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에 남긴 글

by 지나이다 니꼴라예브나 기삐우스

by 김양훈

책 표지에 남긴 글

지나이다 기삐우스

추상적인 게 나는 좋네

그것으로 나는 삶을 창조하나니…

모든 외딴 것,

어렴풋한 게 나는 좋네.


나는 나의 비밀스럽고

비범한 꿈들의 노예…

그러나 유일한 이야기들을 담아낼

지상의 말들을 나는 모르네.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이명현 엮고 옮김) 창비세계문학 2014


•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2)


작품의 배경과 시평
지나이다 기삐우스(Zinaida Gippius)의 이 짧은 시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난해했던 시기, 즉 러시아 상징주의(Symbolism)를 표방하는 시 작품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격동의 러시아에서 그녀가 왜 '추상'과 '비밀'을 노래했는지 그 배경과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1. 작품의 배경: 러시아 상징주의의 여왕

지나이다 기삐우스는 20세기 초 러시아 문화의 황금기인 '은세기(Silver Age)'를 이끈 중심 작가 중 한 인물이었습니다.

∎ 퇴폐주의와 상징주의: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물질세계) 너머의 본질적인 세계를 찾고자 했습니다. 기삐우스는 현실의 구체적인 묘사보다는 영혼의 움직임, 신비주의,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중시했습니다.

∎ '데카당스'의 미학: 시에서 언급된 "어렴풋한 것", "비범한 꿈"은 당시 유행하던 데카당스(Decadence) 문학의 특징입니다. 이는 낡은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적 불안감을 내면의 탐구로 승화시킨 결과입니다.

∎ 언어의 한계: 상징주의자들은 인간의 언어가 신성한 진리나 깊은 내면을 담기에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믿었습니다. "지상의 말들을 나는 모르네"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상징주의적 고뇌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2. 시평: 침묵으로 빚어내는 영혼의 지도

▣ 추상(Abstraction)이라는 창조의 도구

기삐우스는 왜 "추상적인 게 좋다"라고 선언했을까요? 그녀에게 현실의 구체적인 사물들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과 같습니다.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 '추상'과 '어렴풋한 것'이야말로 시인이 자신의 의지대로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 꿈의 노예이자 주권자

"비범한 꿈들의 노예"라는 표현은 역설적입니다. 그녀는 현실의 법칙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환상과 꿈에 예속됨으로써 오히려 지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투영된 지점이기도 합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연에 있습니다. 시인은 가장 "유일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지상의 말"일 뿐입니다.

"천상의 비의(秘意)를 담기엔 세속의 언어가 너무나 투박하다"는 절망감은, 역설적으로 그 침묵 사이에서 독자가 시인의 '비밀'을 짐작하게 만드는 강력한 시적 장치가 됩니다.

3. 총평

이 시는 단순한 '취향의 고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명하려는 시인의 외로운 투쟁을 담고 있습니다. 기삐우스는 독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기보다, 자신만의 은밀한 성소(聖所)로 초대하여 그 '어렴풋함' 자체를 느끼게 만듭니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들에게 "추상적인 것"을 통해 삶을 창조한다는 그녀의 선언은, 눈에 보이는 성과 너머에 우리 영혼의 진정한 거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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