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미술시간이 제일 좋았다. 특별활동도 학창 시절 내내 미술반만 했다. 음악도 좋아해서 고등학교 입학 후 잠시 밴드반에 들까 고민했지만 결국 미술반을 택했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니 가끔씩 점심시간에도 미술실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내가 미술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미술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3 올라가니 학교에서 진학하고 싶은 대학이나 전공을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미술대학을 쓰지 않고 경영대학을 써서 제출했다. 회사에 취업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평소 좋아하던 일이 반드시 직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특히 과거에는 더욱 그런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우리 속담이 이를 증명한다.
아마도 그때 어렴풋이 '하는 것'과 '되는 것'의 차이를 알았던 것 같다. 대학에서 전공을 하면 그 전공대로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과대학에 가면 의사가 되는 것이고, 공과대학에 가면 엔지니어나 공학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당시에도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정대학에 입학하는 자체를 목표로 한 친구들도 주변에 있었다.
오히려 특성화 고등학교를 나와서 취업한 경우는 그 업종이 더 뚜렷했다. 문과계통이면 은행이나 기업의 회계부서로, 이과 계통이면 기술직으로 좀 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일과직업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러면서 '하는 것' 즉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것'과 멀어진다.
결국 '되는 것'을 선택한 순간부터, 그 일을 그만둘 때까지 그 일에 매진한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것'을 아예 잊고 산다.
그러다가, 퇴직 등이나 경제적 자유를 찾으면 비로소 '좋아하는 것' 또는 '좋아했던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게 쉽지가 않다. 왜냐면,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전처럼 그 일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어려울 때 맛있었던 음식이 배부를 때 그때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미 상황이 바뀐 것이다.
어릴 때 친했던 친구도 시간이 지나서 만나면, 그때의 풋풋함을 느끼지 못함과도 같다.
나이가 들면 순수함과도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인 이유도 있다. "그거 하면 뭐가 좋은데?"라고 스스로 질문하는 순간
그나마 간직한 적은 가능성도 날아가 버린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하는 것'을 '되는 것'과 같이 하는 게 가장 좋다. '되는 것 90%' 하면 '하는 것 10%'라도 꾸준하게 비울을 조절해 가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과거형 보다는 현재형으로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그때마다 '좋아하는 것들'을 5%'라도 유지해서 그나마 작은 불씨들이라도 몇 가지 가지고 왔다.
글쓰기도 그중 하나다.
인생후반으로 갈수록 '하는 것 들'의 비중을 높여야겠다.
그러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