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된 목조 영구차 노래하고

by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by 김양훈

조각된 목조 영구차 노래하고

쎄르게이 예세닌


조각된 목조 영구차 노래하고

평원과 관목림들 내달린다.

또다시 길가에는 작은 예배당

추도식의 십자가 행렬.

귀리 향 가득한 산들바람에

나 또다시 훈훈한 애수를 앓고

석회 바른 종루 향해

손이 저절로 성호를 긋는다.

오, 루시여, 산딸기밭과

강물에 비친 푸른 창공이여,

호수에 어린 너의 우수를

나 기쁘고도 아프도록 사랑한다.


차디찬 비애 측량할 길 없구나,

안개 자욱한 기슭에 너 있으니.

너를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 법

나 도저히 배울 수가 없다.


나, 이 족쇄를 되 물리지도 않고,

오랜 꿈과도 헤어지지 않겠다.

기도문 같은 나래새 풀잎 소리

고향의 초원에 윙윙 울릴 때. (1916)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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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58)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은 '러시아의 영혼을 노래한 농민 시인'으로 불립니다. 1916년에 발표된 이 시는 그가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치 않는 고향 '루시(Rus, 옛 러시아를 일컫는 말)'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노래한 걸작입니다.

1. 창작 배경:

격동의 시기와 '농민 시인'의 탄생

이 시가 쓰인 1916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 당시 러시아 제국은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지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예세닌 역시 군에 징집되어 위생병으로 복무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던 시기입니다.

∎ 사라져 가는 옛 러시아에 대한 향수: 산업화와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세닌은 도시와 전쟁터의 살풍경 속에서 자신이 나고 자란 랴잔(Ryazan) 주의 평화로운 자연과 종교적 정취를 더욱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 신비주의적 애국심: 이 시기 예세닌은 러시아를 단순한 국가가 아닌, 고통받지만 성스러운 '성스러운 러시아(Holy Rus)'로 인식했습니다.

2. 시평:

"기쁘고도 아픈" 운명적 사랑의 기록

이 작품은 예세닌 특유의 서정성과 종교적 이미지, 그리고 고통스러운 애국심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①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풍경

1연의 '조각된 목조 영구차'와 '추도식의 십자가 행렬'은 당시 러시아가 처한 죽음의 그림자를 암시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단순한 비극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영구차가 '노래하며' 내달린다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죽음마저도 러시아라는 거대한 대지의 순환 속에 포함된 일부로 묘사합니다.

② 감각적인 자연 묘사와 종교적 경외

2연에서 시인은 '귀리 향'과 같은 후각적 이미지와 '종루', '성호'라는 시각적·행위적 요소를 결합합니다. 이는 고향의 자연이 그에게는 곧 성소(聖所)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느끼는 '훈훈한 애수'는 슬픔마저도 따뜻하게 감싸 안는 러시아적 정서를 대변합니다.

③ '기쁘고도 아픈' 사랑의 역설

"나 기쁘고도 아프도록 사랑한다."

3연과 4연은 이 시의 핵심입니다. 시인은 러시아의 아름다움(산딸기밭, 푸른 창공)과 그 이면에 숨겨진 우수와 비애를 동시에 봅니다. 그는 조국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이 가진 '측량할 길 없는 비애'까지도 껴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없다'라는 고백은 선택이 아닌 운명적인 귀속감을 나타냅니다.

④ 족쇄가 된 조국, 영원한 고착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족쇄'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구속인 동시에 그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일지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고향 초원의 '나래새 풀잎 소리'에 닿아 있음을 선언하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3. 종합 의견

이 시는 예세닌이 훗날 겪게 될 비극적인 삶과 방황의 전초전과도 같습니다. 혁명 이후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결국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했던 시인에게, 1916년의 이 시는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낙원'에 대한 처절한 절규입니다.

그의 시에서 러시아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기쁨과 아픔이 한데 뒤섞인 거대한 어머니이자 신앙이었습니다. "너를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 법을 배울 수 없다"라는 그의 고백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 서정시의 정수로 남아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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