무튼, 이 정권에서 언론 비판이 많이 무뎌진 게 아니냐, 그런 부분에서 시민들의 불만이 상당했던 것으로 본다. 그러니 정권과 대놓고 맞짱 까기로 한 MBC가 시청률/신뢰도 등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던 것일 테고. 덩달아 진보 성향 유튜브들이 쑥쑥 컸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나 같은 천둥벌거숭이들도 기사 쓸 때 자기검열을 했고, 이것은 책임이 큰 레거시 미디어 편집국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정치부 기자들도 기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시민이다. 고소/고발 이야기에 움츠러들고 괜한 일 엮여 들어가는 건 달갑지 않아 하는.
윤석열 시대의 정치부 기자들에게는 이러한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