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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미 May 03. 2020

상상적 가부장 되기, 윤성현 영화의 운동성

<파수꾼>을 거쳐 <사냥의 시간>을 중심으로

한국아카데미 출신인 윤성현 감독의 첫 장편 영화 <파수꾼>(2011).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수상했다.

윤성현 감독의 전작 <파수꾼>은 초입부터 실패가 예감된 이야기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가 쫓는 무리는 얼마간 유대 관계를 유지하지만, 결국 그들의 관계는 실패할 것이란 예감을 카메라는 담아냈다. <파수꾼>은 기태(이제훈)가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채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가 떠돌이처럼 친구들 사이를 오가며 기태가 놓여있던 관계성을 밝히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친구들 사이에 부모의 개입이 시작됐다는 건 이미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보게 되리라 짐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태가 실제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걸 알게 된다. 윤성현 감독의 영화에서는 늘 리더격인 단독자가 있다. 이 단독자와 여러 캐릭터 사이에 실패하고야 말 관계망을 촘촘하고 복잡하게 엮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윤성현 감독의 영화적 세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0년 전 윤성현의 전작 <파수꾼>을 두고 “리얼하다”고 관객과 평단이 호평했던 건 캐릭터 간의 관계성과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사들 때문이었지, 영화의 배경이나 의상 따위가 아니었다. 윤성현 감독의 리얼리즘은 요컨대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성과 대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냥의 시간>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도 결국 실패한 남성 서사를 살펴보는 과정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 위기 이후 근미래로 보이는 한국. 3년 만에 출소한 준석(이제훈)은 디스토피아가 돼버린 한국에서 가치가 떨어진 한화 대신 달러가 유일한 화폐로 기능하며, 총기를 소유할 수 있게 된 풍경을 두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정치와 경제가 완전히 실패해버린 곳에서 준석은 큰 건을 해서 한국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기훈(최우식)과 장호(안재홍), 상수(박정민)를 모아 달러가 오가는 카지노장을 터는 것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 그의 친구들은 준석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데 죄책감을 느끼고 계획에 동참한다. 카지노 털이 계획은 잠시 성공하는 듯했으나 준석 무리를 쫓는 킬러인 한(박해수)이 등장해 그들을 쫓으며 이야기는 급반전한다. 영화는 범죄를 모의하는 하이스트 무비에서 스릴러로 장르를 바꾸고 쫓고 쫓기는 지옥의 풍경을 보여준다.


<파수꾼> 이후 10년만에 내놓은 상업 장편 영화 <사냥의 시간>. 배우 이제훈과 박정민이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의기투합했다.

누구도 그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지만 준석은 친구들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 이는 전작 <파수꾼>에서도 익히 보아온 윤성현 영화의 운동성이며 이내 실패로 귀결된다. 요컨대 ‘상상적 가부장 되기’라는 윤성현 영화의 운동성은 늘 미끄러지거나 실패에 그친다. 준석 자신도 이런 실패의 예감을 잘 알고 있어서 불안해하며 예민한 상태로 유사 가족 구성원에게 자신의 가치를 호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사냥의 시간>에서 흥미로운 점은 기실 영화의 긴장감이 킬러인 한으로 인해서 발생한다기보다, 친구들이 준석의 계획에 함께할 것인가, 계획의 중간에 준석을 져버릴 것인가에서 온다는 것이다. 준석의 혼자된 감각은 추격만큼이나 두려운 것으로 감지되며, 도망이 실패하고 한이 다시 기회를 줄 때마다 준석이 혼자될 수 있다는 불안은 강박적으로 커져만 간다. 준석은 자신처럼 믿고 의지할 가족이 없어서 완벽히 자신의 편처럼 보이는 장호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도하기 위해서 이름을 자주 부른다.


<사냥의 시간>은 과시적인 스타일과 앰비언스를 극대화한 음향에서 오는 영화적 경험보다, <파수꾼>의 연장으로 보여지는 ‘무모한 남성 리더’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과정에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상적 가부장인 준석의 무용함을 반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준석은 자주 환상 속에서 위험한 미래를 예행 연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환상 속에서 준석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 짓는 누빔점이 생성되고, 또다시 무력한 다음 시도로 이어지면서 영화는 흥미로운 운동성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모더니스트 홍상수가 연애를 주제로 이런 누빔점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성현 감독은 남성 리더와 호모소셜한 세계를 주제로 이런 시도를 계속한다. 서사를 새로운(실패의) 의미로 고쳐 쓰면서 매끈하게 진행되기를 멈춰 세우는 윤성현 영화의 누빔점은 혹자에게는 유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임에는 분명하다. 준석이 자신의 무용함을 상상 속에서 반복해서 보듯이 <파수꾼>에서 동윤(서준영)과 희준(박정민)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기태는 자유롭게 오가며 실패의 예감을 전달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준석(혹은 기태)이 군림하지 않고 욕심을 내려놓으면 모든 영화의 갈등은 해결될 듯 보이며 그래서 상상적 가부장은 오히려 제거되어도 좋을 대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덧1. 최근에 오랜 친구이자 대학 동기인 모 영화블로거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가 얼마나 <파수꾼>에 열광했는가에 대한 대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젊은 감독과 배우들이 등장한 것에 열광했던 것 같고, 그가 만들어낼 앞으로의 영화를 우리는 좀 더 주의 깊게 보고자 했습니다.(그러고는 10년이 흘렀네요) <파수꾼>은 기성의 선생님들이 그 정도로 지지하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좀 더 열렬히 좋아했던 작품인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영화적 성취보다도 윤성현 감독의 시도가 영화 이론 공부를 갓 시작하는 우리들의 무드와 주파수가 맞았다고나 할까요.


덧2. 배우 이제훈과 박정민이 영화를 시작하는 첫 마음이 떠오르는 영화가 <파수꾼>이라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밝혔는데, 저 또한 그랬습니다. 누가 이끌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파수꾼>을 보기 위해서 신입생들이 모여 광화문 스폰지하우스를 찾은 적 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영화잡지로 이직해서 처음 쓴 기사가 그들이 다시 뭉친 <사냥의 시간>에 대한 기사였는데 홀로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기자회견 현장을 정리하는 짧은 기사였는데 기분이 매우 묘했던 것 같습니다.


덧3. <사냥의 시간>이 겪은 사건은 참으로 길고 지난했습니다. 감독의 고집으로 길어졌다는 편집과 코로나19로 인한 극장 개봉 포기, 넷플릭스 행, 그리고 넷플릭스 행을 막는 법적 분쟁 등. 일련의 과정들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관객을 지치게 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다소 나빴던 베를린발 외신 리뷰들에 <사냥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을 많이 낮췄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공개되자마자 보고 나서는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외신 평이 너무 박한 게 아니었나 싶었네요.(어떤 리뷰는 한국 남성 배우진을 두고 “보이밴드 같은 얘네를 왜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동료들과는 영화다운 영화를 오랜만에 봤기 때문에 <사냥의 시간>이 재밌게 다가오는 건지 영화 자체가 괜찮은 건지 분간이 안 된다는 농담도 했습니다. 윤성현 감독의 영화는 기묘하게도 '신예의 등장'과 '코로나19로 인한 넷플릭스행'처럼 영화 단독으로 평가받기보다 시대적 사건으로서 기능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자체를 맨눈으로 보기 어려운 상태라고나 할까요. 이는 물론 영화라는 것이 사회와 밀접하고, 사람이 행하는 예술 활동이기 때문이겠죠. 그의 다음 작품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땐 부디 영화만을 담담하게 볼 수 있는 무탈한 상태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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