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충직한 책상이여!

by 마리나 이바노브나 쯔베따예바

by 김양훈

내 충직한 책상이여!¹

마리나 쯔베따예바

내 충직한 책상이여!

고맙다, 나와 함께

모든 길 동행해 줘서.

너는 나를 상처처럼 보호해 주었지.

내 글 나르는 노새여!

고맙다, 무거운 짐 지고도

주저앉지 않고, 몽상의 짐

나르고 또 날라주어.

세상에서 가장 엄중한 거울이여!

고맙다, 그렇게

속된 유혹 가로막는 문지방 되어

온갖 환락 가로질러,

모든 저열함 사절해 줘서!

증오의 사자, 모욕의 코끼리―

그 모든 것에 맞서는

견고한 버팀목 돼줘서


산 채로 드러누울 내 죽음의 널판이여!

고맙다, 나와 함께 자라고 또 자라

문필의 작업 이뤄감에 따라

커지고, 넓어져서,

마침내는 놀라서 입을 쩍 벌린 채

테두리를 부여잡아 볼 만큼…

그토록 너는 넓어져서

바닷가 물결처럼 나를 잠기게 했지!


등불을 간신히 못 박아두고는,

곧이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줘서

고맙다! 길목마다 나를 따라잡았지

도망자를 외통수로 맞닥뜨린

체스의 장군처럼,

―제자리로 돌아가!

고맙다, 나를 감시하고

노리고, 덧없는 행복으로부터

멀리 쫓아줘서, 몽유병자를 깨우는


마술사처럼.

전투의 상흔들을

책상은 불타는 단(壇)처럼 쌓아 올렸지.

생생한 자홍빛이여!

내 업적의 단(壇)이여!


고행자의 탑, 입에 걸린 빗장,

너는 내게 왕좌이자 평원이었고,

유대 민중의 바닷길 비춰준

불기둥과 같았지!


그렇게 너 축복받으라!

이마와 팔꿈치, 무릎으로

체감했던, 톱처럼

가슴으로 파고드는 책상의 가장자리여! (1933)

[註1] 여섯 편의 시로 이루어진 연작시 「책상」(Stol)의 첫 번째 시.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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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52)


창작 배경과 시평
마리나 이바노브나 쯔베따예바의 1933년 작 <내 충직한 책상이여!>(Moĭ pis'mennyĭ vernyĭ stol)는 그녀의 망명 시기 후반부에 쓰인 연작시 <책상>의 서시입니다. 이 시는 시인에게 있어 '책상'이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가혹한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성소(聖所)이자 전투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주는 강렬한 자기 고백적 작품입니다.

1. 창작 배경:

파리 망명기의 절정과 '글쓰기'라는 생존법

1933년, 쯔베따예바의 삶은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 물질적 빈곤과 가사의 고통: 파리 근교의 낡은 집에서 그녀는 요리, 세탁, 청소 같은 끝없는 가사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은 모두가 잠든 밤이나 이른 새벽뿐이었고, 그 유일한 허락된 공간이 바로 '책상'이었습니다.

∎ 망명 문단과의 불화: 그녀의 시적 언어는 날로 날카로워졌으나, 보수적인 망명 러시아 문단은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던 그녀에게 책상은 유일하게 "나를 환대하는 영토"였습니다.

∎ 실존적 투쟁: 그녀에게 글쓰기는 취미나 직업이 아니라, "산 채로 드러누울 죽음의 널판"이 될 만큼 처절한 생존의 증명서였습니다.


2. 시의 주요 상징과 평론적 해석

① 책상의 다층적 유비(喩比): Metaphor

시인은 책상을 여러 가지 대상에 비유하며 그 의미를 확장합니다.

∎ 글 나르는 노새: 시인의 무거운 사유와 "몽상의 짐"을 묵묵히 받아내주는 노동의 동반자입니다.

∎ 엄중한 거울이자 문지방: 속세의 환락과 저열함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도덕적·예술적 경계선입니다.

∎ 죽음의 널판: 시인은 책상에서 죽음을 맞이할 각오로 글을 씁니다. 이는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유비(喩比)는 라틴어로 'analogia'에서 유래된 용어로, 비유와 유사한 의미가 있지만, 다른 의미가 더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유비는 어떤 사물의 특성을 다른 사물로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나타내며, 이는 비교, 대응적 존재, 유추와 같은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② '공간'에서 '바다'와 '불기둥'으로의 확장

처음에 책상은 작은 가구로 시작하지만, 시가 진행될수록 그 크기는 무한히 팽창합니다.

"바닷가 물결처럼 나를 잠기게 했지"라는 표현은 시적 영감이 밀려올 때 책상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온 우주로 확장되는 황홀경을 묘사합니다.

"불기둥"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출애굽기에서 유대 민중을 인도했던 불기둥을 인용한 것으로, 책상이 절망적인 망명 생활 속에서 시인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빛이었음을 강조합니다.

③ 고통의 육체성:

"톱처럼 가슴으로 파고드는 가장자리"

이 시의 가장 뛰어난 점은 정신적인 찬양에 그치지 않고, 책상과 접촉하는 시인의 육체적 통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마와 팔꿈치, 무릎"으로 느껴지는 책상의 딱딱한 감촉, 가슴을 압박하는 가장자리의 통증은 글쓰기가 단순한 영감이 아니라 육체적인 고행(Asceticism)임을 보여줍니다.

"고행자의 탑", "입에 걸린 빗장" 등의 시어는 그녀가 스스로를 시라는 종교를 모시는 수도자로 규정했음을 드러냅니다.

3. 종합 평론:

예술적 결벽과 불굴의 의지

이 시는 쯔베따예바가 세상의 모든 유혹과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격리했는지를 보여주는 '고독의 찬가'입니다.

그녀에게 책상은 도망치고 싶은 현실로부터 자신을 붙잡아두는 "체스의 장군(Checkmate)" 같은 존재였습니다. 덧없는 행복에 취해 예술적 긴장을 놓치려 할 때마다 책상은 그녀를 다시 고통스러운 창작의 자리로 불러들입니다.

"전투의 상흔들을/책상은 불타는 단(壇)처럼 쌓아 올렸지"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시는 이 책상이라는 제단 위에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쳐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결론적으로 <내 충직한 책상이여!>는 비루한 일상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자기 구제책이자, 자신을 지탱해 준 유일한 물리적 실체에 대한 눈물겨운 감사의 기록입니다. 쯔베따예바는 이 시를 통해 "세상이 나를 버릴지라도, 내 앞의 책상이 있는 한 나는 여전히 왕좌에 앉은 대공(大公)이다"라는 자부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핵심 요약:

∎ 성격: 예술적 고행의 고백, 사물에 대한 찬가

∎ 주제: 글쓰기를 통한 자기 구원과 세속적 유혹에 대한 거부

∎ 특징: 책상을 노새, 거울, 널판, 바다, 불기둥 등으로 변주하며 시적 긴장감을 극대화함.

이 시는 쯔베따예바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로, 그녀가 왜 '불 속에서 사는(Vivre dans le feu)' 시인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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