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와 설렜던 기억이 남겨져 있으니 그 한 귀퉁이를 글로 적어두고 싶었다
5년 전 딱 지금 이맘때였다. 3월부터 일하기 시작한 곳에서 대학생 기자단을 맡아서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첫모임인 1박 2일 오리엔테이션이 3월 21일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뒷풀이가 있었다. 넓은 공간, 막차 끊길 걱정 없는 곳에서 우리는 편하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졸업한 지 1년이 지났을 때였는데, 대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J는 40여명의 대학생 기자단 중 한 명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J가 유난히 눈에 띈 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J랑 같은 조인 친구들과 얘기를 많이 했다. J랑만 대화를 하기도 했다. 인디음악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하자 자신도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주도 클럽데이에 혼자 가서 밴드 공연을 보고 왔다고 했더니, 무슨 밴드 좋아하냐고 물어왔다. 이 밴드 음악 들어볼래? 나는 이 밴드 좋아해~ 어느 락페를 다녀왔는데 좋더라, 오? 나도 가고 싶어, 올해는 어디로 갈건데? 고민 중이야- . J는 자신이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밴드하면서 드럼을 쳤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때 살짝 오? 싶었다. 지금은 치지 않지만. 드럼을 연주하는 흉내도 냈는데, 그 모습이 조금은 멋졌다. 그렇다고 J에게 푹 빠지지는 않았다.
적극적인 건 J였다. 선톡을 보낸 것도 J. 펜타포트 락페스티벌 1차 라인업 떴다면서 예매할 거냐고 물어왔다. 글쎄, 고민이라 했더니 라인업 뜨는 거 보고, 괜찮으면 같이 예매해서 가자고도 했다. ‘우리 둘이서 락페를?’ 생각했다. 계속해서 카톡을 주고받으면서도 또 귀여웠다.
생각해보니 둘이서 따로 처음 만난 건 책 때문이었다. 4월 초 무렵 J는 대학 수업에서 필요한 책이 있는데 대학 도서관에서는 대출중이라 했다. 그래서 나보고 내가 다녔던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달라고 했다. 학교 근처에 살고 있었으니 부탁을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을 주기로 한 날, 태릉입구역에서 만났다. 만나서 책을 건넸는데, 그냥 ‘잘 가’하긴 멋쩍었다. ‘만난 김에’ 갑자기 같이 밥을 먹기로 했고, 근처 감자탕집으로 들어갔다. J 앞에서 뼈다귀를 들고 고기를 뜯었나? 젓가락으로 살코기를 발라내며 ‘아~ 손으로 들고 뜯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J에게 빠져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잘 보이고는 싶었다. 그런 마음 상태였다.
매일 카톡을 주고 받았다. J와 하는 카톡은 귀찮지 않았다.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설렜다. 아침에 일어났는지, 오늘은 무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얼 할 예정인지, 언제 잠을 잘 건지. 4월 마지막 금요일에는 함께 클럽데이에서 밴드 공연을 같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전에 한 번 또 만났다. 평소에 잘 가지 않는 곳에서 친구를 만나고 헤어졌는데 그때 시간이 9시가 채 안 됐다. 집으로 가려다가 J에게 연락했다. 시간되면 잠시 보자고. J는 그 근처에 살고 있었다. 한강을 바라보며 계단에 앉아 캔 맥주를 마셨다. 나는 1살 많은 누나랍시고 J의 대학생활 이야기를 들어줬겠지? 내 회사생활에 대해서 토로했을 수도 있다. J가 편했다. 듬직했다. 그러니 잠시 보자고 연락도 할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에게는 카톡조차 못 하는 나니까.
공연을 보는 날, 홍대로 가면서도 J가 날 좋아한다는 생각은 잘 안 했다. 안 하려 노력했다.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J같은 남자인 동생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지 않겠냐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일로서 만나는 사람인데, 지레짐작으로 ‘나 좋아하지?’라는 태도를 보였다가 ‘아닌데?’하면 얼마나 쪽팔릴까 싶었다. J의 마음을 못 알아채는 것처럼 굴었다.
어떤 팀의 공연을 보든, 같이 즐거워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볼 맛이 났다. 남자친구와는 이렇게 같이 즐긴 적이 거의 없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공연을 보고나서 셋이서 사진을 함께 찍었다. 그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라 반겨주었다. 그는 사진을 찍고 나서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에요~?” 정말 둘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 하는 뉘앙스였다. 나는 굉장히 빨리 대답했다. “음악 친구요!”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였다.
늦은 시간까지 공연을 보고, 무언가를 먹으러 갔다. 술도 한 잔씩 기울였다. J는 술을 꽤나 잘 마셨고, 대화는 재밌었다. 그때도 뭐 그저 친해지는 사이 정도였다. 귀여운 동생과 함께하는 술자리. 2차에서도 이야기하다보니 밤을 샜다. 첫차를 기다리며 24시간 카페를 갔다. 지하철 타러 밖으로 나오자 햇살이 쏟아졌다. 걷고 있을 때 J가 말했다.
“나랑... 연애할래?”
오, 너가 좋다거나 사귀자거나 만나고 싶다 이런 단어가 아니라 “연애할래?”라니. 연애할래! 지금 생각해도 간질간질한 단어다. 안 지 한 달 된 J에게 나는, 별다른 고민없이 “그래”라고 답했다. J와 손을 맞잡았다. 손에 땀이 났다.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홍대역까지 걸어가던 그때가 꿈같았다. 밤도 샜고, 연애라니 몽롱했다. 정신을 못 차렸는지 내릴 역을 놓치고 6호선 끝인 봉화산역에서 내렸다. 집에 가니 아침이었다.
중저음이 매력적이었던 J. 그와 전화하는 시간이 좋았다. 목소리를 한없이 듣고 싶었다.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J가 많이 들어주는 편이었다.) 대학생 때는 하지 못 했던 ‘풋풋한 연애’를 그제야 하는 것 같았다. J와는 3년 정도를 만났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권태로운 시간도 있었지만 정이 쌓였다. 이제껏 가장 오래 만난 사람이었다. 그사이 나는 J를 만났던 직장을 떠나 새로운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J는 문예창작에서 기계공학으로 전과를 했다. 서로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했다.
“이제 연애하는 게 지쳤다”. 헤어지는 날 J가 내게 한 말이다. “나랑 연애할래?”라는 말로 시작하더니 연애가 지쳤다고 끝을 냈다. 시작도 끝도 모두 J가 했다. 차에 타자마자 헤어짐을 고했고, 굳이 데려다줬다. 20분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을까? 진짜 끝인가. 집에 도착하지 않기를 바랐다.
- J 너가 내 제일 친한 친구인데, 너랑 헤어지면 어떡해...
- 나도 그래. 보라 너만큼 날 잘 아는 사람이 없잖아. 친구들한테 내 얘기를 다 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래도 살아질 거야.
와, 매정한 사람. 잘 웃던 J는 어디로 가고 차가운 J만 남아 있었다. 헤어지고 울기는 울었을까. 한 번쯤은 울었기를. J 말대로 살아지기는 했다.
헤어졌지만, 그래도 사귀기 전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좀 귀엽다. 락페를 핑계로 먼저 연락 온 것도. 밤에 카톡을 하다가 내가 잘 자~라고 하면 답을 하지 않은 것도. 사귀고 나서 들은 이야기. 답을 해버리면 다음 날 대화를 새롭게 이어가야하니까 일부러 그 카톡은 안 봤다고 한다. ‘잘 시간이네. 잘 자’라는 말이 미웠단 말을 들으며 재밌었다. 무엇보다도 J는 음악 친구란 단어가 충격이었다고 했다. ‘나를 친구로만 생각하는 구나’ 싶어서 마음이 조금해졌다는데, 그랬으니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겠지.
추억이다. J는 잊었을 수도 있지만. 내겐 J와 설렜던 기억이 남겨져 있으니 그 한 귀퉁이를 글로 적어두고 싶었다.
구보라
2주 연속 연애 이야기를 쓰네요.
남의 연애 얘기 재미없는데...
다음엔 다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에세이 드라이브] 4기 3번째 글_2020년 3월 30일 작성 / 글감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