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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라 May 04. 2020

글 쓰면서 보고 싶은 사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좋아했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어울린다기보다는 그냥 안경을 쓴 사람이었다. 안경을 벗는 것보다는 쓰는 게 나은 사람.      


처음 사귄 남자친구는 검정색의 안경을 썼다. 눈이 날카로운 편이었는데 안경을 쓰면 그 날카로움이 조금 무마되는 듯 했다. 그 다음 남자친구도 검정색 안경을 썼다. 생각해보니 비슷한 스타일의 안경이었다. 얼굴의 반을 안경이 다 가린 느낌. 나랑 헤어지고 나서는 얇은 금속테인 안경으로 바꿨는데, 안경 때문인지 왠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가장 최근 남자친구였던 사람도 안경을 썼었다. 검정색 젠틀몬스터 안경. 헤어스타일이나 옷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친구였다. 외모가 준수한 편은 아니었지만(헤어졌으니 쓴다!) 자신과 어울리는 아이템들을 잘 매치했다. 안경도 꽤 멋졌다. 정작 나는 눈썰미가 부족한 편이라, 사귀는 동안 그 친구가 신경 많이 쓰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가 안경을 바꿨을 때에도 재빨리 알아채질 못 했다. ‘안경 바뀌었네?’라는 말을 안 하니 그가 먼저 ‘안경 바꿨어’라고 말했다. 헤어지고나서 친구들이 ‘OO이 되게 신경 많이 쓰는 사람이었잖아!’라고 말해줬다.      


안경을 썼던 남자친구들을 떠올리다보니, 나는 안경을 쓴 남자들을 좋아하는(했던) 걸까? 싶다. 근데 안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도 있고... 그저 남자들 중에서 안경을 쓰는 비율이 많았던 것 같다.


안경을 안 쓰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가끔 안경을 쓰더라도 대부분은 쓰지 않는 사람. 키스 하거나 얼굴을 맞댈 때 안경이 얼굴에 닿지 않겠다.       


사랑에 빠질 때 흔히들 ‘콩깍지가 씌었다’고 한다. 그 콩깍지를 안경으로 바꿔보면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멋져보이게 만드는 안경이 씌워지는 건 아닐까? 아? 그런 거라면 난 이미 그 안경을 쓰고 있다!      


사람에게 잘 끌린다. 그 사람만의 매력을 찾아내고, 점점 크게 부각해서 생각하고는 기어코 빠지고 만다. 선배라면 존경하고, 친구로 지낼 사이라면 더 친해지려 노력한다. 친해지기도 한다. 근데 그 상대가 이성이라면... 그에게 이성적 매력을 발견해버린다면, 흠뻑 빠져버린다. 심장이 바닥을 지나 저 지하까지 한 번 치고 나서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랄까.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문제는 그게 혼자 빠져버릴 때. 상대방에게서는 어떠한 시그널도 오지 않은 채. 그럴 땐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혼잣말로도 하고, 일기에도 쓴다. ‘보라야, 빠지지 말자, 빠지지 말자, 빠지지 말자, 그냥 일반적인 사람이야. 저 사람도 그냥 사람이야.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 편하게 대해. 편하게…….’      


그러나 이렇게 되뇌일 때는 이미 그 사람을 편하게 대하지 못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럼 나의 평소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한다. 편하게 웃을 수 없다. 그 사람 앞에서는 내가 한없이 작아진다. 주눅이 든다. 그래서 다소 노잼 캐릭터가 되고 만다.* 사람이 서로 편해야 일단 친해지고 존재를 알릴 수 있다. 끝없이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 쉽지 않다.. 아, 서른한 살에 이러고 있다. 이 안경을 쉽게 벗지 못하겠지~      


지금 마음에 있는 사람은 안경을 안 썼다. 글을 쓰면서도 보고 싶다.





*원래도 외향적이거나 엄청 웃긴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친밀감이 있는 친구들과는 카톡하면서 농담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태재 작가의 [에세이 드라이브] 4기 2번째 글_2020년 3월 23일 작성 / 글감 '안경'



구보라

보고 듣고 쓰는 걸 좋아합니다.

노트북 작업을 할 때에만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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