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번역의 푸시킨 詩
잘 있거라, 마음씨 고운 떡갈나무여!
잘 있거라, 유구한 전원이여!
어느 사이에 지나가버린 나날의
뒤 없는 즐거움이여!
가지가지 기쁨을 맛본
뜨리고르쓰꼬예여, 잘 있거라!
이렇게 즐거움을 누리고저
그대를 영구히 잊어버릴 수 있으랴?
나는 그대의 회상을 안고 가노라,
그러나 마음은 그대 품에 안겨 남겨두고 가노라.
언제고 다시 나는
너의 전원으로 돌아오려 하노니,
(아 그것은 얼마나 즐거운 꿈이냐!)
우정에 가득 찬 자유와 기쁨과
미와 리지의 신봉자 – 나는
언제고 다시 뜨리고르쓰꼬예의 언덕의
보리수 그늘 밑으로 돌아오리라.
(1817년, 18세)
[註] 리지-이성과 지혜
[詩評]
푸시킨 〈잘 있거라 마음씨 고운 떡갈나무여〉
— 백석 번역의 시적 미학을 중심으로
푸시킨의 이 짤막한 이별시는 백석의 번역을 통해 러시아가 가진 투명하고 맑은 서정과 조선어 특유의 정갈한 숨결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백석은 푸시킨을 번역하면서 원문의 절제된 가락과 투명한 감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우리말의 정갈한 숨결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작품을 재창조했다. 특히 이 시에서 떡갈나무와의 이별을 표현하는 간결한 인사말 “잘 있거라”는, 백석의 번역을 거치면서 어느 러시아 시인의 이별을 고하는 구절이 아니라 마치 평생 고향 산천과 대화를 나누어온 늙은 시인의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처럼 들린다.
푸시킨의 원문이 지닌 절제미 역시 백석의 번역에서 고스란히 살아난다. 백석은 원문 속 “Прощай(프라샤이-안녕, 잘 있거라)”라는 단어의 담담한 무게를 가볍게 풀어버리지 않고, 그 말 속에 담긴 ‘돌아올 수 없는 혼자만의 뒷걸음’을 우리말의 단아한 리듬으로 옮겼다. 그의 번역은 감정의 과잉을 허용하지 않으며, 푸시킨의 정직한 감성에 맞는 투명한 주조를 유지한다. 특히 직역인 “푸른(зелёный) 떡갈나무”를 “마음씨 고운 떡갈나무”라 옮긴 점은 단순한 의역이 아니라, 자연물에 인간적 심성을 부여하는 러시아적 낭만주의 전통을 한국어 정서에 맞게 재해석한 놀라운 번역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백석은 푸시킨의 자연을 ‘배경’이 아니라 서로 말을 나누는 벗으로 이해했다. 그의 번역에서 떡갈나무는 그저 숲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화자의 고단한 생애를 묵묵히 지켜봐 준 존재이다. 이때 백석이 구사한 시어는 놀라울 정도로 말수를 줄인다. 과장 없는 평서형 문장, 짧고 한숨처럼 떨어지는 구절들은 푸시킨이 노린 ‘감정의 침잠’을 우리말의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재현한다. 백석 번역의 미학은 바로 이 적을수록 더 깊어지는 언어의 여백에서 완성된다.
또한 백석은 러시아어 고유의 리듬, 특히 푸시킨이 즐겨 사용한 아이앰빅(iambic, 야믹은 시의 리듬을 만드는 기본 단위인 운율적 발(foot) 가운데 하나로, 약강弱強의 박동을 가진 리듬)의 단정한 박동을 한국어의 호흡 단위에 맞춰 부드럽게 조율한다. 한국어 번역시는 러시아어처럼 강약이 분명한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리듬 재현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백석은 강세보다 ‘숨 쉬는 간격’을 살림으로써 푸시킨의 정서를 우리말 속에서 리드미컬하게 재현했다.
예컨대 푸시킨의 단정한 어조는 백석의 번역에서 조금 느리고 조금 더 길게 흘러가며,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어눌한 체념과 조용한 슬픔을 헤아리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석의 번역이 푸시킨의 시적 태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시킨의 이별시는 눈물과 비탄보다 성찰과 수용의 철학을 담고 있다. 백석은 그 철학적 향기를 우리말 속에 다시 길어내듯 옮긴다. 그래서 그의 번역에서는 이별이 비극이 아니라 한 계절이 지나가듯 담담한 일상적 삶의 순환처럼 다가온다. 떡갈나무는 떠나는 화자를 붙잡지 않고, 화자는 떡갈나무에게 과한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푸시킨이 생각한 이별의 미학이고, 동시에 백석 번역 특유의 정직한 시어 선택이 만들어낸 울림이다.
결국 백석이 번역한 푸시킨의 이 시는 두 문학 전통의 아름다운 접점을 보여준다.
푸시킨은 절제 속의 깊이를, 백석은 단정한 우리말 속의 여백을 통해 그 깊이를 다시 되살린다. 그래서 이 번역시를 읽으면 우리는 러시아의 숲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함경도의 어느 산골에서 흙냄새 나는 떡갈나무를 바라보는 듯한 이중의 풍경을 체험한다. 백석 번역이 지닌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푸시킨의 나무는 러시아에 서 있지만, 백석의 언어는 그 나무를 조선의 언덕 위로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독자는 그 앞에서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넨다. “잘 있거라, 마음씨 고운 떡갈나무여.”
이 詩는 딱히 제목이 별도로 없어서 시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시다. 1817년 7월 리체이 졸업 뒤 푸시킨은 어머니 영지인 미하일로프스꼬예 마을로 떠났다. 여기에서 그는 여지주인 쁘라스비야 오시뽀바 여사가 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웃 소유지 뜨리고르스꼬예(Trigorskoye) 마을로 찾아가곤 하였다. 이 시는 그때의 감정을 페테르부르크에 돌아가 회상하며 쓴 것이다.
뜨리고르스꼬예 마을은 미하일롭스코예에서 약 3~4km 떨어진 곳에 있다. 혈기 넘치는 나이, 젊은 푸쉬킨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서 유모 아리나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기는 너무 적적했다. 푸시킨은 거의 매일 말을 타거나 걸어서 뜨리고르스꼬예의 오시포프와 울프의 집을 찾았다. 그곳은 푸시킨의 ‘놀이터’였다.
한편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뜨리고르스꼬예 마을의 여지주 쁘라스비야 오시뽀바의 딸 예프쁘라끄시야(Yevpraxia)의 앨범에 쪽지에 쓰여서 꽂혀있었다고 한다.
Trigorskoye(Тригорское) is an estate located in Russia that holds historical and literary significance. The estate is situated near the town of Pskov, about 20 kilometers southwest of Pushkin Hills. It is most famously associated with the Russian poet Alexander Pushkin.
Trigorskoye became part of Pushkin's life during the years of his exile (1824-1826) by order of Tsar Alexander I. During this period, Pushkin was sent away from the capital, St. Petersburg, due to the perceived rebellious and liberal nature of his writings. While in exile, Pushkin resided at the Trigorskoye estate, and it was here that he wrote some of his most famous works, including the famous novel in verse "Eugene Onegin."
The estate and its surroundings had a profound influence on Pushkin's creativity, and it is often associated with the tranquility and beauty that inspired his literary works. Today, Trigorskoye is a museum dedicated to Pushkin's memory, and visitors can explore the estate, the manor house, and the beautiful natural surroundings that influenced the great Russian po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