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몬뜨에 대하여

상징주의 제1세대의 거성(巨星)

by 김양훈

옮긴이 해설

발몬뜨-새로운 예술의 창시자이자
상징주의 제1세대의 거성(巨星)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옮긴이 이명현 교수

189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발몬뜨는 새로운 예술의 창시자이자 상징주의 제1세대의 거성(巨星)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시는 일체의 사실적이고 세태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미적 상상력의 세계를 제시한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꿈이 현실을 압도하고 조형성보다 음악성이 지배적이다. ‘꿈―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을 압도하고, 절대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것―바로 이로부터 러시아 상징주의 미학의 단초가 마련된다. 앞서 소개된 기삐우스의 시에서도 초월적 세계를 향한 지향이 두드러지지만, 발몬뜨의 경우 그것은 기삐우스처럼 종교적이기보다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에 가깝다.

상징주의 시에서 꿈―이데아의 세계는 가시적인 이미지보다는 주로 비가시적인 어렴풋한 이미지로 희미하게 암시되곤 하는데, 발몬뜨의 시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꿈은 본질적으로 그 실체가 모호하고 흐릿한 세계이다. 따라서 꿈이 지배하는 시적 리얼리티는 불명료하고 유동적이며, 시어들의 의미는 대단히 암시적이고 모호하다. 발몬뜨의 초기작 중에서 이와 같은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시가 「나는 사라져 가는 그림자를 꿈으로 붙잡았네」와 「바람」이다. 이 시들은 ‘그림자’와 ‘꿈’이 상징하는 막연하고 모호한 어떤 대상을 향한 서정적 주인공의 영적 움직임을 그리고 있다. 그 움직임은 「나는 사라져 가는 그림자를 꿈으로 붙잡았네」에서는 계단을 오르는 행위로, 「바람」에서는 바람의 질주로 형상화된다. 여러 번 강조되는 ‘계단의 떨림’과 형체 없이 ‘떠다니는 바람’의 부유하는 이미지는 양 텍스트에 구축된 시공간을 지극히 불안정한 것으로 만든다. 또한, 빛과 소리의 순간적인 지각에 관한 진술들로 이루어진 이 시들은 발몬뜨 특유의 인상주의적 스타일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한 인상주의적 지각들은 시 전체에 수수께끼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시적 리얼리티의 불안정성을 한층 더 강화한다.

창작 생애의 절정기였던 1900년대 초의 시들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조를 띠며, 거대한 규모의 자연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때 자연은 물리적이고 생태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신화적이며 상징적인 존재다. 「존재의 계명」 「나는 태양을 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노라」 「우리 태양처럼 되자」에 등장하는 ‘태양’ ‘바람’ ‘아침놀’ ‘바다’와 같은 자연적 요소들은 고대 신화의 신들과 같은 위격을 지니며, 그 중심에는 태양이 자리한다. 발몬뜨가 꿈꾸는 미래의 문화와 인간을 상징하는 태양은 냉담하고 피로하고 허약한 현대인의 되찾아야 할 원초적인 생명력을 구현한다.

발몬뜨 시의 궁극적인 찬미의 대상은 서정적인 주인공 ‘나’이다. 그의 시는 자아 찬미의 노래이다. ‘나’의 감정과 열망과 에너지는 ‘나’의 분신인 태양과 바다의 규모만큼 무한히 확대된다. 왕성한 생명력을 지녔으며, 모든 문명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오만불손한 발몬뜨의 서정적 주인공은 니체적인 초인―인신(人神)을 연상시킨다. 그는 원시적인 생명력의 화신이면서도 「나는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에서 보듯이, 극도로 세련되고 우아한 예술미를 체현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발몬뜨의 자아중심주의는 탐미주의와 상통한다.


러시아 1세대 상징주의 시인
발몬트와 기삐우스 비교
러시아 문학의 은세기(Silver Age)를 연 '선배 상징주의자(Elder Symbolists)'라는 범주 안에서 꼰스딴찐 발몬뜨(Konstantin Balmont)와 지나이다 기삐우스(Zinaida Gippius)는 극단적일 만큼 대비되는 문학적 지향점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모두 19세기 사실주의에 반기를 들고 '내면적 진실'을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진실에 도달하는 방식과 언어의 질감은 전혀 다릅니다.

1. 인상주의적 탐닉 vs 형이상학적 성찰

∎ 발몬뜨: 찬란한 찰나의 시인

발몬뜨는 철저한 인상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색채, 소리, 향기를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의 시는 "나는 태양을 보러 이 세상에 왔다"라는 구절처럼 삶에 대한 환희와 자기 긍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을 주관적인 감흥으로 변주하는 데 탁월했습니다.

∎ 기삐우스: 차가운 이성과 영혼의 시인

반면 기삐우스는 감각적 화려함보다는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탐구에 침잠했습니다. 그녀는 '데카당스의 마돈나'라 불렸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분석적이고 차가운 지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기삐우스에게 시는 미적 유희가 아니라, 신과 인간, 삶과 죽음 사이의 이원론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고통스러운 사유의 과정이었습니다.

2. 음악적 선율 vs 정제된 구조

∎ 발몬뜨: 소리의 마술사

발몬뜨의 최대 강점은 음악성입니다. 그는 두운(alliteration)과 모음 압운을 극단적으로 활용하여, 의미보다는 '소리의 울림' 자체로 독자를 매혹했습니다. 그의 시는 흐르는 물이나 바람처럼 유려하고 즉흥적입니다.

∎ 기삐우스: 칼날 같은 정밀함

기삐우스의 시는 음악적이기보다는 건축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녀는 화려한 수식어를 배제하고, 짧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복잡한 심리 상태를 정의합니다. 감정을 쏟아내기보다는 고도로 절제된 언어를 통해 사상의 핵심을 찌르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3. 자기도취 vs 자기 분열

∎ 발몬뜨: '나'라는 우주

발몬뜨는 상징주의 특유의 개인주의를 극대화하여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자 천재적인 예술가로 격상시켰습니다. 그의 시 속에서 '나'는 정복자이자 모든 것을 수용하는 열정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 기삐우스: '나'라는 심연

기삐우스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투쟁했습니다. 그녀의 시에는 육체와 정신, 지상과 천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분열된 자아가 등장합니다. 특히 남성 명사(남성 화자)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등, 성별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과 이중성을 파헤쳤습니다.

요약 비교

<구분: 발몬뜨(Balmont) - 기삐우스(Gippius)>

‣주요 키워드: 태양, 찬가, 음악성, 찰나 - 밤, 기도, 지성, 이원론

‣태도: 외향적 환희와 자기 긍정 - 내성적 성찰과 비판적 거리

‣언어 스타일: 화려하고 유동적인 선율 - 차갑고 견고한 격언적 문체

‣목표: 순간의 인상을 영원하게 기록 - 영혼과 신성(Divinity)의 합일 모색

결론적으로 발몬뜨가 상징주의의 '외적 미학(소리와 색채)'을 완성했다면, 기삐우스는 상징주의를 '내적 철학(정신과 종교)'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삐우스가 쓴 <밤의 꽃(Night Flower)> 같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 서늘하고도 정갈한 긴장감은 발몬뜨의 뜨겁고 소란스러운 열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밤의 꽃

지나이다 기삐우스


오, 한밤의 시간을 믿지 말라!

사악한 아름다움에 가득 차 있는

그 시간에 사람들은 죽음과 친해지고

단지 꽃만이 기이하게 살아있구나.


말 없는 벽은 어둡고 따뜻하고

난로의 불은 꺼진 지 이미 오래 건 만…

나는 꽃들의 모반을 기다리고

꽃들은 나를 증오하는구나.


꽃들이 있는 곳엔 열기와 불안뿐

대담한 향기는 나를 숨 막히게 하건만

나는 도망칠 수 없고

꽃들의 화살을 피할 수도 없구나.


핏빛 비단 사이로 저녁의 태양이

이파리에 빛을 던진다…

보드라운 육체는 되살아나고

사악한 꽃들은 잠에서 깨어나는데


처연한 아룸¹⁾에서

독무리 양탄자에 뚝뚝 떨어진다…

더욱 신비하게 더욱 위태롭게…

하여 숨죽인 말다툼이 들리는 듯하구나.


살며시 움직이고 숨 쉬는 꽃들이

적의 척후병처럼 나를 감시하며

내 생각을 엿듣고 엿보고

나를 독살하려 하는구나.


오, 한밤의 시간을 믿지 말라!

사악한 아름다움을 조심하라

이 시간에 우리는 모두 죽음과 친해지고

꽃만이 홀로 살아있구나.

[註1] 아룸: 천남성과(天南星科)의 유독성 식물

발몬뜨의 ‘외향적 화려함‘
기삐우스의 ’내면적 심연‘
발몬뜨가 상징주의의 '외향적 화려함'을 대표한다면, 기삐우스는 그 '내면적 심연'을 파고들었습니다. 두 작가의 시학이 어떻게 다른지, 대표적인 시 구절을 통해 입체적으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1. 발몬뜨: 태양의 찬가와 인상주의적 도취

발몬뜨의 시는 마치 인상주의 회화처럼 색채가 넘치고, 음악처럼 리듬감이 살아있습니다. 그의 시적 자아는 세상을 정복하고 찬미하는 주인공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양을 보러 왔다
(Я в этот мир пришел, чтоб видеть солнце) 중

"나는 이 세상에 태양을 보러 왔다.

그리고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태양을 보리라.

(...)

나는 나의 승리를 통해 세상을 정복했다.“


‣시각과 청각의 결합: 발몬뜨는 '태양'이라는 상징을 통해 생명력과 예술적 영감을 형상화합니다. 그의 시 구절은 외침에 가까우며, 독자에게 즉각적인 감각적 쾌락을 줍니다.

‣자기 긍정: 여기서 '나'는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 세상을 관조하고 찬미하며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신적 예술가'입니다.

2. 기삐우스: 밤의 정적과 형이상학적 긴장

기삐우스의 시는 차갑고, 고요하며, 날카롭습니다. 그녀는 감각적인 화려함을 걷어내고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모순을 직시합니다.


밤의 꽃(Ночной цветок) 중

"오직 밤에만, 밤의 꽃들은 자라난다

정적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향기를 내뿜지 않고, 색깔도 없으며

죽음처럼 고요하게 피어난다.“

(註) 기삐우스는 이 시에서 화려한 장미가 아닌, 보이지 않는 영혼의 진실을 '밤의 꽃'에 비유했다.

∎ 이원론적 사유: 발몬뜨가 낮과 태양을 노래할 때, 기삐우스는 밤과 정적을 선택합니다. 그녀에게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색채(발몬뜨식)가 아니라, 내면의 어둠 속에서만 감지되는 투명한 무엇입니다.

∎ 절제된 언어: 발몬뜨의 시가 물결치듯 흐른다면, 기삐우스의 언어는 얼음 결정처럼 단단합니다. "향기도 없고 색깔도 없다"는 표현은 감각적 유혹을 거부하는 그녀의 지성적인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3. 결정적 차이점 비교: ‘나’를 대하는 방식

두 작가의 차이는 시 속에서 ‘나(자아)’가 고통이나 갈망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비교 항목: 발몬뜨의 자아 - 기삐우스의 자아

∎ 세계를 향한 시선: "나는 모든 것을 원한다" (탐욕적 수용) -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실존적 갈망)

∎ 고통의 승화고통조차 미적인 '아름다움'으로 치장함 - 고통을 신에게 닿기 위한 '통로'로 정직하게 응시함

∎ 언어의 리듬파도처럼 밀려오는 유려한 음악 - 성칼날처럼 멈춰 서는 정교한 격언성

발몬뜨에게 상징주의는 세상을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만드는 '안경'이었다면, 기삐우스에게 상징주의는 영혼의 구원을 찾기 위해 자신을 해부하는 '메스'와 같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우리 태양처럼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