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고향 땅에서 사는 데 지친 나는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고향 땅에서 사는 데 지친 나는
광활한 메밀밭 그리워
내 오두막 내던지고
부랑자 도둑인 양 떠나리.
한낮의 뭉게구름 따라서
초라한 거처 찾아 나서리.
사랑하는 벗은 나를 노리고
장화 목에 칼을 갈겠지,
봄날 초원의 햇빛이
누런 황톳길에 감도는데
그 이름 나에게 소중한 그녀는
문턱에서 나를 쫓아내리.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온 나는
타인의 기쁨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녹음 우거진 저녁 창틀 아래
내 옷소매로 목을 매리.
바자울 곁 잿빛 버드나무들
다정하기 그지없이 고개 숙이리.
씻기지 않은 채로 나는
개 짖는 소리 아래 땅에 묻히리.
달은 호수 속에 노를 빠트린 채
하염없이 떠다니리…
루시 또한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리.
울타리 곁에서 춤추고 울면서, (1915)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
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56)
러시아의 '마지막 농촌 시인'이라 불리는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Sergei Alexandrovich Yesenin)의 이 시는 그가 불과 20세였던 1915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청년기 특유의 방랑 기질과 함께, 장차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될 비극적 정서가 예언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루시(Rus)'를 사랑한 이방인의 탄생
이 시가 쓰인 1915년은 예세닌이 고향 랴잔(Ryazan)을 떠나 대도시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 농촌과 도시 사이의 괴리: 예세닌은 농촌의 아들이었으나 도시의 화려한 문학적 삶을 동경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도시는 그에게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반대로 고향은 그가 떠나온 뒤에도 끊임없이 그를 끌어당기는 애증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그림자: 당시 러시아는 전쟁의 포화 속에 있었고, 전통적인 러시아 농촌 공동체(루시)는 붕괴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고향의 상실을 미리 감각했습니다.
▪ 부랑자(Hooligan) 이미지의 구축: 예세닌은 스스로를 '부랑자' 혹은 '도둑'에 비유하며 기성의 질서나 안락한 정착을 거부하는 반항적 자아를 형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2. 시평: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영원한 회귀
거부당한 방랑자의 비극
시의 전반부에서 화자는 고향의 안락함을 버리고 떠나지만, 그 길은 축복받지 못합니다. 친구는 칼을 갈고 소중한 그녀는 문턱에서 그를 쫓아냅니다. 이는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모티프와 연결되며, 순수한 영혼이 현실 세계(고향조차도)에서 발붙일 곳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자살 예보와 처절한 귀환
4연에서 묘사된 '옷소매로 목을 매는' 장면은 매우 강렬하고 충격적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울한 상상이 아니라, 자신을 거부한 고향 땅의 일부가 되기 위한 최후의 수단입니다. 도시에서도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는 고향 집 창가에서의 죽음이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예세닌이 10년 뒤 호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이 시를 더욱 소름 돋는 '자기 예언'으로 만듭니다.
'루시' – 슬픔 속에서 계속되는 삶
마지막 연에서 '루시(Rus, 고대 러시아를 일컫는 이름)'는 화자의 죽음과 무관하게 흘러갑니다. 달은 호수 위에 떠 있고, 사람들은 울타리 곁에서 춤추고 웁니다. 이는 개인의 비극적 죽음조차 포용하는 러시아 땅의 거대한 생명력과 허무주의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3. 요약 및 감상
이 시는 예세닌 문학의 핵심 키워드인 '자연, 방랑, 죽음, 그리고 러시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수작입니다.
▪ 색채 대비: '누런 황톳길', '녹음 우거진 저녁', '잿빛 버드나무' 등 선명한 색채어들은 비극적인 내용을 오히려 한 폭의 회화처럼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 서정적 패러독스: 자살이라는 끔찍한 소재를 '다정하게 고개 숙이는 버드나무'와 '개 짖는 소리' 같은 지극히 평화롭고 향토적인 이미지와 결합함으로써 독자에게 더 큰 슬픔과 여운을 남깁니다.
결국 예세닌은 이 시를 통해, 비록 삶은 지치고 세상은 나를 밀어낼지라도, 자신은 영원히 러시아의 흙과 소리 속에 묻히고 싶은 '영원한 농촌의 시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