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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28. 2024

안산자락길 벙개에 붙여(I)

안산에 얽힌 우리 동네 옛이야기

이번주 토요일 <러시아 문학 읽기모임>에서 안산자락길 벙개를 합니다. 서울은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역사의 흔적이 묻혀 있습니다.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산을 오르내리며 페북 담벼락에 짧은 글과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그 가운데 몇 토막을 소개합니다.

겨울 안산(鞍山) MTB

-2012년 12월 30일     


서대문구에 자리 잡은 안산(鞍山)은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무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를 무악재라 부른다. 한강 건너 가양동 쪽에서 바라보면 안산의 서봉과 동봉 사이가 움푹 들어간 모양새가 마치 말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안산(鞍山)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밖에도 기봉, 봉화뚝, 봉우재, 봉우뚝, 기산, 길마재라고도 하였다. 이런 이름들은 안산 꼭대기에 봉화의 마지막 종착지 남산으로 향하는 봉화대가 있거나, 한강 너머 멀리서 보는 산의 모양이 소나 말 등에 걸쳐놓고 짐을 나르던 길마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조선 개국공신 하륜은 무악(毋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신촌에 궁궐을 짓고 수도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촌은 터가 너무 좁다는 반대가 많아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지금의 북악산 아래 조선의 정궁을 짓게 되었다. 한양 땅에서 동인(東人) 세력들은 동쪽인 낙산(駱山) 자락이 근거지였고,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서인(西人)들은 반대쪽인 이 안산(鞍山) 자락에 모여 살았다. 내 삶의 반 이상을 나는 서인(西人)의 터에서 살아가고 있다. 동서분당의 초기만 해도 서인은 '신권' 강화, 동인은 '왕권' 강화 주장을 깔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당파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나이가 들어도 나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상당하다는 방증이다.     


이 안산(鞍山)의 산길은 호지명 루트처럼 여러 갈래로 소롯길이 갈라진다. 그래서 이 소로는 어지러웠던 70~80년대에는 경찰에 쫓기는 학생수배자들이 신촌에 있는 대학캠퍼스와 도심을 오가는 비밀루트이기도 했다.     


안산은 요즘에는 이 산자락에 사는 서울시민들의 소중한 산책 공간이고, 가벼운 등산로이기도 하다. 용감한 MTB 잔차꾼들은 눈이 쌓인 겨울 안산에서 산악자전거 묘기를 뽐내기도 한다. 17년 전 겨울 풍경이다.


안산(鞍山)의 초여름

-2017년 6월 15일     


서대문구, 서울 도회지 안에도 이런 숲길이 있다. 안산은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면 정상에 동봉과 서봉이 양쪽으로 솟아있는 것이 길마인 마소의 안장처럼 보인다고 안산(鞍山)이란 이름을 붙였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는 무악재라는 고개가 있다. 그래서 안산을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불렀다.     


삼각산의 인수봉은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아기를 업고 도망치는 인수봉의 기운을 막기 위해 안산을 모악(母岳)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잘못 변하여 무악(毋岳)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안산 정상으로 오르는 막바지 언덕에 무악정(毋岳亭)이 있는데, 커다랗게 붙여진 정자의 편액을 무심한 사람들은 모악정(母岳亭)으로 읽는다. '무악정'이라 편액을 쓴 자와 그것을 '모악정'으로 읽는 자, 어느 쪽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모르겠다.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선의 정궁 경복궁

안산에 부는 서북풍(西北風)

-2018년 11월 22일     


안산은 도성을 점령한 이괄(李适)의 반란군과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던 관군이 마지막 승패를 가르던 격전지였다. 지금으로부터 396년 전,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 도원수 장만이 관군을 끌고 와 무악(毋岳)이라고도 불렀던 안산(鞍山)에 진을 쳤다. 북방을 지키던 이괄의 반란군은 조선의 최정예부대였다. 전투 초반에는 이괄의 군대가 관군을 삼킬 것 같았다. 그런데 전투 중 동풍에서 갑자기 풍향이 바뀌더니 안산(鞍山) 쪽에서 강한 서북풍이 몰아쳤다. 관군을 지휘하던 정충신이 때맞춰 고춧가루를 바람에 흘려보내 이괄의 군대가 눈을 못 뜨게 만들었다. 관군의 화살이 쏟아졌다. 반군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안산전투에서 폭삭 망한 이괄은 수구문을 통해 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 지나 이천까지 도망갔다.      


조선 5백 년 임금 가운데 가장 못나고 무능한 임금이 인조다. 삼전도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망신뿐 아니라, 조선의 역사 중 내부 반란군의 침공으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은 인조가 유일하다. 이 혼군(昏君)을 하늘이 도운 것인가? 이 전투로 북방을 지키던 1만 2천 명의 정예군이 사라졌다. 청나라의 침공을 저지할 국방력을 상실한 조선의 왕 인조는 이후 온갖 굴욕을 당해야 했다. 안산(鞍山) 꼭대기에 오르면 인왕산 너머 북악산이 훤히 보인다.      


요즘 북악산 아래로 부는 풍향이 수상하고 어지럽다. 재벌과 보수, 기득권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적폐의 뿌리가 끝도 없어 보인다. 촛불이 불안하고 외로워져 간다. 개혁은 어렵고, 혁명이 더 쉽다는 말이 있다. 썩은 뿌리를 도려내려니 나무까지 죽는다고 아우성이다. 서북풍이 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동네방네] 치마바위

-2020년 6월 1일     


옛적에 서대문을 나와 무악재를 넘은 다음 녹번동으로 가는 산골고개를 넘으려면 홍제천에 놓인 서석게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를 홍제교라고도 부른 까닭은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의 숙소, 홍제원이 근처에 있어서였다. 고풍스러웠을 돌다리 석재는 고종 2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며 모두 가져가 버렸다. 지금은 서석게다리인 홍제교 자리 터를 알리는 표지석만 유진상가 맞은편 길가에 보일듯 말듯 박혀있다.


이 돌다리 아래는 여느 곳보다 냇물이 맑고 내가 깊을 뿐 아니라 한겨울에는 물이 따스워 빨래터로 소문이 났다. 빨래터 중에도 서석게다리에서 논골로 들어가는 백련산자락 너럭바위가 멍석처럼 밋밋하게 내려와 홍제천 냇가에 드리웠는데, 그 모양이 마치 치마폭 같다 하여 사람들은 치마바위라 불렀다. 아낙들이 빨래를 널고 말리기에 더 없이 안성맞춤이었다. 맞은편 안산(鞍山) 능선 자락에도 급경사를 이룬 병풍바위가 있어 가히 볼만 했으니, 봄과 여름에는 멀리에서까지 아낙네들이 빨래감을 잔뜩 이고 지고 모여들었다. 용을 쓰며 때를 벗긴 백의(白衣)가 온통 너럭바위에 널리고, 서답(洗踏)을 마친 아낙들이 하얀 목덜미와 허벅지살을 드러낸 채 머리 감고 미역 감는 산수화(山水畵)를 눈앞에 그려보기 어렵지 않다. 박자 실은 빨래 방망이질 사이사이 소곤대며 호호호 웃는 여인들의 작은 웃음소리는 산새 소리와 함께 시원한 계곡 바람에 흩어지고 맑은 물소리를 따라 한강으로 한강으로 떠내려가기도 하였겠다.     


내가 밤낮으로 애정하는 산수 좋은 이곳 ‘치마바위골’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나무꾼 총각 강화도령을 임금에 앉힌 안동김씨 세력이 철종임금의 촌티 나는 강화도 피붙이들을 강제로 데려와 안주시킨 동네였다. 관리 차원이었음이 분명하다. 도성에서 너무 가까이도 아니고 과히 멀지도 않은 곳이라 그리 정한 것이니, 세도정치 세력이 심모원려(深謀遠慮) 한 정치적 고려였음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동네는 철종임금 원범(元範)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토막토막 전설처럼 전해진다.     

 

천수답이 있던 부근 논골 마을에는 철종(哲宗)의 생모 묘가 있었다. 강화로 귀양 가서 살던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이 순조 30년인 1830년 9월, 고양군에 사는 친구의 장례식에 들렀다 오는 길, 그가 홍제원 부근을 지나는데 소낙비를 피하려고 염 씨 성을 가진 과수 주막집에 머물렀다. 그 사이 이광은 그 집 과부의 딸과 하룻밤 정분을 나누어 옥동자를 얻었는데 이 아이가 훗날 철종이 되었고, 그래서 부전자전(父傳子傳)의 서자(庶子) 대물림이었다는…. 당시 홍제원 주변에는 주막과 여염집이 늘어서 있었는데, 어쨌거나 저 쨌거나 홍제원 골 인절미는 맛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 침략 후, 왜인(倭人)들이 한양 여기저기에 석조건물을 짓기 시작하며 치마바위도 침탈을 당해야 했다. 빨래터는 사라지고 채석장(採石場)으로 변한 것이다. 마주 보는 병풍바위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에도 한참 동안 채석장으로 쓰였는데, 세종문화회관에 쓰인 석재도 이곳 치마바위를 깎아낸 돌이다. 치마바위가 사라진 채석장 빈터에 우리 아파트가 섰다. 5월이 되면 잘려나간 치마허리 그 상처를 등꽃이 모두 감싸 안는다.


안산의 초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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