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숲의 짙은 머리채 너머
쎄르게이 예세닌
숲의 짙은 머리채 너머
고요하고 푸른 공간 속에
곱슬털 새끼양 같은 달이
하늘색 초원을 산책한다.
억새풀 무성한 잔잔한 호수에
초승달이 재 뿔을 박고
저 멀리 오솔길에서 흘러온 듯
물결이 기슭을 적신다.
초원은 초록 휘장 아래
귀룽나무꽃으로 향을 피우고
골짜기 뒤편 비탈 위로
새빨간 노을이 휘감긴다.
오, 나래새¹ 풀숲이여,
너 평탄하여 내 맘에 친근하다.
너의 무성함 속에
늪지의 우수가 어려 있구나.
너도 나처럼 구슬픈 성찬식에
누가 네 친구이고 적인지 잊은 채
진홍빛 하늘과
비둘기 구름 그리워하는구나.
이윽고 푸르른 지평선 위로
조심스레 너에게 드러나는 어둠,
너의 시베리아 족쇄,
우랄산맥의 굽은 등. (1916)
[註1] 나래새 속(屬)은 벼과의 속이다. 여러해살이 초본식물 300여 종으로 이루어진 큰 속이며, 여러 종이 여물로 쓰인다. 한국에서 자생하는 4종은 나래새, 가는나래새, 참나래새 및 수염풀이다. 나래새라는 이름은 날개(나래)가 있는 새(선형의 좁은 잎이 달린 풀, 벼과 식물을 총칭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일본어 우모(羽鳥)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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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57)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Sergei Alexandrovich Yesenin)은 '러시아의 영혼'을 노래한 전원시인으로 불립니다. 1916년 발표된 이 시는 그가 고향에 대한 깊은 애착과 러시아의 원초적인 자연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1. 창작 배경:
'마지막 농촌 시인'의 탄생
이 시가 쓰인 1916년은 예세닌의 초기 시기 중에서도 가장 찬란했던 때입니다. 랴잔 주(州)의 농촌 마을인 콘스탄티노보에서 태어난 그는 상경한 후에도 늘 고향의 자연을 그리워했습니다.
▪ 농촌의 이상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17년 혁명의 전조가 흐르던 시기, 예세닌은 급변하는 정치적 격동보다는 러시아 농촌의 순수함과 종교적 상징성에 집중했습니다.
▪ 신전원파 시인들: 그는 당시 클류예프 등과 함께 '신전원파(New Peasant Poets)'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과 민속적인 색채를 결합하여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사원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 전쟁의 그림자: 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족쇄'나 '어둠' 같은 표현은 당시 전쟁과 불안한 시국이 평화로운 전원 풍경에 드리운 그림자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2. 시평:
색채와 상징으로 그려낸 고독한 풍경화
역동적인 색채와 의인화
예세닌은 자연을 단순히 관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묘사합니다.
▪ "곱슬 털 새끼양 같은 달": 달을 살아있는 동물로 비유하여 '하늘색 초원(하늘)'을 산책하게 만드는 감각적인 표현은 예세닌 시학의 정수입니다.
▪ 진홍빛과 푸른색의 대비: 초록색 휘장, 빨간 노을, 푸른 공간, 진홍빛 하늘 등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화려함을 극대화합니다.
자연 속에 깃든 종교적 영성
시인은 자연의 풍경을 성스러운 의식으로 치환합니다.
귀룽나무꽃 향기는 성당의 향(香)이 되고, 시인이 느끼는 우수는 "구슬픈 성찬식"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자연이 곧 신이 거처하는 성소이며, 그 안에서 느끼는 고독조차 신성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개인적 고독과 조국(러시아)의 비극
4연부터 시의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초원의 무성함 속에서 시인은 '늪지의 우수'를 발견합니다.
"시베리아 족쇄"와 "우랄산맥의 굽은 등": 이 표현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광활한 러시아의 영토(시베리아, 우랄)는 찬탄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중의 고통과 유배, 억압의 역사가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초원과 동일시하며,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겨진 러시아적 비애(Toska)를 노래합니다. 결국 이 시는 아름다운 자연 예찬을 넘어, 그 땅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숙명적으로 짊어진 고독과 연민을 담고 있습니다.
3. 총평
이 작품은 예세닌의 '농촌에 대한 향수'와 '범신론적 자연관'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입니다.
그는 화려한 비유를 통해 러시아의 자연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놓지만, 그 캔버스의 밑바탕에는 늘 지울 수 없는 구슬픔과 숙명적인 어둠이 깔려있습니다. "누가 네 친구이고 적인지 잊은 채" 하늘을 그리워한다는 구절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오직 자연만이 유일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아픈 조국의 얼굴임을 고백하는 시인의 서글픈 독백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