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정신의 지층을 따라 고전주의에서 현대까지
러시아 시 문학의 역사는 이 나라의 거대한 문명적 변곡과 전환점에 맞닿아 있다. 여기서 시인이라 함은 단순히 언어의 연금술을 부리는 장인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러시아 영혼의 소유자인 그들은, 그들이 몸소 겪은 시대의 고통과 기쁨, 권력에 대한 항거와 그로 인해 흘린 눈물과 고뇌를 기록하는 역사의 증언자였다. 러시아 시를 시대별로 살펴본다는 것은 곧 이 나라 러시아가 겪어온 그러한 정신사의 지층을 더듬는 일이다.
■ 1. 고전주의와 형성기 — 로모노소프와 데르자빈
18세기 러시아 문학의 기초는 미하일 로모노소프와 가브릴 데르자빈에 의해 놓였다. 로모노소프는 러시아어의 운율 체계를 정립하며 문학 언어를 통일한 인물로, 그의 시는 계몽주의적 이성, 제국의 질서를 상징한다. 데르자빈은 개인적 감정과 국가적 찬가를 결합해 러시아 시에 새로운 윤곽을 제공했다. 그의 시는 제국 러시아의 위엄과 동시에 인간적 연약함을 담은 구조적 복합성을 지닌다.
로모노소프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로모노소프(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Ломоно́сов, 1711~1765)는 러시아의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과학자이다.
아르한겔스크주 출신으로 백해(白海)의 어민이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세 때 가출하여 모스크바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 후 해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에 파견되었다. 5년간의 유학 끝에 1741년 귀국했을 때는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당대 일류의 학자가 되어 있었다. '질량 본존의 법칙' 발견, 오로라 현상의 해명 등은 그의 공적으로 꼽히고 있다. 로모노소프의 문명(文名)은 유학 중 고국에 보낸 송시 〈호친 점령의 찬양〉으로 일찍이 유명했다. 이 시와 함께 쓴 〈러시아 작시법에 관한 서간〉도, 트레자코프스키의 생각을 전개한 것으로서 문학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로모노소프의 작품에는 36편의 송시, 서정시, 우화시 등이 있는데 그가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장려한 송시였다. 이 가운데서도 〈여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즉위일에 붙여서〉, 〈신의 위대함에 관해서〉, 〈아침의 명상〉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고전주의 시인에 걸맞게 고양된 공민정신과 과학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그의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로모노소프는 러시아 문장어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장르에 따라 상이한 문체를 사용해야 한다는 '3 문체론'을 제창했다. (위키백과)
데르자빈
가브릴(가브릴라) 로마노비치 데르자빈(Гаврии́л (Гаври́ла) Рома́нович Держа́вин, 1743~1816)은 장교가 되어 군대복무를 오래 하다가 나중에는 문관이 되었다. 40세가 다 되어 <펠리차>라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찬양한 한 편의 시를 그녀에게 바쳤고 이 시로 일약 문명(文名)을 떨쳐 관직도 높아졌다. 데르자빈의 시는 고전주의적 장중성은 있으면서도 답답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다. 또한 문체는 우미하면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았으며 화려하면서 동시에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었다. 18, 19 양 세기에 걸쳐 시단에 군림하면서 국가의 영광, 철학적 사색, 생활의 기쁨을 노래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데르자빈은 1743년 7월 14일 카잔 지방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6년 7월 20일 노브고로드 지방의 즈반카에서 죽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데르자빈은 카잔의 김나지움을 마치고 1762년 사병으로 입대했고, 1772년 장교로 임관되었다. 1773년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나자 그의 소속 부대는 반란군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이 사건 이후 17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무부 관리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공직 생활 26년 동안 올로네츠와 탐보프의 지방 장관과 상원 의원, 그리고 법무장관을 지냈다. 관리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데르자빈은 18세기 러시아 시인으로서 독창적인 서정시와 송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바치는 송시 <펠리차>(1782)를 발표하면서부터다. <펠리차>는 전체가 260행으로 구성된 송시로서, 한편으로는 계몽 군주로서의 예카테리나 여제를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하들의 아첨과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그 송시를 바쳐 여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계관시인이 되는 명예를 얻기까지 하였다. 한동안 여황제의 개인 비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 때문에 1803년 공직에서 물러나 노브고로드 지방의 즈반카에 있는 영지로 돌아와 생활했다. 이곳에서 그는 시와 산문, 드라마와 회고록을 쓰면서 만년을 조용히 지냈다.
데르자빈의 다양한 시들을 소재나 주제에 따라 그룹을 지어보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시는 크게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의 인생의 쾌락을 노래한 시로 구분된다. 데르자빈의 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말년에 집중적으로 창작한 아나크레온풍의 시들이다. 그 시들은 즐겁고 감각적인 관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삶에 대한 예찬과 사랑으로 고취되어 있다.
■ 2. 황금시대 — 푸시킨과 레르몬토프
19세기 초는 흔히 ‘러시아 시의 황금시대’라 불린다. 그 중심에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있다. 그는 러시아 문학 언어를 완성했고, 시와 산문, 극을 아우르며 "러시아 문학의 태양"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푸시킨의 시는 자유, 사랑, 운명을 다루면서도 일상의 말투를 품고 있어 곧바로 민족적 상상력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푸시킨의 후계자로 불리는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낭만주의적 고독, 반항, 실존적 그늘을 러시아 시에 도입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시대와 불화하는 영혼이며, 이는 이후 러시아 문학의 핵심 기질—내면적 고투와 윤리적 긴장—의 원형이 되었다.
푸시킨
그는 모계로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아브람 페드로비치 카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외증조부 간니발은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였으나 표트르 대제에 의해 속량 받아 군인이 되었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표트르 대제가 그의 세례 대부(代父)가 되어주기도 했다. 외조부는 그렇게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 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지중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엄마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가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학창 시절인 1811년(12세), 차르스코예 셀로카스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시인 가브릴리 데르자빈을 감격시켰다.
[관료 생활과 추방]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그는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명석한 판단력을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해 러시아 시단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릴레예프 등과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리얼리즘에의 표현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등의 걸작을 썼다.
[생애 후반]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결혼하였다. 나탈리야는 그보다 13년 연하의 여성으로 첫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1831년 푸시킨은 격렬한 구애 끝에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에 성공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1834년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실력보다는 부분적으로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 기간 중 그의 아내 나탈리야와 황제 표트르 간의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1836년에는 잡지 <SOVREMENNIK>를 간행하는데 참여하였다.
[사망] 1837년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나탈리야가 바람을 피운다고 스캔들을 퍼뜨린 귀족 조르주 당테스와 결투를 벌이다 총상으로 인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평가]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분야에서 간결하고 명료한 그의 시작품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비평가 역시 푸시킨의 작품을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강조했다. 그의 문학작품은 모든 예술사조(ism)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의 측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매우 크며 절대적이다.
레르몬토프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는 러시아 시인·소설가로, 러시아 낭만주의 문학의의 대표자이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모친이 그의 3세 때 죽었기 때문에 펜자주의 귀족인 외할머니 밑에서 귀엽게 자랐다. 다만 외할머니와 부친 사이가 좋지 않아 가정의 행복은 맛보지 못했고 이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성격이나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지나치게 조숙해서 1829년(15세)에 이미 시, 희곡, 소설을 썼고 회화, 음악, 수학에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1830년(16세)에 모스크바 대학 부속 귀족기숙학교를 마치고 모스크바 대학 윤리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했다. 대신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근위표기병사관(近衛驃騎兵士官)이 되었다(1834). 이 무렵까지 그는 이미 평생의 4분의 3을 썼는데 그의 작품에는 바이런의 영향이 크게 눈에 띈다. 1835년 희곡 <가면무도회>(1842)을 썼으나 여전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일약 유명하게 한 것은 1837년(23세), 푸시킨이 결투로 살해당했을 때 쓴 시 <시인의 죽음>이었다. 푸시킨 살해의 진범은 전제주의를 옹호하는 귀족이라고 날카롭게 비난한 이 시는 니콜라이 1세의 분노를 사서 캅카스로 유배 아닌 유배를 당한다. 조모나 시인 주콥스키의 끈덕진 주선으로 10개월 후 러시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동안에 나폴레옹 전쟁을 노래한 시 <보로지노>(1838), 이반 대제 시대를 다룬 역사시 <상인 카라시니코프의 노래>(1838)에서 애국심을 읊었고, 낭만적 서사시 <므츠이리>(1840)에서 자유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노래하고 있다. 1840년 연애에 얽힌 갈등에서 벌어진 결투가 원인이 되어 내전이 한창이던 캅카스로 또다시 추방된다. 이 추방 중에 전년부터 그가 쓰고 있던 유일한 소설 <현대의 영웅>, 15세 이래 계속 퇴고해 오던 서사시 <악마>(1841)가 나왔는데 전자는 러시아 최초의 심리소설이기도 하다.
그의 낭만시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오늘날 러시아 로망스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나 홀로 길을 가네(Выхожу один я на дорогу)>이다. 그는 훗날 많은 가수들이 노래한 이 시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거친 들판으로 난 자갈길을 걸어가면서 자유와 평온을 구하는 자신이 왜 괴로워하며 가슴 아파하는지 자문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감미로운 사랑을 노래하며 참나무 잎과 같은 영원한 푸르름 곧 청춘을 희구하고 있음을 토로하였다.
그의 일생은 비운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1841년 캅카스의 파티고르스크에서 사소한 일로 친구 마르티노프로부터 결투를 도전받아 그의 손에 죽었다. 그의 작품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나 전체적으로 볼 때 자유에의 동경과 찬미, 악마적인 반역의 힘, 행동에의 갈망 등에 넘쳐 있고 사회현상이나 인간심리가 주관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러시아 낭만주의의 시인 가운데 대표자라 할만하다.
■ 3. 사실주의와 근대 전환기 — 튜체프, 네크라소프, 블로크
19세기 중반 러시아 시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표도르 튜체프는 자연과 우주의 암흑적 질서를 탐구한 철학적 서정시의 대가였다. 그의 시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거울로 활용하는 사유의 미학을 보여준다.
반면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농민과 민중의 현실을 시에 담아 러시아적 사실주의의 대표가 되었다. 그의 시는 제도적 폭력과 사회적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았고, 문학을 하나의 윤리적 실천으로 위치시켰다.
20세기 초 상징주의의 대표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혁명의 불안과 신비의 시대적 감각을 상징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그의 시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열, 구원과 파멸의 이중 구조를 통해 러시아 현대시의 문을 열었다.
튜체프
표도르 이바노비치 튜체프(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ю́тчев, 1803~1873)는 러시아의 서정시인이다. 모스크바 태생의 귀족 출신으로서 평생을 외교관 생활로 보냈다. 처음에 푸시킨 그룹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으나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후에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소개로 각광을 받았다. 자연을 테마로 한 철학시가 많고 범신론·이원론적이다. 현실 세계와 이를 지배하는 카오스 간의 대립을 낮과 밤, 빛과 어둠, 선과 악, 사랑과 죽음 등의 상징으로 나타냈는데 이후 상징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애] 튜체프는 1803년 모스크바 근교 옵스투그에서 오래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대부분을 옵스투그에 있는 가문의 영지에서 보냈다. 그의 가족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입각한 지주의 풍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튜체프는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튜체프 자신 또한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대한 특별한 열정을 보였다. 그의 가정교사는 시인이자 번역가로 유명했던 라이치(C. E. Raich, 1792∼1855)였는데, 라이치는 튜체프에게 고대문학과 고전 이탈리아 문학을 탐독하게 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튜체프는 라이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로마시대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그 시를 모방한 시를 쓰기도 했다.
1819년 튜체프는 모스크바 대학교의 문학창작부에 입학했다. 이때 그는 포고딘(M. Погодин), 셰비레프(С. Шевырев), 오도옙스키(В. Одоевский)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 결과 슬라브주의자로서의 시각을 형성하게 된다. 튜체프는 학업에 정진하면서도 많은 시를 썼다. 하지만 튜체프는 학업을 마치자 뮌헨에 있는 러시아 공관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러시아를 떠난다.
유럽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뮌헨에서 튜체프는 소신 있는 외교관이자 문학 애호가로 알려지면서 사교계의 주요 인물이 된다. 이때 그는 셸링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게 되면서 독일 낭만주의와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하이네와는 절친한 친구였다. 튜체프는 하이네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하다. 하이네 외에 실러와 괴테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이 당시 튜체프가 쓴 자작시들은 <망원경>, <북방의 선율>이라는 러시아 잡지에 종종 실리기도 했다.
1826년 튜체프는 페테르손(E. Peterson)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튜체프는 다른 여자와 몇 번의 로맨스를 가짐으로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 그중 데른베르크(E. Dernberg)와의 로맨스는 크게 물의를 일으켜 결국 뮌헨에서 토리노로 좌천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튜체프는 1838년 첫 번째 아내가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배의 침몰로 인해 사망하자 데른베르크와 재혼하고자 했다. 이때 튜체프는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스위스로 갔고, 그 결과 외교관으로서의 자격마저 박탈되기도 했다.
그 이후 몇 년간 독일에 머물러 있던 튜체프는 1844년 러시아로 귀환했으며, 러시아와 서구에 대한 저술에 전념했다. 그 저술 활동에서 튜체프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연합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전 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는 니콜라이 1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황제는 튜체프를 다시 관직에 복귀시켰다. 1848년 튜체프는 페테르부르크 외무부에 특채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서적 검열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튜체프는 곧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과 박식함, 노련한 대화술 등은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시 역시 새롭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850년 <현대인>에 튜체프의 시는 다시 게재되었다. 이와 더불어 네크라소프(Н. Некрасов)의 비평도 실렸다. 네크라소프는 자신의 비평에서 튜체프를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에 견줄 만한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했다. 이후 투르게네프(И. Турге́нев)의 주선으로 튜체프의 시집이 발간되었다. 당대의 많은 시인들 역시 튜체프를 러시아 최고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1850년은 튜체프의 일생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이때 그는 거의 딸과 비슷한 나이인 데니시예바(E. Денисьева)를 만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데니시예바와의 사랑은 사교계의 큰 가십거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데니시예바는 자신의 가문에서 축출되기까지 했다. 데니시예바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튜체프를 사랑하는 대가를 처절하게 치러야 했으며, 1864년 짧았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데니시예바가 죽고 난 후 튜체프는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았으며, 데니시예바를 향한 그리움과 죄의식을 시로 풀어냈다. 러시아에 머물 수 없어서 1년간 외국에 머물기도 했다. 방황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또 다른 슬픔을 경험해야 했다. 데니시예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아이가 죽었고, 어머니와 유일한 동생이 연이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심정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아우에게… (Брат, столько лет сопутствовавший мне...)>(1870)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튜체프는 이미 자신의 삶도 거의 끝났음을 예견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873년 6월에 사망했다.
네크라소프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Некрасов, 1821~1878)은 러시아의 시인, 작가, 평론가, 잡지 편집자이다.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1821년 12월 10일에 러시아 제국 포돌리아현 네미로프(현재의 우크라이나 빈니차주 네미무우리에서 지주 귀족 출신의 러시아 제국 육군 장교인 알렉세이 세르게예비치 네크라소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볼가강 연안과 접한 러시아 야로슬라블주 그레시네보 마을에 위치한 세습 영지에 거주했다.
1832년에는 야로슬라블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퇴했고 17세 183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주했다.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아버지였던 알렉세이 네크라소프는 아들인 니콜라이가 군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아들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청강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세이 니콜라소프는 아들인 니콜라이에 대한 송금을 끊어버리면서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난폭하고 거친 성격을 가진 아버지가 농노를 학대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농노의 아픔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40년에는 자신의 첫 시집인 《꿈과 울림》(Mechty i Zvuki)을 출간했고 1847년에는 표트르 플레트뇨프로부터 문학 잡지 《소브레멘니크》(Sovremennik, 현대인)를 인수하고 문학 평론가, 잡지 편집자로 활동했다.
문학 잡지 《소브레멘니크》는 비사리온 벨린스키,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급진주의 문학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866년에 알렉산드르 2세 황제 암살 시도 사건을 계기로 발매가 금지되었다. 1868년에는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과 함께 문학 잡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Otechestvennye Zapiski, 조국의 수기)를 인수하고 편집자,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878년 1월 8일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치되었다.
블로크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Блок)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귀족 인텔리겐치아 집안 출신이다. 부친과 조부는 대학 교수였고, 외조부는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총장을 역임한 알렉세이 베케토프(А. Н. Бекетов)다. 블로크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 시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사실상 결별했다. 블로크는 외가에서 자라며, 인문적인 가풍 속에서 일찍이 시에 눈을 떴다.
블로크는 1903년 잡지 <새로운 길(Новый путь)>을 통해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등단했다. 1904년 출간된 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Стихи о Прекрасной Даме)≫는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블로크는 이미 초기 시의 이상과 서서히 결별하고 있었다.
첫 시집 출간 이후 1905∼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시인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열기와 격동의 시적 체험을 연이어 상자된 네 권의 시집에 담았다. 블로크는 또한 1908년 ≪서정적 희곡집(Лирические драмы)≫을 출간했다. 블로크는 이후 두 편의 드라마(<운명의 노래(Песня Судьбы)>(1908)와 <장미와 십자가(Роза и Крест)>(1913)를 더 집필했다.
블로크의 창작에 있어 1910년대는 새로운 정신적 토대의 모색과 시의 운명의 본질적인 전환과 더불어 찾아왔다. 블로크는 1911∼1912년 다섯 권의 시집을 세 권의 ≪시 모음집(Собрание стихотворений)≫으로 편찬하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이때부터 블로크의 시는 독자의 의식 속에서 단일한 ‘서정적 3부작’으로서, ‘길의 신화(миф о пути)’를 창조하는 독특한 ‘시 소설’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3부작’의 이상은 시인의 삶과 창작의 토대로 자리했고, 이후의 두 판본(1916년과 1918∼1921년)에서 변함없이 견지되었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21년 블로크는 새로운 판본의 준비에 착수했으나 1권을 마무리하는 데 그쳤다. 편집인으로서 블로크가 펴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시집(Стихотворения Аполлона Григорьева)≫(1916)은 19세기의 잊혀진 ‘마지막 낭만주의 시인’을 부활시켰다.
1915∼1916년에 이르러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현저하게 쇠퇴한다. 자신의 세대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전체의 운명을 그리고자 블로크가 1914년 집필하기 시작한 서사시 <보복(Возмездие)>은 미완으로 남았다. 1차 대전의 암운과 징집은 시인에게 정신적 공동화를 안겼다.
2월 혁명과 더불어 페테르부르크(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블로크는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 관여했다. 1917년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던 블로크는 10월 혁명 이후 ‘혁명이 지닌 정화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고양되어 정신적 소생을 맞이한다. 1918년 1월 마지막으로 찾아온 짧고 격렬한 창조적 열기 속에서 블로크는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서사시 <열둘>과 시 <스키타이>, 그리고 에세이 <인텔리겐치아와 혁명>을 썼다.
마지막 불꽃은 이내 시들었다. 1921년에 이르러 시를 쓸 수 없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블로크는 창작을 대신하여 혁명정부 산하의 문화 기구들에서 일하며 문화 보존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문화철학 강연에 몰두한다. 애초에 블로크의 문화 계몽 활동은 민중에 대한 인텔리겐치아의 책임 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정화의 불길로서의 혁명’의 이상과 전체주의적인 소비에트 관료 정권의 실상 사이의 괴리에 대한 뼈아픈 인식은 블로크를 깊은 환멸과 새로운 정신적 지주의 추구로 이끌었다. 말년의 그의 에세이와 수기를 관류하는 ‘문화의 카타콤’의 모티프가 그렇게 대두된다. 시인이 감당할 수 없었던 말년의 우울은 심장병을 동반한 정신착란으로 심화되었다. 1921년 8월 7일 시인은 영면했다.
[평가] 20세기 러시아의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안나 아흐마토바(Анна Ахматова)는 ‘시대의 비극적 테너’라는 말로 시대의 표상으로서 블로크가 지닌 의의를 갈파했다. 아흐마토바의 말을 빌리자면, “블로크는 비단 20세기 첫 사반세기의 위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시대적 인간, 가장 선명한 시대의 대변자다”. 블로크의 시적 체험이 지닌 진정성과 날카로움은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20세기 러시아 시와 러시아인의 삶에 폭넓은 문학적·정신적 반향을 낳았다. 그의 시는 러시아 예술을 관류해 온 시민적 애국정신과 윤리적 절대주의의 생생한 증거다./블로크는 자신의 생의 의미를 항상 ‘길’의 형상 속에서 모색했다. 그에게 창작은 시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의 반영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상이한 시기에 쓴 시와 서사시들을 독자적인 정신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의 모든 작품은 단일한 예술적 총체였다. 이와 같은 시인의 예술적 이상의 구현이 그가 자신의 시 전체에 부여한 큰 문맥이자 주제인 ‘강림의 3부작(трилогия вочеловечения)’이다. 개별적인 시들은 저마다 장(사이클)의 형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러 장들이 모여 책을 이룬다. 각 권은 3부작의 부분이다. 3부작 전체를 나는 ‘시 소설(роман в стихах)’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시 소설’은 시인의 운명의 이정표들이 투영된 독특한 서정적 일기다.
■ 4. 은시대 — 아흐마토바, 만델슈탐, 마야콥스키
20세기 초 ‘은시대’라 불리는 시기에는 이중적 긴장이 가장 극적으로 응축된다. 안나 아흐마토바는 일상의 언어를 세밀하게 조율해 여성적 감수성과 역사적 상처를 동시에 포착한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인물의 표정, 방 안의 공기, 짧은 침묵 같은 미세한 순간을 통해 전체 시대의 고통을 담아낸다.
오시프 만델슈탐은 언어의 구조와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시인으로, 그의 시 세계는 압축적이면서도 고대적 리듬을 품은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 그의 운명—체제에 의한 추방과 죽음—은 시가 현실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극명하게 증명한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혁명적 열정과 미래파적 실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시의 리듬을 창조했다. 그는 언어를 부수고 다시 세우며 시가 당대 사회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아흐마토프
안나 아흐마토바(Анна Ахматова, 1889~1966)는 소련의 시인이다. 아흐마토바는 필명이며, 본명은 안나 안드레예브나 고렌코(Анна Андреевна Горенко)이다.
러시아 제국에 속하는 오데사(현재는 우크라이나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11세부터 시를 썼으며, 키에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의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교육받았고,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니콜라이 구밀료프를 만났다. 1910년 구밀료프와 결혼했고 1912년 아들 레프를 낳았다. 남편 및 다른 시인들과 함께 모더니즘적 시문학 운동인 아크메이즘(Акмеизм)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남편과 결별하고 아크메이즘 운동은 러시아 혁명으로 소멸되었다. 《저녁(ВЕЧЕР)》(1912), 《Anno Domini MCMXXI》(1922) 등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소련 당국으로부터 부르주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활동을 거의 중단해야 했다. 1940년에야 새 시가 몇 편 출간되었고 전쟁 중 사기를 돋우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거나 시선집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도 스탈린주의의 영향 속에 비판과 찬양이 반복되었다가 스탈린 사후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여 여러 시선집과 평론을 발표하여 큰 호평을 받았고, 여러 외국의 시를 번역·소개하는 일도 하였다.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높아져,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도 국제 문학상을 수여하였다. 1966년 레닌그라드에서 76세로 사망하였다. 사망 후 더욱 높이 평가되었으며,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시의 특색] 안나 아흐마토바는 제정 러시아 말기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역시 시인이었던 남편의 격려에 힘입어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공산화되고 이혼한 남편이 반혁명분자로 처형당하면서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스탈린의 사상통제가 심했던 시절에도 체제나 이념을 찬양하는 대신 서정과 감성을 즐겨 노래하곤 했다. 비밀경찰의 사찰 위험 때문에 수많은 작품이 불태워 없어졌으나 수백 편의 짤막한 서정시 외에 스탈린 치하의 대숙청을 읊은 《레퀴엠》(1940)이 가까스로 남았다. 1953년 스탈린의 사후에야 그의 명성이 복원되고 시들도 되살아나 일반에 읽히기 시작했으며 특히 해외에서 더 유명해졌다.
만델슈탐
오시프 예밀리예비치 만델슈탐(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은 러시아와 소련의 시인이다. 러시아의 문학사조인 아크메이즘(акмеизм)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오시프 만델슈탐은 1930년대 탄압 중에 체포되어 아내 나데즈다 만델슈탐과 함께 국내 유배되었다. 일종의 유예 기간이 주어지자 그들은 러시아 남서부의 보로네시로 이사했다. 1938년에 만델슈탐은 다시 체포되어 소련 극동의 노동 교정 수용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그해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임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만델슈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으니,
야수처럼 어두운 영혼
참으로 슬프나 아름답다.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기에
아예 말할 줄도 모른다.
어린 돌고래처럼
깊은 잿빛 바다의 세상을 헤엄쳐 나간다.(1909)
오시프 만델슈탐(1891~1938)은 스탈린을 풍자했다가 1937년 대숙청으로 끌려가 모든 시와 원고가 불태워지고 비극적인 옥사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에서 발간된 시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문학의 숲 2012)는 사랑과 두려움, 죽음의 초월, 고독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언어로 가득 찬 시집이다. 시(詩)는 불태워진다고 사라질 수 있을까? 그는 떠났지만, 복권 후 아내가 남긴 회상록과 함께 그의 시가 엮어져 세상에 나왔다. 이렇게 끈질긴 시의 생명력이 다시 증명되었다. 그의 사인(死因) 대한 당국의 공식 발표는 47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피해망상으로 고통받다 반미치광이 상태에서 굶주림과 노역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18년 뒤 복권되었지만, 이후 또다시 18년 동안 대중이 그의 시(詩)에 접근할 기회는 원천 봉쇄 되었다. 그의 이름이 러시아의 시인 목록에 빠져 있는 등 보이지 않는 박해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마야콥스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1893~1930)는 소련의 시인, 극작가, 배우이다.
조지아의 한촌(寒村) 바그다티의 산림관(山林官)의 집에서 태어났다. 바쿠 유전지대의 혁명적 분위기가 소년기의 마야콥스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부친 사망 후 모스크바로 옮겨 볼세비키 혁명 운동에 가담했는데, 2년 동안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의 미술학교에 입학, 미래파 시인 그룹에서 활동했다. 그는 과거의 문학유산 및 부르주아 문학에 가담하는 동안 사회에 대한 철저한 반항심을 내보였다. 노란빛 재킷을 허리 아래까지 내려뜨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화려한 시위로 유명해진 마야콥스키는 실제 작품면에서도 <바지를 입은 구름>(1915)이나 <등뼈로 만든 플롯>(1916) 등의 거친 리리시즘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나타냈다. 마야콥스키는 혁명을 '나의' 혁명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고 개인의 역량을 개화시키는 혁명의 승리를 노래했다. 그는 모든 재능을 혁명의 대의명분을 위해 바쳤고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시의 제재(題材)를 찾았다.
그의 시 작법(作法) 또한 혁명적이었다. 토막토막 잘린 짧은 시구문이 그랬고, 의미 및 음조를 강조할 수 있도록 단어를 행으로 나누어 나열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상어의 교묘한 구사와 거친 유머의 사용도 혁명적이었다. 그는 집회나 공장에서 자작시를 자주 낭독했는데 그의 이러한 낭송하기 쉽도록 만든 시는 고정화된 시어의 파괴를 지향했고, 억센 힘과 동적인 비유에 충만해 있었다. 거기에다 뛰어난 서정적 재능과 기발한 발상 및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인해 그의 작품이 단순한 프로파간다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 특히 혁명 초기의 작품이 그러하여 유토피아적이고 예언적인 밝음이 있다.
혁명 전부터 전위시인(前衛詩人)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창조적인 정열이 폭발한 것은 10월 혁명 이후로 1918년 소련 극문학의 제일성(第一聲)이 된 <미스터리 부프>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장대한 비유형식을 빌려 혁명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미래의 사회를 엮은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를 연상케 하는 활력이 있다. 이후, 희곡 <빈대>(1928)와 <목욕탕>(1929)은 몽환희곡(夢幻戱曲), 혹은 기상천외의 풍자적 수법으로 시정인(市井人)의 근성과 관료주의를 폭로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한 서사시 <150000000>(1920)도 공상의 비약과 거친 유머에 차 있다. 20년대에 들어와 미래파의 옛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잡지 <레프>(예술좌익전선)를 발간, 전위적 문학운동의 핵심이 되는 한편, 레닌의 죽음을 노래한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1924)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혁명의 정열을 격렬하게 노래하는 가운데 내부로부터 좌절감이 싹텄고 시사 문제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나 시를 낭독하는 일에도 싫증이 났다.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부과한 의무였으나 그 노력도 헛되어 당시 재편성기에 접어든 문학계의 공적 권위자들이 점점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1930 4월 권총 자살을 했는데 죽기 직전에 쓴 유고에는 "사랑하는 작은 배는 세속에 충돌했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의 자살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스탈린이 그를 소비에트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세르게이 예세닌처럼 냉대를 받지는 않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명성은 높다.
■ 5. 소비에트 시기 — 옙투셴코와 아흐마둘리나
전후 소비에트 시에서는 예프게니 옙투셴코가 양심적 저항과 도덕적 목소리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그의 시는 체제 안에서 가능했던 ‘반대의 언어’를 대표하며, 집단적 기억과 개인의 존엄을 노래했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감성을 러시아 시에 녹여낸 벨라 아흐마둘리나 역시 소비에트 후반기 중요한 서정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시는 사랑, 공포, 시간에 대한 직관적 사유가 돋보인다.
옙투셴코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1932~2017)는 러시아의 시인이자 영화감독이다.
1932년 소련 이르쿠추쿠주의 작은 마을인 지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간그누스는 지질학자이며, 어머니 지나이다 옙투셴코는 가수이다. 그의 성(姓)인 '옙투셴코'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스크바로 이주했으며, 1949년 첫 시를 발표하였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막심 고리키 문학 연구소에서 수학했으나, 1957년 발표한 시 <지마역>으로 인해 "개인주의"라는 비판과 함께 퇴학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옙투셴코는 러시아 대중 사이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은 이후, 니카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어 해빙기가 시작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61년 발표한 시, <바비 야르>를 통해 당시 소련에 퍼져있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곧 러시아에서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같은 60년대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시에는 보리스 옐친을 지지하였으며, 2017년 4월 1일에 사망했다.
아흐마둘리나
벨라 아흐마둘리나(Бе́лла (Изабе́лла) Аха́товна Ахмаду́лина, 1937~2010)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시인, 작가, 번역가이다.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불라트 오쿠자바, 그리고 예브게니 옙투셴코와 더불어 러시아 최고의 원로 시인 네 명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들은 모두 1960년대 ‘새로운 물결’을 타고 등장한 시인들이다. 보즈네센스키가 전위파 시인으로, 오쿠자바가 음유 시인으로, 또 통기타 가수로, 그리고 옙투셴코가 저항 시인으로 인기와 명성을 얻고 있을 때, 아흐마둘리나는 배우로, 시나리오 작가로, 그리고 다재다능한, 문자 그대로 탤런트 시인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보즈네센스키의 실험시나 옙투셴코의 참여시와는 대조적으로 아흐마둘리나는 서정성 짙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시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벨라 아흐마둘리나는 1937년 모스크바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몸속에는 몽골인과 이탈리아계 러시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젊은 날의 모습은 동양 미인을 연상케 한다. 1954년 그녀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시인 옙투셴코와 결혼했다. 고리키 문예전문대학을 다니던 1959년에는 파스테르나크 비판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으나, 그 후 복학하여 1960년에야 졸업을 한다. 그녀는 작가동맹 회원증을 얻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많은 시의 번역, 특히 그루지야 번역시의 탁월성을 인정받아 겨우 작가동맹 회원이 된 이후부터 그녀는 자기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1962년에 그녀의 첫 시집인 ≪현악기≫(1961)가 발표되었는데, 이 시집은 사랑, 영감의 문제, 과거 등 다양한 테마를 다룬 간결한 서정시로 좋은 평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유명한 단편소설 작가 유리 나기빈과 함께 그의 작품인 <맑은 샘>을 시나리오로 개작하는 일을 하다가 그와 재혼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그녀의 첫 번째 장시 <비 이야기>의 일부가 문예지 <그루지야>에 발표되었고, 다른 한 편의 장시 <나의 가문>(1964)이 잡지 <청춘>에 발표되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시 창작보다는 시 번역에 더 열중했으며, 이 때문에 두 번째 시집 ≪음악 수업≫(1969)에서는 새로운 창작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1970년에 들어와 다시 적극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면서 12월에 시인 파벨 안토콜스키와 함께 작가들이 즐겨 찾는 ‘모스크바 우정의 집’에서 저녁 시 낭송회를 열었다. 그 후 계속해서 그녀는 ≪시≫(1975), ≪촛불≫(1977), ≪그루지야의 꿈≫(1977), ≪눈보라≫(1977), ≪비밀≫(1983) 등 많은 시집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 6. 현대 — 브로드스키
소비에트 체제와 충돌 끝에 추방된 요시프 브로드스키는 현대 러시아 시의 세계적 정점을 이룬 인물이다. 그의 시는 윤리, 시간, 존재, 언어의 본질을 정교한 구조로 다루며 망명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된다. 그는 러시아 서정시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고전주의적 절제와 현대적 냉철함을 결합했다.
브로드스키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 1940년 5월 24일~1996년 1월 28일)는 러시아계 미국인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다. 원래 이름은 이오시프 알렉산드로비치 브로드스키(Ио́сиф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ро́дский)이다. 198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 6월 4일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되어 1977년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 1987년 서정적 비가(悲歌·elegy) 작품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않은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964년 5년간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명망 있는 작가들이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덕택에 1965년 사면받았다. 1972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계속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1977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72∼80년에는 중간중간 미시간대학교와 앤아버대학교의 거주 시인으로 있었고 그 밖의 다른 학교에서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 주제들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강렬하고 사색적인 필치로 다루고 있다. 러시아어로 쓰인 초기작품 가운데는 〈운문과 시 Stikhotvoreniya i poemy〉(1965)·〈황야의 정거장 Ostanovka v pustyne〉(1970)이 대표 작품이다. 이들 작품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이 조지 L. 클라인에 의해 영역되어 〈시선집 Selected Poems〉(1973)으로 나왔는데, 특히 유명한 〈존 던을 위한 비가 Elegy for John Donne〉도 실려 있다.
러시아어와 영어로 쓰인 중요한 작품으로 시선집 〈연설의 일부 A Part of Speech〉(1980)·〈20세기의 역사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1986)·〈우라니아에게 To Urania〉(1988)와 산문 모음집인 〈1보다도 작은 Less than One〉(1986)·〈슬픔과 이성에 대해 On Grief and Reason〉(1995)를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와 자신의 인연을 잔잔하면서도 치밀한 문체로 다룬 산문인 〈Fondamenta degli Incurabili〉(1991)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결론 — 러시아 시의 흐름은 무엇을 남겼는가
러시아 시의 역사적 연속성은 자유에 대한 열망, 인간 내면에 대한 집요한 탐구, 언어가 가진 윤리적 역할에 대한 믿음으로 요약된다. 러시아의 시인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모두가 “시어(詩語)를 빌어 당대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 왔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계보를 이어 온 러시아 시문학은 단지 문학의 한 갈래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적·철학적 사건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 기록을 남긴 이들이 바로 러시아의 시대별 대표 시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