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리고 죽음의 장난

by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by 김양훈

첫사랑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저녁, 아늑한 방에는

부드러운 어스름

그리고 그녀, 지나가는 내 손님….

애무 그리고 인사,


사랑스런 조그만 머리의 윤곽,

정열적인 시선의 번득거림,

풀어진 속옷들이

성급히 떨어지는 소리….


초조의 열기와 오싹함….

제쳐진 침대이블….

획 던져지는 구두짝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관능적인 부둥킴

절벽 같은 키스

그리고 침대 위로 떠 있는

금빛 달….


구소련(USSR) 당시 N.A. 도브롤류보프의 선집(選集): 철학 저작들 1권

[詩評]

억압된 시대의 감각적 분출,
그리고 짧았던 불꽃: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의 시 세계와
<첫사랑>을 중심으로

1. 비평가라는 거대한 이름에 가려진 서정시인

러시아 문학사에서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Nikolai Dobrolyubov)는 시인보다는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는 비평가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체르니셴스키와 함께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고, 문학이 민중의 삶과 혁명적 각성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스물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기 전까지 남긴 소수의 시 편들은, 그가 단순히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오히려 그의 시는 억압적인 검열과 사회적 책임감 아래 짓눌려 있던 한 청년의 뜨거운 생명력과 감각적 욕망이 터져 나온 은밀한 통로였다.

2. <첫사랑>:

낭만적 관습을 깨뜨리는 구체적 실재감

도브롤류보프의 시 <첫사랑>은 당대 러시아 시단이 견지하던 ‘첫사랑’의 전형적인 문법을 과감히 뒤엎는다. 흔히 첫사랑이라 하면 순수, 설렘, 정신적 교감, 혹은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을 노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브롤류보프는 이 성스러운 단어를 지극히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현장으로 끌어내린다.

소리의 미학: 시는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를 방 안으로 초대한다. "풀어진 속옷들이 성급히 떨어지는 소리", "획 던져지는 구두짝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사랑의 격정을 묘사하는 데 있어 어떤 유려한 형용사보다 강력하다. 이는 관념적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의 실체를 '물리적 사건'으로 기록하려는 사실주의적 태도다.

절벽의 은유: "절벽 같은 키스"라는 표현은 압권이다. 절벽은 곧 추락과 아찔함을 의미한다. 이는 첫사랑이 주는 도취감이 단순히 행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잃어버릴 듯한 위태로운 몰입임을 보여준다. 시인은 추락의 공포조차 환희로 바꾸는 사랑의 파괴적 힘을 포착해 냈다.

3. 서사적 몽타주와 공간의 변주

이 시는 영화적 기법을 연상시키는 몽타주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저녁의 어스름'이라는 정적인 배경에서 시작하여, '머리의 윤곽'과 '시선의 번득거림'이라는 시각적 포착을 거쳐, 옷가지가 떨어지는 '동적인 소리'로 바뀐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침대 위로 떠 있는 금빛 달"이라는 정지 화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앞서 일어난 관능적인 폭풍을 우주적인 고요함 속에 가두며, 육체적 결합이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을 넘어 하나의 완결된 소우주를 형성했음을 암시한다.

[註]영화 몽타주 기법은 여러 개의 짧은 필름 조각(쇼트)들을 편집하여 하나의 새로운 의미나 이야기를 만드는 편집 기술로, 단순한 짜깁기를 넘어 관객에게 정서적, 지적 효과를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주요 기법에는 쇼트 길이를 조절해 긴장감을 높이는 계량적 몽타주, 내용의 병치로 의미를 만드는 율동적/지적 몽타주, 음향과 영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음조 몽타주 등이 있으며, 쿨레쇼프 효과처럼 쇼트의 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데 활용된다.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는 러시아 영화 제작자 레프 쿨레쇼프가 발견한 영화 편집 기법으로, 무표정한 배우의 얼굴과 다른 사물(음식, 관, 여성 등)이 담긴 숏을 교차 편집하면, 관객은 배우의 표정에서 그 사물에 대한 감정(배고픔, 슬픔, 욕망 등)을 읽어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개별 숏의 의미가 아닌, 숏 간의 관계와 맥락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다는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의 핵심 원리로, 영화의 감정적, 서사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활용된다.

4. 시인으로서의 도브롤류보프:

'진실'을 갈구한 리얼리스트

도브롤류보프가 비평에서 "문학은 삶의 진실을 담아야 한다"고 외쳤던 것처럼, 그의 시 또한 사랑의 '장식된 진실'이 아닌 '가공되지 않은 진실'을 담으려 애썼다. 그는 서정시마저도 감상적인 도피처로 삼지 않았다. 그에게 시는 인간 본연의 욕구와 생명력을 가장 정직하게 기록하는 수단이었다.

사회 비평가로서의 그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국가의 병폐를 진단하고 수술하려 했던 냉철한 의사였지만, 시인으로서의 그는 자기 안의 뜨거운 피를 숨기지 못했던 청년이었다. <첫사랑>에서 보여준 과감한 묘사들은 훗날 러시아 문학이 리얼리즘의 극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정서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5. 결론: 꽃피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우

우리는 앞서 예세닌의 시에서 "모든 것들 또한 지나가리라"는 수용의 미학을 보았다. 도브롤류보프의 <첫사랑> 역시 그 '지나갈 수밖에 없는 순간'의 가장 찬란한 정점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예세닌과 궤를 같이한다. 비록 그는 시인으로 기억되기에는 너무 짧은 생을 살았고, 그의 비평적 업적이 서정성을 가렸을지언정, <첫사랑> 한 편만으로도 그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고 뜨거운 구석을 들여다본 위대한 목격자였다.

6. 작품의 배경에 대하여

이 시는 19세기 중반 러시아 지식인 사회의 엄격한 도덕주의와 종교적 관습 속에서 탄생했다. 당시 급진적 지식인들은 구체제(차르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나 육체적 사랑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도브롤류보프가 보여준 이러한 감각적인 묘사는, 정치적 혁명만큼이나 파격적인 '감각의 혁명'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도브롤류보프(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обролю́бов, 1836~ 1861)는 러시아의 시인, 비평가, 혁명적 민주주의자이다.
그는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사제 집안에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범학교를 마치고, 1857년 잡지 <현대인>의 기고가가 되었다. 처음에는 비평 부문을 이어서 자기가 설치한 풍자 부문을 담당했다. 아 잡지를 거점으로 그가 활약한 시기는 불과 4년 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 혁명 세력의 선두에 서는 비평가로서 큰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문호의 작품을 분석한 <암흑 왕국>(1859, 오스트로프스키)와 <암흑 왕국의 한줄기 빛>(1860, 오스트로프스키), <오블로모프 기질이란 무엇인가>(1859, 곤차로프), <오늘이란 날은 언제 오는가>(1860, 투르게네프), <거세된 무리들>(1861, 도스토예프스키) 등 논문은 모두가 문학작품이란 민중의 이익과 진실을 보호하고 생활의 모순을 독자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계몽적 입장에서 쓴 것이다. 이 논문들은 이후 러시아 리얼리즘 비평의 기초가 되었다. 아래는 영문 번역시.

Death’s Jest

N. A, Dobroliubov


What if I die? 'Twere little grief!

But one fear wrings my breast—

Perhaps Death too, may play on me

A grim, insulting jest.


I fear that over my cold corpse

Hot tears may fall in showers;

That someone, with a foolish zeal,

May heap my bier with flowers;


That friends may crowd behind my hearse

With thoughts of grief sincere,

And when I lie beneath the mould,

Men's hearts may hold me dear;


That all which I so eagerly

And vainly used to crave

In life, may brightly smile on me

When I am in my grave!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가 자신의 요절을 예견한 듯 남긴 이 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살아생전 얻지 못한 것들이 죽은 후에야 주어지는 아이러니'에 대한 두려움과 냉소를 담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인 <Death’s Jest>를 직역하면 '죽음의 농담' 혹은 '죽음의 장난'이다.

죽음의 장난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내가 죽는다면 어떠하리?

-별로 슬픈 일도 아니리!

하지만 한 가지 두려움이

-내 가슴을 쥐어짜나니!

어쩌면 죽음조차 나를 상대로 잔인하고

모욕적인 농담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두려운 것은

나의 차가운 시신 위로

-뜨거운 눈물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누군가 어리석은 열정으로

나의 상여 위에 꽃들을 쌓아 올리는 것;


진심 어린 슬픔에 잠긴 친구들이

운구차 뒤로 떼 지어 몰려오는 것;

그리고 내가 무덤 흙 아래 누웠을 때

사람들이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이 모든 것, 내가 그토록 간절히

그러나 헛되이 갈망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무덤 속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나를 향해

-밝게 미소 짓게 되는 것이 두렵노라!


이 시는 도브롤류보프의 비극적인 생애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평생을 가난, 질병(폐결핵), 그리고 사회적 냉대 속에서 보냈다.

□ 지독한 역설: 시인은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살아서는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사랑과 존경이 죽고 나서야 쏟아지는 상황"을 모욕적이라고 느낀다. 이는 세상의 뒤늦은 인정을 향한 고독한 지식인의 뼈아픈 냉소다.

□ 생의 갈망: 역설적으로 이 시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간절히(eagerly)" 사랑과 꽃, 그리고 친구들의 진심을 원했는지를 보여준다.

□ 예세닌과의 차이: 예세닌이 "모든 것은 지나가니 축복하자"며 평화를 찾았다면, 도브롤류보프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세상의 위선을 경계하며 날 선 비판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도브롤류포프가 죽음에 던지는 이 잔인한 농담(Jest)은 무엇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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