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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함을 머금은 채로

4. 27 /「32살 앞 30날」

by 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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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앞 30날」

살면서 잠시나마, 근심과 걱정이 적었던 시기가 떠오르는데 그게 20~21살 그리고 27살 무렵이다. 큰 걱정거리는 집이었다. 그러니까, 가족. 사춘기 때는 급 안 좋아진 집안 사정이 상당히 큰 걱정거리였다. 삶의 기본이 흔들리는 그 느낌. 아는 사람은 아는 그 느낌.


친구 관계나 성적 이런 건 근심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런 건 그냥 알아서, 잘 해야만 했다. 집안 사정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건 어느 정도 노력해볼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나의 근심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말을 해서 무엇하리~’ 하는 편이었다. 상황 자체도 답답했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집안 사정이 나아졌다. 다시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그 때가 20살이었다. 집안 사정이 인생의 가장 큰 근심이었는데, 그 걱정을 안 해도 되니 마음 편하게 대학교 1학년, 2학년을 보냈다. 사춘기 내내 삶의 걱정거리들에 억눌려있던 걸 풀기라도 하듯이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이곳저곳 다녔고, 사람들과 어울렸고, 술을 마셨고, 밤을 샜고, 영화를 잔뜩 봤다.


그 삶이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대학교 3학년 3월, 엄마가 암 초기 판정을 받았다. 치료를 하는 엄마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고픈 대로만 지내던 삶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달라진 생활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답답함을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책감이 심하게 들었다. 고향에 있으면서도, 문득,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면서 지냈나? 너무 정신없이 놀았나?’ 자책했다. 1년이 지났다. 다행히 엄마의 치료는 끝났고, 나는 복학했다. 대학교 3학년, 23살. ‘집안 사정’과 ‘엄마의 건강’에 대한 근심 거리가 짓눌렀다. 졸업하기 전 취업 해서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혼자라서 보탬이 되어야만 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때와는 달리, 내가 집안 경제 사정을 위해 나서볼 수 있었다. 특유의 과 분위기상 취업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고민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로웠고, 외롭고도 절박한 마음으로,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치열하게 학교 생활을 했고, 스펙을 준비했고, 졸업 했다. 1년 정도는 인턴도 하면서 취업을 준비했다.


내가 ‘1~2학년 때처럼’ 조금이라도 정신을 못 차리고 놀아버리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지고, 더 큰 불행이 찾아올 것 같았다. 3~4년을 스스로를 다그치듯 살았다. 지금 생각해도 삶이 팍팍~했던 시기다.


2.

27살. 사회생활 맛보기 같았던, 두 번의 계약직 생활 이후 첫 정규직이 되었던 나이다. 취업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컸다. 삶의 한 단계를 거쳤다는 느낌? 이때 난 삶의 큰 근심에서 조금 해방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 집의 상황은, 예전만큼 부모님 식당이 잘 되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유지를 하고 있었고, 치료를 끝낸 지 몇 년이 넘은 시점이었던 엄마는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왔다. 물론, 걱정을 하려면 할 수는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단은 괜찮았다. 그러니 조금 그 걱정을 내려놓았다.


집 걱정을 조금 하지 않고 지냈던 시기가 27살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앞서, 이렇게나 길게 글을 썼다.

일이나 일상, 연애도 괜찮았다. 일 하면서 보람과 재미도 느꼈다.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고정적으로 월급도 나왔고, 인센티브도 받으면서 직장인으로서의 삶도 즐겼다. 하고 싶어 하던 방송사 PD에 대한 생각도 한켠으로 밀어두었다. 취업을 했는데, 뭘 굳이 꼭, PD가 되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무언가가 되지 못 한 나’가 아니라, 일단은 지금의 나에 만족했다. 만족하고 싶었다.


시간적 여유가 많진 않았어도, 이곳저곳 꽤나 많이 다녔다. 가까운 곳이든, 조금 먼 곳이든 국내 여행도 사부작사부작 다녔다. 입사일이 1월 6일이었는데 그 직전에 엄마랑 제주 여행을 며칠 다녀왔다. 어른이 되고 엄마랑 단 둘이서 여행을 간 건 그때가 처음이기도 했다. 봄엔 출장으로 좋아하는 전주 영화제도 갔고, 여름과 가을엔 휴가 내고 제천국제다큐영화제와 부산 영화제도 다녀왔다. 대학 때 매년 가던 영화제였지만 취준하면서 가지 못 했었기에 몇 년 만이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차에, 연애 2년 차. 취업을 했다는 상황과 사람이 주는 안정감이 무척이나 컸다. 연애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설렘, 즐거움, 편안함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2년 차에 접어들었었다. 연애 기간도, 연애하며 느낄 수 있던 마음의 안정도, 그런 연애는 처음이기도 했다. 덕분에 원하던 목표치를 다 이루었다거나, ‘내가 정말 원하던 삶이야!’ 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솔직히 어느 정도는 삶이 좀 즐겁기도 했다. 그래서 즐겼다.

이렇게 27살의 나는 현실에 안주하며 즐거움을 찾았다. 조금은(?) 안온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충분히 즐기며 지냈어도 되었다고 생각하긴 한다. 계속 팍팍하게만 살 수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 즐거움이 컸던 시기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27살 늦은 가을, 엄마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다행히도 한 고비는 넘겼지만 이후로는 삶의 즐거움 지수가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었다. 걱정거리들이 다시 찾아왔다. 마침 그 시기에, 회사의 좋은 선배들이 다 떠났고, 편집국장도 없는 자리에서 고작 1년도 안 된 우리가 갈리듯이 일을 해야했다. 집안 사정만으로도 마음이 고된데 회사까지 괴롭혔다. 아, 연애도 예전처럼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남자친구는 대학교 졸업반을 앞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삶의 고민이 많아졌다. 그런 그에게 나의 고민까지 얹어서 이야기하려니 쉽지만은 않았고 서로의 삶이 버거울 때 힘이 되어줄 여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바로 헤어진 건 아니고 1년은 더 사귀었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관계는 그때부터 서서히 식어간 기분이랄까. 삶이란... (먼산)


3.

27살 때 사진들을 보면, 웃고 있는 모습이 많다. 올해에 찍힌 사진들도 보면, 웃고 있는 사진들이 많지만, 이때의 웃음과는 또 다른 것 같다. 그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고, 요즘의 내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과거의 나를 반추(?)하다 보니, 이때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립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는 않는다. ‘저때 안주하지 말고 이직을 준비했더라면’, ‘조금 덜 다니고 글쓰고 책을 읽었다면’ 이런 생각이 잠깐씩은 든다. 그렇지만. 즐길 수 있을 때 즐겼던 27살이 있었기에, 에너지가 비축되었거나 반대로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더 커지기도 했다. 즐기는 동안 내 안의 무언가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 강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다음 해에는 나만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강해져서 글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2년 후에는 거의 읽지 않았던 책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퇴사를 하고 재취업을 준비하기도 했다.


즐거움, 갈증, 비어버림 그리고 찾아오는 채움, 힘듦과 견딤.


걱정거리가 가득했든, 조금은 없었든, 그 시절들을 통과하며 살아낸 결과가 지금의 나. 그래서 지금의 내 모습이 27살 때보다 좋다. 나에게는 지금도, 앞으로도 걱정거리는 있겠지만 그때마다 느낄 수 있는 즐거움도 온전히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팍팍하지 않게, 조금은 촉촉함을 머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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