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2월 [오늘부터 일일-김복희의 12월(난다)]

by Hyun

'사람이 되면 좋겠다'로 문을 여는 김복희 시인의 12월이다.

나의 12월은 어땠나. 집에 갈 준비를 했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했다. 서른다섯 권의 책을 캐리어에 넣고 후회할 것 같아 한국으로 택배를 부쳤고 추가 학기가 두려워 어거지로 공부했다. 후회하기 싫어 너에게 닿고자 했고 정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홉 시간 기차를 타고도 한 시간 차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그곳으로.

너의 모든 몸짓이 큰 의미인걸

‘첫눈에 반해 오래오래 사랑했습니다’라는 말보다 ‘신경은 쓰였지만 사랑한다고 인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습니다’라는 말이 저와 이 대상 간의 관계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처음은 가까워지기 바빴고 다음은 경계하기 바빴다. 서로를 탐색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며 쓸데없는 리액션은 하지 않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기에 알아가보는 시간을 연장했다. 비를 맞으며 걷다보면 상대가 비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언제 쉬어야 할까, 어디서 쉬어야 할까. 다시 걸을 수 있는 비의 정도가 같다면 럭키. 당신은 괜찮은 상대를 만났다.

나누는 계절

눈 많이 내리는 겨울을 난 땅에서 자랄 가장 무늬가 선명하고 묵직한 수박을 그려본다. 내가 이렇게 큰 수박을 사 왔다며 생색도 낼 요량이다. 한겨울에 한여름의 한떄를 과일로 나눌 일, 같이 먹을 입을 떠올리는 일. 나는 이런 게 즐겁다.

여름비 올 때 만난 우리는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야 하는 한겨울에 있다. 옷도 변했고 얼굴도 변했고 마음도 변했다. 아무것도 없이 척박할 것만 같던 우리의 겨울은 꽤나 맛있는 수박을 키워내고 있다. 겨울이 시작될 때쯤, 너의 삶의 들어갈 수 없겠다며 단념했고 이곳에 눈이 내리던 날 난 다시 그곳에 가기로 결심했다. 계절은 시간이고 기회다. 계절이 주는 마음은 프랑스 시장에 놓인 과일 마냥 매일 종류를 달리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넌 너의 생일이 여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일주일 후라고 얘기도 하지 않았지. 부담을 주지 않아 고마웠던 나는 이제 돌아오는 8월 여름을 기다린다.

편지에 남는 것

편지에 한해서는 결코 퇴고를 해본 적이 없다. 편지에 있어서 퇴고를 하면 안 된다는 원칙도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실시간을 담아야 한다는 이유나 내 마음을 퍼붓는 글이라는 이유로, 늘 손 가는 대로, 마음이 넘치거나 부족한 대로 썼다.

며칠 전엔 우리에 관한 편지를 썼다. 퇴고를 하지 않고는 봐줄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 많은데 아껴두느라 머리에 활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우리는 얘기했고 나눴다. 서로가 너무 다르다며 웃고, 네가 안 해줘도 될 말을 할 땐 네가 생각하는 우리의 거리를 느끼며 속으로 울고 겉으로 웃었다. 손과 마음이 원하는 위치로 키보드를 누르면 우리가 그려진다. 네가 알지 못하는 너의 부분에 대해 글을 쓰고 너는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그날의 공기를 떠올려본다.

진심으로 기도해 간절히 소망해

내 마음에 아무 사랑도 없을 때라도. 심지어 상대방이 세상에 대한 아무런 사랑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이 그 사람이 할 사랑까지 다 해주고 싶은 때가 있기에

어제 너의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알려줬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도 이렇게 바로 눈물이 나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의 상황이었을 땐 담담했고 차가웠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나에게 울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너는 말했다. 나를 위로해주는 너의 방식과 눈빛이 따뜻했는데 지금의 나는 너를 위로해줄 수 없어 눈물이 계속 흘렀다. 다시 한번 너는 사과했고 나는 사과하지말라며 짜증을 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눈물이 우리의 경계를 허물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시인의)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특징은 이거에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만나는 누구에게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는 것. 어떤 대화를 해도 주제가 자꾸 내 사랑으로 향해요.

말하려고 말한 것은 아니고 숨기려고 숨긴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생각이 이것뿐이고 나에게 지금 중요한 생각이 너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기차가 고장나 낯선 곳에 들어섰을 땐 몇시간 전까지의 기억을 떠올리며 울었다. 이때의 눈물은 내 마음이 가볍지 않음을 대변해주는 나의 방식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P.S.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이 말을 믿어요. 네, 저는 시인입니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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