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죽은 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by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끄

by 김양훈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죽은 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알렉산드르 블로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죽은 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척, 정열적인 척하는 것은!

그러나 세상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야만 한다.

출세를 위해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를 감추고서…

산 자들은 잠들어 있다. 죽은 자는 관에서 일어나

걸어간다. 은행으로, 재판정으로, 원로원으로…

밤이 하얄수록 악(惡)은 검어지고,

펜은 더욱 장엄하게 삐걱거린다.


죽은 자는 하루 종일 문서와 씨름한다.

일이 끝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의원에게 음탕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벌써 저녁이다. 가랑비가 흙탕물을 뿌렸다.

행인들과 집들, 그 밖의 시시한 것들에게…

또 다른 스캔들을 향해, 죽은 자를

이를 부드득 가는 택시가 태워간다.

인파로 가득한, 수많은 홀을 향해

죽은 자는 서두른다. 우아한 연미복을 걸치고.

호의적인 미소를 그에게 던진다.

바보 여주인과 얼간이 주인이.


그는 관료의 권태로 기진맥진.

그러나 뼈마디의 금속성 소리는 음악에 묻히고…

우정 어린 악수를 굳게 나눈다.

살아 있는 척해야 한다!


기둥 옆에서 연인의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그처럼 죽은 자가 되고.

그들이 나눈 사교계의 흔한 말 뒤로

그대는 진정한 말을 듣는다.


“지친 친구여, 이 홀은 괴이하구먼.”

“지친 친구여, 무덤은 차갑잖은가.”

“벌써 자정이군.”

-“그러게. 한데 자네는 NN 양에게

왈츠를 신청하지 않았군.

-그녀는 사랑에 빠졌어…”

거기서, NN 양은 이미 뜨거운 눈으로

그를, 격정의 피를 지닌 그를 찾고 있는데…

처녀의 아름다움이 깃든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발랄한 사랑의 얼빠진 환희…

그는 그녀에게 헛소리를 지껄인다.

산 자들에게 매혹적인 말들을.

그는 그녀의 어깨가

-장밋빛으로 물드는 것을 본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을 때.


그리고 사교계의 습관적인 악의의 예리한 독을

이승의 것이 아닌 악의로 씻어버린다…

“아, 얼마나 그는 현명한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가!”

그녀의 귓전에 울리는

-타계(他界)의 이상한 소리.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 (1912)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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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25)


창작 배경과 시평
알렉산드르 블로끄의 1912년 작,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죽은 자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대 사회의 영적 타락을 날카롭게 해부한 걸작입니다. 이 시의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작품의 창작 배경

러시아 상징주의와 블로끄의 변화

알렉산드르 블로끄(Aleksandr Blok)는 초기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노래하며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를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의 실패와 뒤이은 제정 러시아의 정체, 그리고 개인적인 비극을 겪으며 그의 시선은 황량한 도시의 현실과 인간의 내면적 파멸로 옮겨갑니다.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연작

이 시는 블로끄의 연작시 <죽음의 무도>(Plyaski smerti)의 첫 번째 시(詩)입니다. 1910년대 초반, 러시아 지식인 사회는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귀족 사회와 관료 사회는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속으로는 이미 부패하여 생명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블로끄는 이를 '살아있는 시체'라는 고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했습니다.


2. 시평: 죽음이 일상이 된 사회의 초상

첫 번째: 생존을 위한 가면무도회

시의 도입부에서 '죽은 자'는 단순히 무덤에 누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출세를 위해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를 감추고 은행, 재판정, 원로원으로 향합니다.

“출세를 위해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를 감추고서…”

여기서 '죽음'은 도덕적·영적 상실을 의미합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본래 모습(영혼)을 죽이고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관료적 인간에 대한 야유로 읽힙니다.

두 번째: 밤의 도시와 화려한 허무

밤이 깊어질수록 악은 검어지고, 죽은 자는 연미복을 입고 사교계로 뛰어듭니다. 블로끄는 여기서 날카로운 대조를 사용합니다.

•음악과 웃음소리 vs 뼈마디의 금속성 소리

•우아한 연미복 vs 차가운 관(무덤)

사교계의 '바보 여주인'과 '얼간이 주인'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사실은 그들 모두가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기에 서로의 '뼈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사랑마저 오염시키는 타락

시의 후반부에서 'NN 양'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유일하게 '생기발랄한 사랑'을 지닌 듯 보이지만, 죽은 자와 접촉하는 순간 그녀 역시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됩니다.

죽은 자가 그녀에게 속삭이는 '매혹적인 말들'은 사실 허구와 기만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불가능해진 사회에서, 열정은 단지 '뼈가 부딪는 소리'를 가리기 위한 소음에 불과함을 시인은 폭로합니다.

3. 총평: 현대인에게 던지는 차가운 경고

이 시는 단순한 공포 시가 아니라, '살아 있으나 죽은 상태'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비극을 그린 사회 비판 시입니다.

∎ 관료주의의 비정함: 서류와 씨름하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죽은 자의 모습은 인간성이 거세된 노동의 현장을 풍자합니다.

∎ 소외와 단절: "무덤은 차갑잖은가"라는 대화는 화려한 파티장 안에서도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고독을 보여줍니다.

∎ 감각적 전율: 마지막 구절에서 여자의 귀에 들리는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는 독자에게 서늘한 진실을 일깨우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가?" 블로끄는 100여 년 전의 러시아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화려한 연미복을 입고 있을지언정, 우리 내면에서 영혼의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만드는 걸작입니다.


Tip: 이 시를 읽을 때 쇼팽의 '장송 행진곡'이나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배경음악으로 곁들여보세요. 블로끄가 의도했던 그 기괴하고도 장엄한 분위기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https://youtu.be/V67F2LRrtSg?si=2lQlvkbrpV9nGUna

쇼팽의 장송 행진곡
Chopin: Piano Sonata No. 2 – Gavrilov
In B flat minor, Op. 35 "Funeral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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