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2 / 아르바이트
2년 전, 12월. 퇴사하고 다시 취업을 준비한 지 3개월에 접어들 때였다. 공고가 뜬 곳은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봄에 뜰 공채를 기다리며 스터디를 하고, 혼자 공부를 하는 시기였다. 회사 다니며 모아둔 돈 그리고 퇴직금 등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때만큼의 씀씀이는 아니었지만, 아끼려 해도, 자취생으로서 기본적으로 나가는 돈들도 꽤 있었다. 아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더라면 마음이 덜 바빴을텐데. 그래서 공부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다행히도 아르바이트할 자리가 생겼다. 12월 22일부터. 주말마다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했다. 원음방송 라디오국에서 재난방송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조금 설명이 길어지지만 적자면, 기상청에서 재난방송 안내가 왔을 때, 방송사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안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주말은, 특히나 이른 아침 시간대는 주로 녹음 방송이 나오는 때라, 직원들이 근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처럼 재난방송 멘트를 하기 위해 대기하는(?) 아르바이트를 아침 7시부터 12시까지 5시간 고용했다. 12시부터는 당직 근무로 직원들이 나왔다.
사실, ‘꿀알바’였다. 주말이라서 시급도 1.5배. 8시간 정도 일해야 받을 돈을 5시간만에 받았으니깐.
다만, 힘들었던 건 ‘말을 하는 것’. ‘더 많이 말하고 싶다’라는 브런치 글에서도 한 번 썼던 이야기인데, 나는 정말 말하는 걸 두려워하는 타입이었다. 이때도 역시나 그랬다. 대중들이 내 앞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라디오로 생중계 되는 것이었으니 떨렸다.
지금은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편인데, 그때는... 정말 지나치게 긴장을 했다.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기상청에서 재난 안내를 보내면 갑자기 경보가 올리고, 알림창이 뜬다. 그러면 확인했음을 표시하고, 거기에 적힌 멘트를 인쇄해서 옆 방으로 향한다. 가면 방송 기사님한테 이야기 드리고, 녹음 방송에서 노래가 나오는 부분 등 틈 사이에 바로 멘트를 해야 한다. 길어야 30초에서 40초 남짓. 솔직히 나의 재난 정보 안내 멘트를 귀기울여 듣는 이가 있지는 않았을텐데도... ‘실수할까봐’ 겁이 났다. 발음을 틀리고 정보를 잘못 말할까봐.
적막한 넓은 방(각종 CD들도 가득찬) 안에 혼자 있으면서, 5시간 동안 긴장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어떤 주말은 재난 경보가 단 한 번도 안 울리는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하루에 1, 2번 울리는 때도 있었다. 제발 한파가 심하지 않길, 부디 건조함도 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지만, 겨울이다보니 아무래도 한파 경보와 건조 경보가 가장 많았다.
처음 방송을 했던 날, 멘트를 하고 부스를 나오니, 기사님이 “목소리를 크게 하라”고 했다. 더 떨렸다. ‘다음에는 목소리를 크게... 크게... 정확하게’, 마음 속으로 여러번 되뇌어보곤 했다.
대기하면서 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CD에 있는 대표곡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이었다. 요즘 시대에 CD 음악을 옮겨야 한다니? 싶었지만 그게 해야하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장르의 CD도 있어서 신보를 발견할 땐 기뻤는데, 그 곡을 입력하려면 하나씩 다 틀어서 들어야 했다. 노래를 들으면서 스트레칭도 하고~ 바깥 풍경도 봤다. 그래도 마음은 늘 불안했다. 경보가 뜰까봐! 혼자서 계속 그 안내 멘트를 연습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편안-하게 말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긴장했을까, 과거의 나이지만 참... 과거의 나에게 뭔가 전할 수 있다면 ‘너무 긴장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 ㅇ
방송할 때, 영상으로 찍어두었다.(그럴 정신은 또 있었다.) 엄마에게 보내려고. 엄마는 그 영상을 보고는 ‘우리 딸 역시 말 잘하네!’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그렇게 잘 한 건 아닌데, 엄마니까, 그렇게 들리나보다’라고. 그저 그렇게 생각히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 말대로 ‘잘’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은 했을 것 같다. (이건 살짝 다른 이야기지만, 만약 엄마가 요즘의 나를 보면 무어라 하실까, 우리 딸 말 잘 한다고 하시면 좋겠다.)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 길도 많이 기억난다. 잊을 수 없는 암흑. 겨울이니까 7시 반이 넘어야 해가 떴다. 늦어도 5시 반엔 일어나 후다닥 옷 입고 아침 간단히 먹고 6시나 10분쯤 밖을 나섰다.
버스를 타러 큰 길까지 15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는데, 네이버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버스가 더 빨리 오곤 해서 늘 마음 급하게 뛰었던 기억이 난다. 571번 버스를 일단 타면 마음이 놓였다. 출근할 때 타면 같은 거리인데도 1시간이 걸려서 절대 타지 않던 버스. 새벽이라 막힐 일도 없이 30분만에(30분이 안 걸릴 때도 있었다.) 목동에 내렸다.
‘꿀알바’인데 이른 아침에 일어나 추위를 뚫고 걸어가다보면 고달픈 느낌이 들었다. 일하는 곳에 따스한 커피가 있으면 좋았을텐데, 믹스 커피 뿐이었다. 그래서 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서 2000원짜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잔에 담아 갔다. 2000원도 아끼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른 아침에 움직여야 하는 것만 빼면 일이 끝나고도 12시라 하루를 시작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것 또한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다. 덕분에 통장 잔고도, 미음에도 조금은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5월까지 주말마다 그곳을 왔다갔다 했다.
+ 원음방송은 내가 퇴사했던 회사와 같은 건물인 목동 방송회관에 있었다. 로비에 가면 3년 가까이 보던 경비 아저씨도 늘 계셨다. 출근을 하던 나라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주로 마스크를 끼거나 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왠지 아셨을 듯). 주말이라 그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은 괜히 신경은 쓰였다. 들어갈 때 마음이 묘~했다. 이제는 그 무슨 일로도 가지 않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