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문학동네, 2015
장강명 작가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작가 TOP5 안에 드는 작가다. 장강명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5년 전, <표백>이라는 작품이었다. 읽은 지가 5년 정도 지나서 기억이 다 나지는 않지만, 굉장히 어두웠고, 흡입력이 강해서... 한번 이 책을 잡고 바로 새벽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장강명 작가는 대체 누구지? 하면서 엄청나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에 읽은 소설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장강명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장강명 작가에 대해 소개하자면, 그는 일반적인(?) 루트로 소설가가 되지는 않았다. 공대를 졸업하고는 기자를 준비했다. 그러나 시험에 계속 떨어져서 일단 건설회사에 들어갔고, 그 뒤로 다시 그만두고 기자 시험을 봤다. 동아일보에 입사해 11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2011년에는 장편소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이후로도 다양한 장편과 단편소설, 에세이를 발표하고 있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그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도티끌 작가님과 진행 중인 팟캐스트 ‘보끌보끌’에서 지난주에 이야기 나누기도 했었다. (▷보끌보끌 [6회]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http://www.podbbang.com/ch/1775150?e=23511000)
▪ <그믐> 소개
주요 인물이 세 명이이다. 남자, 여자 그리고 나이든 아주머니. 이들에게는 이름은 없다. 여자는 예전엔 ‘보람’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개명했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생 때 일진한테 괴롭힘을 당해서, 그 일진을 칼로 찔러 죽인 뒤에 감옥에 가는 남자, 그 남자가 감옥에 갔다가 출소하고, 정신병원 갔다 나와서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된다. <우주 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한다. 그 남자가 찔러 죽인 아이의 어머니. 그는 남자가 교도소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우리 아이가 일진이 아니었다고, 그 남자의 입으로 듣고 싶어한다. 그 어머니와 일진 사이에, 그 남자와 고등학생 때 살짝 좋아하던 여자아이. 학습만화를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고, 남자가 소설을 투고한 출판사에 다닌다. 학습만화 담당이지만 그 출판사에 다녔기에 이 소설을 볼 수 있고,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장강명 작가의 말에 따르면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다가 파국에 이르는 이야기’다.
▪ <그믐> 의 주요 인물인 남자 그리고 우주알...
좀 더 차근차근 설명해보면, 먼저 남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고등학생 때 남자는 다소 조용한 성격에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다. 그 남자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였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내용이 뭐냐고? 말 안 해?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이렇게 학생 소지품을 마음대로 뒤져 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남자아이가 말했다.
뭐?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이렇게 학생 소지품을 마음대로 뒤지는 건 인권침해라고요.
교실이 얼어붙었다. (59)
남자아이는 정말 단호하다. 이 선생은 애들을 마구 패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에게 팩트를 그대로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일인데, 남자는 그런 걸 감수하는 사람인 것이었다. 이번에 이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굉장히 소름이 돋았다. 너무 단호해! 멋져!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 남자가 살인을 저지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자신을 괴롭히던 영훈이라는 학생을 살해한다.(살해당하는 아이의 이름만 이 책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교도소에 9년 동안 들어갔다 나온다. 이후엔 정신병원도 다녀와야했기에 10여년의 세월이 지나버린다.
살인을 저지른 후 세상으로 나온 남자에게 「우주 알」이란 신비로운 존재가 들어옵니다. 남자는 우주 알이 들어 온 이후 말을 회복하고,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닌, 앞뒤의 개념이 없는 시간 감각을 갖게 된다고 책에서 설명합니다. 한참 뒤에 다시 여자를 남자가, 여자한테 우주 알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비유하자면, 아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과 비슷해. 이미 내용은 다 알고, 그걸 바꿀 수도 없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매번 읽을 때마다, 중요한 대목에서 새로운 감흥을 느낄 수 있잖아. 주인공이 나중에 행복해진다는 걸 알아도 슬퍼질 수도 있고, 사건 진행 속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있지.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는 거니까. 중간에 멈출 수도 있고, 어떤 페이지를 읽다가 다른 페이지로 건너뛸 수도 있고, 앞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17)"
이번이 그믐 세 번째 읽는 건데. 처음 읽을 땐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는 못 했던 것 같다. 서사를 빨리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두 번째 읽을 때도... 그다지. 이번에야 이 개념을 제대로 깊이있게 이해해보려고 하니 더 뭔가 어렵기도 하고 애틋하게 다가왔다. 아, 갑자기 우주알이라는 개념이 나오니까 뭐야, 판타지야?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장강명 작가하면은 <한국이 싫어서>, <표백>처럼 사회적 현상을 짚어내는 작품이 잘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장강명 작가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환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이야기는 제가 추구하는 지점이에요.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같은 테마를 반복해 쓰면서 ‘쓸 게 없어서 이걸 쓰는 건가’ 하는 느낌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얘기를 제가 좋아하고,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데요. 한편으로는 주제가 명확한, 엄청 현실적인 얘기도 쓰고 싶어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카테고리가 여럿인 거죠. 몽환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몽환적인 얘기일수록 굉장히 현실적인 점이 있어야 몽환성이, 환상성이 더 강조된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이 인터뷰를 읽고, 장강명 작가의 이 작품에 대해서 더 공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환상적 요소와 현실적 요소의 결합이랄까.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요소들이다.
▪ 좋아하는 장면 -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고등학생 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운동장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을 이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
-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자 아이는 상대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걸 알아차렸다. 조금 용기가 났다. 남자아이는 여전히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
이거 턱걸이, 너 키 크려고 하는 거야?
남자아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야 씨발, 왜 보자마자 시비 터냐? 완전 얼척없다.
철봉에서 내려온 남자아이의 키는 여자아이와 비슷했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대화를 영 잘못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29)
지난해 가을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보러갔다. 연극을 보러가기 전 <그믐>을 짧게 훑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기에) 그때 이 장면도 봤는데, 연극 초반에 이 장면이 바로 나왔다. 보는 게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나 이 장면 기억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도 좋았다. 심리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흘끔 보는 걸 느낀 여자아이는 자신을 본다는 걸 느끼고 용기를 냈다.. 근데 영 말을 잘못 꺼내버린 것...! 이때 남자아이의 표현이 상당히 과격하다. ‘야 씨발’ 이라니 ㅋㅋㅋㅋㅋ 얼척없다,는 말투도 뭔가 귀엽다. 왜냐면 장강명 작가님이 이 글을 쓰면서 소리내서 읽어봤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상황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데...
- 아, 미안. 나는 그게 아니라......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여자아이가 말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남자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철봉에 매달렸다. 남자아이가 턱걸이를 하는 동안 여자아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운동장이 쓸쓸했다.
난감한 상황에서 여자아이의 마음이 쓸쓸한 건데 운동장이 쓸쓸하다는 표현을 보며 감탄했다. 여자 아이는 ‘너 이번에 교지에 원고 보냈지?’ 라면서 다시 말을 건다. 그리고 남자아이와 책 취향이 통해서 책 이야기를 신나게 한다!
-너 이번에 교지에 원고 보냈지? ‘그믐’. 그거 읽었어.
남자아이가 턱걸이를 하다 말고 여자아이에게 흘깃 눈길을 던졌다.
되게 재밌더라. 나말고 다른 애들도 다 재밌다고 했어.
여기부터의 대화가 정말 압권이다!
서로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가 마치 탁구처럼 핑퐁핑퐁 이어진다.
(그러다가 여자아이가 모르는 책 이야기를 남자아이가 시작하는데, 여자아이는 다시 시무룩 모드로 돌입한다.)
운동장 장면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동아리실에서 남자아이가 교지 원고를 읽는 장면이다.
서로를 알아봐준다는 것. 나는 이런 점에 굉장히 감동하는 편이다.
-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원고를 읽었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가 교정지를 읽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남자아이의 턱선이 예뻤다. 남자아이는 아저씨 같지 않아 좋았다. 남자아이가 글에 푹 빠진 것처럼 보여서 여자아이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저 소설이 혹시 나만 지루했던건가? 그러다 남자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자기를 쳐다보는 바람에 여자아이는 화들짝 놀랐다.
(중략)
다 읽었어. 남자아이가 말했다.
어땠어?
네가 쓴 수련회 후기가 제일 재미있었어. 후기 같지 않고 소설 같았어. 애들 대사도 생동감 있고. 갈 때랑 올 때 버스 분위기가 확 달라서 재미있었어. 그리고 버스 분위기만으로도 수련회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 수련회 내용은 일부러 뺀 거지?
남자아이가 그런 의도를 알아줘서 여자아이는 기분이 좋았다. (92)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이런 사이였다. 다른 친구들과 잘 소통되는, 그런 '인싸'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서로는 서로를 알아봐주었다. 각자가 지닌 매력과 사랑스러움들을. 재능을,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들을.
그러나 남자아이가 영훈이를 살해한 이후로,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된다.
▪남자가 행복해지길 원치 않는 사람
남자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자신의 아들은 그를 괴롭힌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줌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본다면, 그는 자신이 남자를 다 용서했다고,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하는데... 말과 행동은 전혀 다르다. 그의 삶을 훼방놓는다. 사는 곳에 찾아가서는 주인들한테 그가 살인전과자임을 알려서 쫓겨나도록 하고... 끝없이 남자는 이사를 다녀야 한다. 이사 간 곳을 숨겨도 그 아줌마는 기필코 찾아낸다. 그래서 이번에 읽을 때도 이 아줌마에게는 마음이 잘 가지 않았다. 물론 고등학생이었던 자식을 잃는 슬픔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자식을 잃어본 적은 없지만, 내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이른 나이에, 아직 부모가 있을 법한 나이인 서른에 어머니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기에 어렴풋하게나마 그 슬픔을 이해해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후 계속 그 슬픔에 매몰되어있다면, 살아있는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왜곡시켜가면서까지...? 그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원치 않은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아줌마 캐릭터는 안타깝다.
아줌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바로 [카레를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 아까 카레 있잖아요.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영훈이는 카레 싫어했어요.
영훈이가 카레를 싫어했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학교에서 점심으로 카레가 나왔을 때 그걸 바닥에 버리고 저더러 핥아먹으라고 했어요. 자기는 집에서 카레를 너무 많이 먹어서, 카레만 보면 토가 나온다고. 이제 기억이 나네요.
아, 어떻게 하지? 홍대 갈까? 미친놈아,
영훈이가...... 좀 짓궂은 데가 있었어. 아주머니가 말했다. 남자애들끼리는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지 않니. (138)
자신이 기억하는 자식은 카레를 좋아했는데, 다른 아이의 입에서는 다른 사실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사람. 아줌마는 아마도 그 말을 가뿐히 귓등으로 흘려버릴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자식이 ‘일진’, ‘학교폭력’에 엮여있다는 숱한 사실들도 흘려버리고 기억에서 삭제시켰던 것처럼.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부분이, 굳이 지나가는 남자애들의 말을 소설에 끼워넣은 점이었다. 남자애들은 그렇게 ‘미친놈아’ 이런 거친 말 쓰면서, 마치 이 아주머니가 ‘짖궂은 데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살아간다고, 그러니까 영훈이도 그 정도의 짖궂음뿐이었다고 뒷받침하는 문장같았다.
* 이후부터는 이 책의 결말도 언급합니다. 혹시 결말을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여기서 스크롤을 멈춰주세요-
▪남자를 과거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여자
여자는 남자를 지켜주고 싶었다.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재만 보는 사람이 더 유리할 때도 있어. 여자가 말했다. 과거를 잊을 수 있으니까. 과거를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널 지켜줄게. 과거로부터, 너를, 지켜줄게.’
과거를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은 굉장히 역설적이면서도 와닿는다. 모든 과거를 다 기억할 수 있고, 남자처럼 다시 반복까지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과거는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와 행복하길 바랐다. 안타깝지만 결국에 이 아줌마는 남자를 칼로 찌른다. 근데 이게 사실상 자살... 남자는 아줌마가 자신을 찌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피하지 않았으니까요. 찔러보세요, 라고 한다. 그 아주머니에 의해 살해될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남자는 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살인자가 될 그녀를 구하기 위한 길을 선택한다. 남자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사람들을 살아가게 할 거짓말을 마련해두는 것인 이 부분에서는 ‘굳이’ 그렇게 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굳이'였지만, 아줌마에게는 전 생을 통틀어 아들이 살아돌아오길 바라는 것 다음으로 가장 필요하고 원하는 일이긴 했을 것이다.)
▪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이 나온다.
- 너는 <모나리자> 같은 존재였어. 이 미술관에서 꼭 보아야 하는 그림. 우주 알이 내 몸에 들어왔을 때,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갔어. 나는 복권과 경마로 부자가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런다면 네 곁에 머물 수 없었지. 그런 인생은 <모나리자>에서 매표소나 카페테리아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
고마워. 너랑 지내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 우주 알을 받아들인 보람이 있었어. (143)
-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그러고 나서 남자는 화면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148)
책 뒷표지에 이 문장이 적혀 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근데 사실 이 말은 남자가 여자에게 직접적을 한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야 그걸 깨달았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더 아파왔다. 전하고 싶었는데 전해지지 않았던 말. 부디, 남자가 직접 말하지 않았더라도 여자는 알았기를 바라며 읽었다.
여자의 말도 남자에게 전해지지 못 한 건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죽고 나서. 여자는 남자가 안치된 추모공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 추모공원에 있는 전광판에 문자를 보낸다.
-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152)
남자가 정말 우주알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또다시 이 일을 겪고, 여자를 또 만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여자에게는 인생이 단 한 번뿐이다. 이렇게 헤어지면 정말로 끝인 것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도, 미래로 건너뛸 수도 없다. 여자는 일직선인 인생에서 자신이 만난 남자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라고 되뇌이면서... 그런 그녀가 부디 남은 생은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기를. 그녀의 말대로 과거를 잊음으로써,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여자는 땅에 붙어서 개미보다 작은 크기로 꾸물거리는 사람들과 도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 그리고 멈춰버린 듯한 강물을 보다가 문득 자신의 소원을 깨달았다.
훨훨 날아가고 싶어. 나의 시간을 살고 싶어.
자유로워지고 싶어.(161)
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 중 일부인데 인상적이다. ‘나의 시간을 산다’는 건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여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 팟캐스트를 녹음하면서 티끌님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는 장면이라고 했다.
140페이지. 나는 그 페이지에서 '해가 뜨기 전에 사라져'라는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다.
그믐에 대한 대화가 있는데, 이 장면에 대해서는 아직 무어라 더 이야기 쓰기가 쉽지가 않다. 이 작품의 제목이 등장하는, 핵심이기도 한 장면인데... 지금 다시 읽어봐도 어렵다. 그렇다면 남자는 그믐같은 존재였던 걸까? 이 장면은 다음에 다시 꼭, 이야기해보고 싶다.
▪ <그믐>에 대해서 - 장강명 작가 인터뷰를 보며 알게된 것들
1.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정된 형태로 진행되는 운명. 그 운명 앞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어린 남녀’ 같은 설정이요. 이 소설은 결국 연애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기도 했습니다." (2015년 [알라딘]과의 인터뷰 중에서)
이 인터뷰를 읽으며, 맞아! 맞아! 끄덕였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고,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결국은 연애소설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다시 겪을만큼, 사랑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이번 생에서 만나서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그리고 들었던 생각. "우리 장강명 작가님이 이렇게 독특하면서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그런, 연애소설도 쓴답니다!"하고 마구마구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그믐> 이 작품만큼 오묘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 없다고 생각한다.
1. <수상작가 인터뷰> 중에서
“<그믐>은 내가 평소에 쓰려고 했던 종류의 소설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믐>의 성취가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쓰면서 나는 즐거웠습니다.”
이에 대해 인터뷰했던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그가 <그믐>의 성취에 대해 스스로 과소평가했다면 나는 그의 안목에 대해 신뢰하기 어려웠을텐데, 그는 양쪽 작업을 자각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믿음직한 작가 같으니라고.”라고 평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성취가 가장 높았다고 생각했다, 즐거웠다. 장강명 작가의 말을 다시금 곱씹으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그가 또다시 <그믐> 같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원래 스타일에서 변주를 해가면서 끝없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길 바란다. (이미 왕성하게 작품 활동하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