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넘어 첫 책, 백세까지 글을 쓴 노년 문학가
해리 번스타인(Harry Bernstein, 1910~2011)은 인생의 황혼기 막바지에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매우 특별한 작가다. 그는 96세라는 나이에 첫 회고록 『보이지 않는 벽(The Invisible Wall)』을 발표하며 전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평생 무명으로 살다가 100세 가까운 나이에 문학적 성공을 거둔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놀랍고 경이롭다. 번스타인의 작품 『보이지 않는 벽(The Invisible Wall)』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 경험한 경계인의 사랑, 가난과 편견의 역사를 담은 하나의 기록이며 서사이다.
번스타인은 1910년 영국 랭커셔에서 폴란드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유년시절의 배경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좁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가난한 공업도시의 풍경이 자리한다. 『보이지 않는 벽』의 제목은 바로 이 거리를 가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상징한다. 그는 이웃과 이웃, 종교와 종교, 사랑과 금기의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을 어린 시절의 체험을 통해 생생히 그려냈다.
그의 가족은 극심한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 사회적 차별 속에서 고통받았다. 번스타인의 어머니는 절망 속에서도 가족을 지탱한 존재였고, 『보이지 않는 벽』은 사실상 그녀에 대한 사랑과 헌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책에는 번스타인의 누이 리리(Lily)가 기독교 청년 아서(Arthur)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유대인 소녀와 비유대인 소년의 사랑은 가족과 공동체의 금기를 무너뜨리는 사건으로, 작가는 이를 통해 종교적 편견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비극적 사랑은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인간이 ‘경계 너머’를 꿈꾸는 자유의 몸부림으로 읽힌다.
번스타인은 청년 시절 미국으로 이민해 평생 잡지 편집자와 사무직 노동자로 일했다. 문학은 그의 생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 루비(Ruby)와의 오랜 결혼 생활 속에서 그는 글쓰기를 버리지 않았고, 67년의 결혼 끝에 루비가 세상을 떠난 뒤, 깊은 상실 속에서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벽』은 바로 그 슬픔의 심연에서 태어난 작품이었다. 그는 “아내가 떠난 후 내 안에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썼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곧 그의 문학의 본질을 말해준다. 번스타인의 글쓰기는 젊은 작가의 야망이 아니라, 상실로부터 생을 다시 회복하려는 행위였다.
『보이지 않는 벽』이 출간되자 평단은 열광했다. 언어는 단순하지만 감정의 깊이는 심연에 닿아 있었다. 노년의 작가가 써낸 유년의 기억은 향수나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연민에 대한 보편적 성찰로 확장되었다. 이어 그는 『꿈의 바다(The Dream)』, 『금빛 선(The Golden Willow)』, 『그 별들 너머(What Happened to Rose)』 등 세 권의 후속 회고록을 발표했다. 각각은 미국 이민자의 삶, 노년의 사랑, 가족의 화해를 주제로 이어지는 일종의 ‘기억 4부작’이라 할 수 있다.
번스타인의 작품 세계는 문학적 화려함보다는 인간의 내면적 진실에 근거한다. 그는 인간의 기억이야말로 시간의 폭력에 맞서는 유일한 저항이라고 믿었다. 그의 문체는 절제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한 세기를 통과한 인간의 체온이 배어 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논평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깃든 도덕적 진실을 더 깊이 탐색했다. 그의 글에는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확신이 들어 있다.
특히 번스타인의 노년 문학은 ‘기억의 구원’이라는 점에서 탁월하다. 젊은 시절의 고통과 상처는 노년에 이르러 언어로 정화되고,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 삶을 다시 의미화한다. 『보이지 않는 벽』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쓰는 행위로써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사랑이 편견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생애 후반부에서 그 믿음을 글로 실천했다.
“삶은 언제나 다시 쓸 수 있다.”
해리 번스타인의 생애는 문학의 시간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젊은 시절의 실패와 늦은 나이의 성공은, 인간의 창조력이 나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100세까지 글을 썼고, 그 글은 여전히 따뜻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의 삶은 이렇게 말한다 — “삶은 언제나 다시 쓸 수 있다.”
번스타인의 문학은 인류의 보편적 경험, 즉 기억과 상실, 사랑과 화해의 이야기다. 그것은 평범한 한 인간의 회상 속에서 발견되는 영혼의 서사이며, 노년의 작가가 세상에 남긴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