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비 내리는 동물원
철창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린 고라니들이 나무 아래 비를 피해 노는 동안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어미 고라니가 있었다
사람 엄마와 아이들이 꼭 그렇게 하듯이
아직 광장에 비가 뿌릴 때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임인택, 구둘래, 최재봉기자
2024-10-11 <한겨레신문> 기사 발췌
노벨문학상 한강의 언어들,
어디서 헤엄쳐 왔나
겨울의 언어
작가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와 소설로 아울러 등단(1993·1994년)했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출간한 때가 불과 스물다섯 나이인 1995년이었다. 첫 책에 수록된 단편들 대개가 어둡다.
당시 한겨레와 인터뷰한 작가는 ‘젊은 작가가 왜 그리 슬픈 이야기만 쓰냐’는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슬픈 게 좋지 않아요?”
시로 등단한 지 20년 만인 2013년 내놓은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속 12편의 연작시 ‘거울 저편의 겨울’의 지배적 정서다. 인간 사회, 인류 보편의 ‘추위’에 휩싸인 곡진한 공감.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특히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어떤 소설도 아래 시들의 감성을 지울 수 없다.
추운 곳
오래 추운 곳
너무 추워
눈동자들은 흔들리지 못해
눈꺼풀들은
(함께) 감기는 법을 모르고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거울 속에서
네 눈을 나는 피하지 못하고
너는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거울 저편의 겨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