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기억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들이 늘어난다. 그제는 모자가 사라졌다. 아빠에게 어울린다며 딸애가 건네준 밀리터리룩.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다. 어딘가 숨었다 갑자기 나타나 메롱할 것만 같다. 이틀을 모자 찾을 생각만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라진 것인가 잃어버린 것인가. 무생물이라 잃어버린 것이 옳겠지. 그것들이 저절로 사라질 리는 없어. 두렵다. 잃어버린 기억조차 없는 거야.
새벽바다가 생각이 나. 지금쯤이면 그곳엔 하늬바람이 불기 시작하지. 사라지지도 않고 잃을 수도 없는 그 무소유의 바다. 절벽 위 마른 억새가 수평선을 향해 밤낮 손을 흔들어. 하얀 이빨을 드러낸 파도가 쉬지 않고 밀려오지. 겨울 파도가 몰아치면 그곳은 세상에 없는 장관이야. 그들도 사라질 날이 오겠지. 기억을 잃어버릴 테니까. 블랙홀!
미련을 버리자. 사라지는 것과 잃어버릴 것들. 지난 월요일 그분은 나를 향해 물으셨다. 누구세요? 나는 사라졌고, 그분은 거의 모든 것을 잃으셨다.
다섯 시에 가깝다. 어둠이 몇 센티는 길어졌다. 오늘은 앞베란다 창문을 연다. 해가 돋는 인왕산 아래 무악재를 넘는 보부상들이 보인다. 150리 길이다. 저물기 전 개성에 닿을 셈이면 한나절을 쉼 없이 꼬박 걸어야 하리. 요즘 새로 개통한 한강버스 타고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 벽란도에 내리면 어떨까.
저픈 생각, 웃픈 생각에 또다시 오늘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