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킬러가 되기로 다짐했다. 물론 연하만 눈 부릅뜨고 골라잡겠단 소리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유가 있다.
나이가 많으면 성숙해지는 줄 알았다. 나는 내가 성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다시 보니 그건 그냥 거만, 아랫사람을 깔보는 어리석음이 장착된 것에 불과했다.
다섯 살 연상에게 첫눈에 반했고, 여덟 살 연상과 몇 번 데이트해보고 다시 다섯 살 위, 한 살 연하를 거쳐 네 살 위, 또 다섯 살 위, 마지막 네 살 위. 전남친이란 게 아니고 만나서 몇 번 저녁 먹고 유사 데이트를 몇 달 한 그런 썸 같은 경우를 말하는 중이다. 모든 경우가 X면 정신이 이것보단 조금 덜 온전하겠지.
마지막 친구를 만나고 확실해졌다. 그래, 모든 사람은 모두 애새끼구나, 나 역시도 애새끼지. 성숙한 사람이 좋았다.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좋았다. 나이가 많으면 저절로 성숙해지는 줄 알았고, 연상을 만나면 정신연령의 고속도로를 타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성숙함은 너무도 상대적인 것이었다. 어느정도 성숙되고 나면 그것은 갈래로 뻗는다. 저리로 빠지고 저기로 뻗치고.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여전히 미성숙할 나의 생각에 따르자면 모든 건 가정교육에서 비롯된다.
엄마 아빠로 이뤄진 일종의 정상 가족이 그에게 존재했냐의 문제인가? 그것은 아니다. 부모가 밥상에 애를 앉혀두고 얼마나 오래 혼내켰냐의 문제인가? 그것 또한 아니다. 그냥 그가 자라온 상황의, 시절의 분위기. 그를 둘러싼 사람과 그들의 언어들. 그가 저녁을 먹고 티비 앞에 앉았을 때 우연히 시청한 그 프로그램 하나가 그의 성인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단어력이 부족한 나는 이 모든 걸 퉁쳐서 '가정교육'이라 정의할 뿐이다.
인간이란 건 약아질 가능성만 가득한 존재일까. 그동안 스쳐온 친구들 중 최고를 뽑으라 하면 단연코 한 살 연하의 친구. 사람은 어리면 어릴수록 상대를 조종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인생은 고집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기에 오늘의 그는 내일의 그보다 '덜 고집적'이다. 그러기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고, 내가 비로소 내가 될 수 있기에 편안함을 느낀다. 물론 그 고집이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방향의 고집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하늘이 나를 그윽이 여겼던 걸까. 운명이라 말하기엔 내가 노력을 좀 했다. 네 살 연하의 친구는 모든 걸 흡수한다. 커플 앱을 깔면서 각자의 생일을 등록하는데 2005란 그의 숫자를 보고 동공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너 나랑 나이 차이를 느껴?"라고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진실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나 또한 동일한 답을 내뱉는 입장. 가끔 어떤 부분에서는 나보다 얘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근데, 또 어떤 부분은 확실히 내가 더 낫다.
Whatever you want, I love your everything.
그냥 지른다. 그냥 말해버린다. 속내는 네가 무엇을 하던 크게 상관하지 않겠단 의미에 가깝다. 네가 무엇을 하든 사랑하겠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다. 성숙함의 갈래를 알게 되면서 내가 정의해온 온전한 사랑이란 역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렇게 사랑이란 말을 아꼈건만 아끼면 뭐가 된다고, 말해서 손해볼 건 없다. 상대의 성숙한 포인트를 찾아내어 사랑을 키우는 것보다 눈에 바로 보이는 부분에 빠지는 게 가볍고 쉽다.
내 성숙함이 이 친구에게 해가 될까? 괘념치 않는다. 사람이란 다 미성숙한 존재고 미성숙한 존재는 책임감이 부족해도 용인된다. 그동안 성숙한 사람을 찾으려 성숙한 척을 했다. 애초에 인간은 성숙해질 수 없는 존재인데. 그러니 역주행을 시도해보는 중이다. 애가 되자. 원초적인 사람이,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무엇이든 흡수하는 사람이 되자.
그러니 애를 만나자. 이것이 내가 연하킬러가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