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

by 오시쁘 예밀리예비치 만젤시땀

by 김양훈

레닌그라드

오시쁘 만젤시땀


나는 나의 도시로 돌아왔네, 눈물겹도록 낯익은

정맥처럼, 어릴 적 부어오르던 편도선처럼 친숙한 곳으로.


너는 이리로 돌아왔으니, 어서 빨리 삼키라,

레닌그라드 강변 가로등의 생선 기름을!


어서 빨리 십이월의 낮을 알아보라,

거기엔 불길한 타르에 노른자위가 섞여 있으니.


뻬쩨르부르그여!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

너에게는 나의 전화번호가 있지 않으냐.

뻬쩨르부르그여! 나에게는 아직 주소들이 남아 있으니,

그걸 따라다니며 고인(故人)들의 음성을 찾아낼 테다.

나는 뒷문 계단 위에서 살고 있는데,

살점이 뜯겨나간 초인종이 내 관자놀이를 내리친다.

그리고 밤새도록 문고리의 수갑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귀한 손님을 기다린다. (1930)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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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43)


[註]
1) 레닌그라드(Leningrad):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924~1991년 명칭. 시인이 활동하던 1930년은 스탈린의 1차 5개년 계획과 강제 집단화가 진행되던 시기로, 혁명의 열정은 사라지고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된 시대적 배경을 지닌다.
2) 눈물겹도록 낯익은 / 정맥처럼... 친숙한 곳: 시인이 1930년 10월, 오랜 유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느낀 복합적인 감정. 여기서 ‘정맥’이나 ‘편도선’ 같은 생리적 비유는 도시를 외부 풍경이 아닌 자신의 육체와 고통을 공유하는 유기체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생선 기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하층민이나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먹이던 영양제. 특유의 비리고 역한 냄새와 맛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징한다. 여기서는 레닌그라드 가로등의 탁하고 노란 불빛을 시각·후각적으로 형상화하여 도시의 황폐함을 드러낸다.
4) 뻬쩨르부르그(Petersburg): 시인은 공식 명칭인 ‘레닌그라드’ 대신 옛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를 반복해서 부른다. 이는 구체제에 대한 향수라기보다, 시인이 사랑했던 유럽적 교양과 예술적 자유가 살아있던 ‘문화적 고향’을 향한 절박한 호칭이다.
5) 고인(故人)들의 음성: 1930년대 당시 이미 처형되었거나 수용소로 끌려간, 혹은 망명한 동료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자들의 도시에서 소통할 대상을 잃은 시인의 고립감을 나타낸다.
6) 살점이 뜯겨나간 초인종: 당시 소련의 공동주택(Kommunalka)의 낡고 훼손된 문을 묘사함과 동시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비밀경찰에 대한 공포로 인해 예민해진 시인의 신경증적 상태를 시각화한 표현이다.
7) 귀한 손님: 밤중에 예고 없이 찾아와 시민들을 체포해 가던 비밀경찰(OGPU)을 비꼬는 반어법. 밤새 옷을 입은 채 체포를 기다려야 했던 당시 지식인들의 실존적 공포가 이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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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詩)는 만젤시땀이 아르메니아 여행을 마치고 1930년 가을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직후 집필되었다. 당시 그는 이미 당국에 의해 ‘반동 시인’으로 낙인찍혀 문단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옛 친구들은 사라지고 도시는 낯선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은 채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 시는 그가 겪은 심리적 공황과 곧 닥쳐올 파멸에 대한 예감이 투영된 기록이다.

창작 배경과 시평

오시쁘 만젤시땀(Osip Mandelstam)의 시 「레닌그라드(Leningrad)」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사에서 비극적이면서도 강렬한 울림을 주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단순한 향수를 넘어, 공포 정치의 서막이 시작되던 시기, 지식인이 느꼈던 실존적 공포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1. 창작 배경:

숨 막히는 공포의 서막

이 시가 쓰인 1930년은 소련 역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시기입니다. 스탈린의 권력이 공고해지면서 대숙청의 전조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 귀환과 낯섦: 1930년 10월, 만젤시땀은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고향이자 정신적 고향인 레닌그라드(옛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어린 시절의 따뜻함이 아니라, 감시와 체포의 위협이 도사리는 차가운 도시였습니다.

∎ 아크메이즘(Acmeism)의 몰락: 구체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를 중시했던 아크메이즘 시파의 리더였던 그는, 이미 당국으로부터 '반동 작가'로 낙인찍혀 생계와 생명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 검은 구두 소리: 시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귀한 손님'은 사실 밤중에 들이닥쳐 사람들을 끌고 가던 비밀경찰(OGPU)을 의미합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밤마다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초인종 소리를 기다리는 신경쇠약 직전의 삶을 살았습니다.


Old Photograph of Life in Leningrad in the 1920s

2. 시평:

친숙함의 정맥을 타고 흐르는 '죽음의 공포'

신체적 감각으로 치환된 도시의 기억

시인은 도시를 관찰할 때 화려한 풍경이 아닌 '정맥'이나 '부어오른 편도선' 같은 생리적이고 고통스러운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는 도시가 단순한 외부 환경이 아니라, 시인의 육체와 직결된 아픈 부위임을 암시합니다. 레닌그라드는 이제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 통증을 유발하는 신체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색채의 대비와 불길한 징조

'생선 기름' 같은 가로등 빛, '불길한 타르에 섞인 노른자위' 같은 12월의 낮은 시각적으로 매우 불쾌하고 탁한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이는 찬란했던 황금빛 페테르부르크가 스탈린 체제 아래서 얼마나 오염되고 질식해가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름의 충돌: 레닌그라드 vs 페테르부르크

시인은 제목에서 공식 명칭인 '레닌그라드'를 쓰지만, 본문에서는 절규하듯 '뻬쩨르부르그'를 부릅니다.

"뻬쩨르부르그여!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이는 혁명 이후의 경직된 도시 레닌그라드를 거부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문화와 예술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지키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죽은 지인들의 주소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음성을 듣겠다는 행위는, 이미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에서는 소통할 대상이 없음을 뜻합니다.

초인종과 수갑: 일상이 된 공포

마지막 연에서 '살점이 뜯겨나간 초인종'과 '문고리의 수갑'은 압권입니다. 집 안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문고리가 수갑으로 느껴지는 환각은, 당시 시인이 느꼈던 가혹한 심리적 압박을 드러냅니다. '귀한 손님'이라는 반어법은 곧 닥칠 파멸을 예감하는 시인의 서늘한 냉소입니다.

3. 총평

이 시는 "자신을 키워준 도시가 자신을 잡아먹는 괴물로 변해버린 비극"을 노래합니다. 만젤시땀은 이 시를 쓴 몇 년 후, 실제로 스탈린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용소로 가는 길에 사망합니다.

시(詩) 「레닌그라드」는 한 시인의 개인적인 귀향기가 아니라, 전체주의의 어둠 속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영혼을 위한 진혼곡이자, 죽음 앞에서도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라고 외쳤던 인간 존엄의 마지막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Leningrad.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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