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5월 읽기 과제 도서 소개

by 김양훈
5월 읽기 과제 도서 :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러시아 대표시선 ; 알렉산드르 블로끄 외, 이명현 엮고 옮김 (창비) 2014

옮긴이의 말

이 시선집에 실린 시들은 오늘날 고전으로 자리매김하는 러시아 현대시의 대표작들로서 시기상으로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 세기를 포괄한다. 먼저 밝혀두지만, 쏘비에뜨 시절에 창작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시들은 이 책에서 배제되었다. 여기 수록된 시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더니즘 계열에 속하며, 쏘비에뜨적 기준으로 보자면 대부분이 비공식 문학으로 분류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혹은 쏘비에뜨 공식문학 계열의 시들이 번역 대상에서 배제된 것은 순전히 역자의 판단과 기호에 의한 것이며,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러한 선별은 쏘비에뜨 공식문학에 대한 역자의 편견과 무지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선택이 주관적이고 편향된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쏘비에뜨 공식문학에 속하는 작품들 가운데서도 러시아 시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이 존재한다. 미하일 이사꼽스키(Mikhail Isakovskii, 1900-73), 알렉산드르 뜨바르돕스끼(Aleksandr Tvardovskii, 1910-71)의 시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작품 선정의 원칙이었던 서정시 혹은 단시(短詩)만을 고려할 때 언급된 시인들의 작품은 역자의 소견으로는 여기에 실린 시들에 비해 그 미학적 성취에 있어 아쉬운 면들이 많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소련의 해체 이후 쏘비에뜨 러시아의 공식문학, 그중에서도 시문학에 대한 재평가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심지어 러시아 본국에서도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쏘비에뜨 러시아문학의 현대적 재조명을 통해서만이 러시아 현대시의 고전을 선별하는 보다 보편적이고 온당한 기준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러시아 현대시의 역사는 1890년대부터 1920년대 초까지, 이른바 ‘은세기’에 전개되었던 모더니즘 시운동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된다. 상징주의에서 아끄메이즘, 미래주의, 이미지즘과 같은 유파들의 정력적인 활동을 통하여 러시아 시는 19세기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 전대미문의 르네상스를 구가한다. 러시아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인 상징주의자들은 당대 지성과 문학을 지배했던 유물철학과 과학적 실증주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새로운 시’의 태동을 예고하고 촉구하였다. 인간의 감각과 정신을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물질세계에 가둬버리는 기존의 문학과는 달리 상상력과 개성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또 다른’ 고차원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예술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러한 예술의 구체적인 실현 방법으로서 그들은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와 유미주의, 악마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당스적 노선을 취하였다. 그러한 데까당 구룹에 뒤이어서 ‘아름다운 세계를 구원하리라’라는 명제를 모토로 삼은 후대의 상징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영원한 여성성’이 지상에 강림함으로써 세계가 전변할 것이라는 신비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세계 비전을 시 속에서 구현하였다.

시 형식의 측면에서 상징주의자들은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균형과 조화, 시어의 명료함을 중시하는 뿌시낀적인 전통에서 과감하게 벗어난다. 그들은 비가시적인 초월적 세계를 암시하는 심오한 상징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때 관건이 되는 것은 시어를 일상적이고 지시대상적 의미의 틀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과제를 그들은 시어의 음성적 측면을 활성화하고, 가장 추상적인 예술인 음악에 가깝도록 시 텍스트를 조직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상징주의자들의 혁신적인 시도에 의해서 러시아 시 형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1910년대 초에 상징주의에 반발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시인조합’이라는 그룹을 결성하면서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은 곧 아끄메이즘이라는 유파를 형성하여 상징주의에 의해서 훼손된 러시아 시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시어의 음성적·음악적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됨으로써 시어에 덧씌워진 신비주의적인 ‘거품’을 제거하고, 기의(의미)와 기표(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언어(시)의 전통적인 모습을 복원하자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한 아끄메이스뜨들에게 가장 뛰어난 시의 전범은 조화롭고 명료하며 단순소박한 시어를 구사한 뿌시킨이었다. 또한 그들에게 이상적인 예술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음악이 아니라 견고하고 균형 잡힌 건축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끄메이즘과 상징주의의 대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는 후술 할 미래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아끄메이즘과 상징주의는 상호 간에 내밀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전자는 후자의 막대한 영향력 속에서 성장하였다. 특히 만젤시땀을 위시한 아끄메이스뜨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러시아와 세계의 과거, 즉 문화적 전통에 대한 각별한 의식을 고려한다면, 상징주의에 대한 아끄메이즘의 부정적 태도는 보다 유연하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은세기를 주도했던 또 다른 유파는 아끄메이즘과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미래주의이다. 전통과 단호하게 선을 긋고 극단적인 형식 실험을 감행했던 미래주의는 단지 모더니즘의 일 유파로서만이 아니라 러시아 시의 아방가르드로 규정된다. 미래주의의 내부에는 각자 나름의 방향을 추구하는 세 가지 스펙트럼이 존재했는데, ‘자아 미래주의’ 입체파 미래주의‘ ’원심분리기‘ 그룹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이 시선집에 소개된 입체파 미래주의는 예술적 인습에 대한 부정, 전통과의 단절에 있어서 나머지 두 그룹보다 더 일관되고 철저했다. 그들은 시어를 일상적인 의사소통적 기능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상징주의의 시도가 불철저했음을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 이외의 그 어떤 대상도 지시하지 않는 자기 충족적 언어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급기야 자연어의 기능을 완전히 탈피한 ’초이성어‘를 고안하기도 했다. 삐까소와 프랑스의 입체파 회화에서 시적 영감을 얻었으며, 대부분 화가이기도 했던 입체파 미래주의자들은 일점원근법의 해체와 대상의 분해 및 전위(轉位)라는 입체파 회화의 기법을 시에 적용하여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시 텍스트를 창조해 냈다. 그들은 또한 시와 비시(非詩)의 경계를 파괴하는 반미학주의의 전략을 실현하기 위하여 저급하고 추한 세태적 요소들을 가공하지 않은 채 과감하게 텍스트에 도입했다.

언급된 세 유파 외에도 ’이미지즘‘, ’서정시 그룹‘, ’농민시‘ 그룹 등 여러 지류가 참여했던 경이로운 시의 축연(祝宴)은 쏘비에뜨 체제가 안착하기 시작하는 1921~22년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창작의 유일한 방법으로 공식화되고, 예술가들에게 전대미문의 테러가 가해지던 스딸린 치하에서 은세기 러시아 시의 위대한 전통은 역사의 지표면 밑에 생매장되고 만다. 다만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문학적 삶을 어렵사리 이어갔던 망명시인들에 의해서 그 명맥이 어느 정도 유지된다.

1950년대 중반에 마침내 정치적 ’해빙‘의 물결이 일자 모더니즘의 전통은 다시 소생한다. 이 시선집에 소개된 옙뚜셴코, 보즈네센스끼, 아흐마둘리나, 브로드스끼와 같은 해빙기의 시인들은 모두 은세기 모더니즘의 후예들로 평가된다.

언급된 시인들을 위시한 전후세대가 문화의 전 분야를 주도했던 1960년대에 러시아 시는 뿌시킨의 시대와 은세기 다음으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수도 모스끄바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 수많은 청중과 시인들이 모인 가운데 밤마다 시 낭송회가 열리고, 시의 가치와 향방에 대한 논쟁들이 잡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전개되며, 현대성에 대한 보다 폭넓은 사유가 시를 통해서 표출되고 또한 요청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시의 최종적인 목적은 시 자체라는 명제가 시인들과 독자 대중의 의식 속에 되살아나게 된다. 이와 같은 시의 부흥이 가능했던 요인 중 하나로 해빙기까지 기적같이 살아남았던 아흐마또바와 빠스쩨르나끄라는 두 거장의 존재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1950~70년대에 쏘비에뜨의 젊은 시인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예술의 사표(師表)였으며, 해빙기 이후에도 여전히 폭압적이었던 쏘비에뜨 체제에 저항하면서 시혼(詩魂)을 지켜나갈 수 있게끔 지지해 준 버팀목이었다.

지금까지 개괄한 바와 같이 러시아 현대시는 은세기의 풍요로운 토양 위에서, 그 시대의 경험을 원동력 삼아 발전해 왔다. 사실상 러시아 현대시사의 밑그림은 은세기에 이미 다 그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시 형식과 시어의 경이롭고 다채로운 혁신뿐만 아니라, 모국어, 나아가 언어 전반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인문적 유산에 대한 각별한 기억이 은세기의 전통을 잇는 러시아 현대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러시아 현대시의 해독이 유난히 어려운 까닭은 대체로 시 텍스트가 그러한 인문적 유산들에 대한 인용과 기억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현대시가 인류가 남긴 인문적 유산을 그토록 천착했던 이유는 인간존재의 의미, 개성의 가치와 존엄성이 바로 그것에 의해서 가장 진실하고 온전하게 구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 현대시 자체가 인간과 개성의 존엄함에 대한 생생하고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러시아 현대시의 빛나는 면뿐만 아니라 그늘진 구석 역시 은세기로부터 산출된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지적되어야 할 점은 러시아 현대시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다. 입체파 미래주의가 혁명 이후 ’공산주의 미래주의‘로 변신하여 생산문학과 사실문학의 기치를 올리는 과정은 러시아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강한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단지 정치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에서도 러시아 현대시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논할 수 있다. 가령 상징주의의 유토피아적인 세계 변혁의 프로그램은 메시아주의와 세계종말론의 변종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적 인습과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혁신을 추구했던 러시아 모더니즘은 시어와 일상어의 경계와, 예술장르 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실험을 감행하였고, 마침내는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마저 뛰어넘으려 했다. 본래 모더니즘은 예술의 목적이 예술 바깥에 있지 않으며, 예술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자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의 목적이 예술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자칫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요한 가치들이 모두 예술 안에 있으며, 그것들은 오직 예술적 방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명제로 대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판단은 예술이 아닌 모든 것—정치, 종교, 사회적 삶—을 예술에 종속시키고, 현실을 예술의 논리대로 재단하려 드는 작위적이고 관념적인 시도를 종종 초래한다. 그러한 시도들 속에서 삶의 리얼리티는 예술적 리얼리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상적 세계로 간주된다. 아니, 오히려 예술적 리얼리티가 삶보다 더 참된 실제로 인식된다. 삶은 미적 상상력과 예술적 테크닉을 통해서 (예술처럼) ’참된 것‘으로 변형 가능한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미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지금‘ ’당장‘ 변모시키려 했던 러시아 모더니스트들의 무의식 속에는 ’광포한 속도로 그들을 밀어붙였던 시대의 조증(躁症), 강박적이고 맹목적인 혁신의 이데올로기가 꿈틀거리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초이성어를 창조함으로써 세계 통합을 이루고자 했던 흘레브니꼬프나, 예술혁명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던 마야꼽스키의 경우는, 상징주의와는 또 다르게, 이데올로기에 경도되거나 압도된 시의 자가당착을 제대로 목도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시아 현대시의 흐름 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에의 정향성과 삶과 예술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은 오늘날 여러 각도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후략)

2014년 5월

[옮긴이] 이명현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러시아문학을 전공하였고,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에 관한 연구로 고려대학교와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은세기 러시아 문학과 문화, 러시아문학과 한국문학 비교연구, 러시아 서사시의 전통과 진화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러시아 인문가이드》(공저, 2013), 《나를 움직인 이 한 장면—러시아문학에서 청춘을 단련하다》(공저, 2016) 등이 있으며, 주요 역서로는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러시아 현대 대표시선》(2014), 《안나 까레니나》(2018), 《세계관으로서의 상징주의》(공역, 2019) 등이 있다.

출판사 서평

예세닌, 마야꼽스끼, 블로끄, 아흐마또바, 빠스쩨르나끄, 옙뚜셴꼬 등 고전의 반열에 오른 러시아 현대대표시인 15인 시선집

러시아 현대대표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발표된 러시아 시 중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선별해 수록하고 있다.

러시아 현대시는 1890년대에서 1920년대 초 사이에 전개된 모더니즘 시운동으로부터 비롯한다. 러시아 모더니즘은 상징주의, 아끄메이즘, 미래주의, 이미지즘과 같은 유파들을 낳으면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러시아 시의 르네상스를 실현한다.

러시아 모더니즘의 선두주자인 상징주의자들은 당대의 유물철학과 과학적 실증주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시’를 추구하였다. 이런 상징주의 계열의 시인으로는 기삐우스, 발몬뜨, 브류소프, 블로끄 등이 있다.

기삐우스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현대시의 첫 페이지를 연 시인으로, 격정적인 세기말의 정서를 이전의 시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노래했다. 그녀의 시는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고 몰입하는 개인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발몬뜨는 러시아 상징주의 1세대의 거성(巨星)으로 추앙받은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일체의 사실적이고 세태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미적 상상력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의 시는 언제나 꿈이 현실을 압도하고 조형성보다 음악성이 지배적이 된다.

브류소프는 러시아 상징주의 1세대의 미학을 보여준 시인으로서 데까당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자기 가치적인 예술’을 추구했는데, 예술을 비합리적인 원리, 감성적 직관으로 운용되는 영역이며 예술가 개인의 주관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로 보았다. 그의 시는 예술미와 자아에 대한 숭배 경향을 보인다.

블로끄는 러시아 상징주의 2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간주되지만, 그의 창작적 경향은 후기로 갈수록 상징주의 틀에서 벗어난다. 그는 상징주의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 러시아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으며, 역사성과 당대성에 대한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1910년대 초에 상징주의에 반대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끄메이즘이라는 유파를 형성하고, 상징주의에 의해 훼손된 러시아 시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아끄메이스뜨들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음악이 아닌 견고한 건축으로서의 예술을 지향하며, 신비주의적 거품을 걷어낸 언어 전통을 복원할 것을 주장했다. 그 전범으로 조화롭고 명료하며 단순 소박한 뿌시낀의 시를 꼽았는데, 이러한 아끄메이즘 시인으로는 아흐마또바, 만젤시땀 등이 있다.

아흐마또바는 구체적인 사물과 일상적 체험을 소박하고 간결하게 시로 표현한 시인이다. 그녀는 여성적 주제를 여성의 언어로 표현한 최초의 러시아 시인으로 평가된다.

만젤시땀은 언어에 주목한 시인으로서, 그에게 말은 모든 인문적 유산, 즉 예술, 문화와 동의어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에서 말을 왜곡하고 훼절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였다.

쯔베따예바는 아끄메이스뜨인 만젤시땀과 교류한 시인으로서, 그녀의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결벽스러울 정도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이고자 한다.

아끄메이즘과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미래주의는 과거와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극단적인 형식실험을 감행한 아방가르드였다. 이런 미래파의 주요 시인으로는 흘레브니꼬프, 마야꼽스끼, 빠스쩨르나끄 등이 있다.

흘레브니꼬프의 시는 난해하기로 특히 유명한데, 그에게 시는 ‘새로운 언어’ 창조의 일환으로, 여기서 ‘새로운 언어’는 말의 전반적인 개념과 구조의 전변을 뜻한다. 그에게 언어창조는 존재의 시원을 탐구하는 작업과 직결된다.

마야꼽스끼의 시는 전위적인 전복의 정신, 혁명의 리듬, 시대의 속도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청년시절 마야꼽스끼가 속했던 입체파 미래주의는 입체파 회화에서 미래예술의 단초를 발견하였으며, 입체파의 기법을 시에서도 똑같이 실현하고자 했다.

빠스쩨르나끄 시에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사물이다. 그의 시에서 자연현상과 주변풍경은 마치 사람처럼 표정과 감각을 지닌다.

한편 이러한 모더니즘의 격랑 속에서도 예세닌은 러시아의 토속적인 풍경과 정조를 전통적인 양식으로 노래한 시인으로 그에게는 ‘농촌 시인’이라는 호칭이 늘 따라다닌다. 집요하게 농촌과 고향을 노래하긴 했지만, 애초부터 그의 시는 실향의 깊은 상처에서 나온 것이었다. 농촌에 대한 그의 지극한 애정의 밑바탕에는 실향민 의식과 이방인 의식이 있는 것이다.

상징주의, 아끄메이즘, 미래주의,
이미지즘까지 러시아 현대시의 르네상스를 담아내다

러시아 현대시의 향연은 쏘비에뜨 체제가 안착되기 시작하는 1921~22년에 그 막을 내리게 되며, 스딸린 통치시대로 접어들면서 러시아 시의 위대한 전통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정치적 ‘해빙’의 물결이 일자 러시아 시의 위대한 전통은 다시 소생하게 된다. 옙뚜셴꼬, 보즈네센스끼, 아흐마둘리나, 브로드스끼와 같은 해빙기의 시인들은 러시아 시의 새로운 부흥기를 열어젖힌다.

옙뚜셴꼬는 해빙기 러시아 시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으며 대중적 인기를 누린 시인이다. 그는 자유와 개혁을 요구하는 당대 러시아인들의 정서를 예리하게 포착해 내면서 그것에 부응하는 시를 써나갔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창작된 그의 시들은 웅변적인 어조와 시민적인 파토스가 강한 현실참여적인 시들이 주를 이룬다.

역시 대중적 인기를 누린 보즈네센스끼는 옙뚜셴꼬와 함께 소련 전후세대의 시대의식과 감수성을 대변한 시인이다. 그의 시 역시 청중 앞에서 낭송되는 ‘연단시’의 성격이 강했지만,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문명과 진보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주제 면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시는 다양한 실험적, 전위적 양상을 드러낸다.

아흐마둘리나의 시는 내향적이고 자기 고백적이며 명상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서정시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그녀의 시는 뿌시낀으로 대변되는 고전적 러시아 시의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브로드스끼는 20세기 초 러시아 모더니즘의 전통을 종합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존재와 세계에 대한 관조와 통찰이 정서적 층위를 압도한다. 대체로 그의 서정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데 인색하며, 자신의 감정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아이러니로 대한다.

러시아 현대시는 시 형식의 경이롭고 다채로운 혁신뿐만 아니라, 언어 전반에 대한 지극한 사랑, 인문적 유산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보여준다. 이 시선집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이런 러시아 현대시를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목차

▪ 지나이다 니꼴라예브나 기삐우스

노래 / 책 표지에 남긴 글 / 헌사 / 사랑은 하나 / 밑바닥까지

▪ 꼰스딴찐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

나는 사라져 가는 그림자를 꿈으로 붙잡았네 / 바람 / 나는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 / 존재의 계명 / 나는 태양을 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노라 / 우리 태양처럼 되자!

▪ 발레리 야꼬블레비치 브류소프

형식에 바치는 쏘네뜨 / 창조 / 젊은 시인에게 / 나 / 기쁨 / 좁다란 거리를 따라 / 서글프오, 그대와 나 둘만이 아니라서

▪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끄

그대를 예감하오.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는데 / 나 어두운 성당으로 들어가 / 미지의 여인 / 축축한 적갈색 이파리에 / 분신 /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죽은 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 밤, 거리, 가로등, 약국 /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또바

나는 창가의 빛줄기를 향해 기도해요 / 나들이 / 같은 잔으로 우리 마시지 않으리 / 여기 우리는 모두 난봉꾼, 매춘부 / 그대는 지금 답답하고 울적하죠 / 나에게 목소리 들렸네 / 마지막 건배 / 보로네시 / 용기 / 세편의 시

▪ 오시쁘 예밀리예비치 만젤시땀

오로지 아동서만 읽고 / 침묵 / 노트르담 / 뻬쩨르부르그의 시 / 지팡이 / 뻬쩨르부르그에서 우리 다시 만나리 / 레닌그라드 / 오, 나 얼마나 원하는지

▪ 마리나 이바노브나 쯔베따예바

자살 / 너무 일찍 씌어진 나의 시들 / 나는 좋아요, 당신의 고통 나 때문이 아니라서 / 또다시 불 켜진 창 / 절도를 모르는 영혼 / 집 / 내 충직한 책상이여!

▪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어이, 루시여, 내 고향이여 / 사랑스러운 땅이여! 가슴은 / 개에 관한 노래 / 고향땅에서 사는 데 지친 나는 / 숲의 짙은 머리채 너머 / 조각된 목조 영구차 노래하고 / 나는 마지막 농촌 시인 /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 빛나라, 나의 별이여, 떨어지지 말고 / 안녕, 내 친구여, 잘 있게나

▪ 벨리미르 흘레브니꼬프

자루에서 / 보베오비 입술을 노래했고 / 우리는 온화한 신처럼 이곳에 오곤 했지 / 말이 죽어갈 때는 / 숫자들 / 한밤중의 영지여, 칭기즈칸하라! / 나와 러시아 / 이란의 노래 / 고독한 배우 / 다시, 또다시

▪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로비치 마야꼽스끼

아침 / 밤 / 간판에게 / 당신들은 할 수 있는가? / 옜소! / 나와 나뽈레옹 / 시인 노동자 / 오월 / 청동 목청을 다하여

▪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빠스쩨르나끄

2월. 잉크를 가져다 울어야 하리! / 나의 누이? 삶은 오늘도 / 시의 정의 / 집에 아무도 없으리 / 햄릿 / 모든 것에서 나는 / 눈이 온다

▪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뚜셴꼬

프롤로그 / 볼가 / 바비야르 / 스딸린의 후계자들 / 러시아에서 시인은 / 흰 눈이 내리네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보즈네센스끼

고야 / 반(反)세계 / 정적을 원한다! / 전례 없이 고통스러운 시절 / 숨이 멎을 듯 / 현재에 대한 향수

▪ 벨라 아하또브나 아흐마둘리나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 / 몇 년째 내 집 앞 거리에 / 촛불 / 침묵 / 주문(呪文)

▪ 이오시프 알렉산드로비치 브로드스끼

잘 가라, 잊어버리고 책망하지 마라 / 고독 / 동사들 /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 1971년 12월 24일 / 고독은 사물의 본질을 가르쳐준다 / 나는 들짐승 대신 우리로 들어갔고 / 안나 아흐마또바 백주년을 기리며 /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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