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사랑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사람들의 가슴을 같이 절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누구나 다 사랑 주고받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사랑받지 않아도 돼"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테니까. 자신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아차리기조차 힘들 테니까.
그렇게 올해 처음 읽게 된 책은 사랑과 증오, 그리고 복수에 대한 아주 가슴 절절한 소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었다. 제목 자체가 굉장히 익숙한 이 책은 세계고전문학소설이었다. 역시, 제목이 익숙한 데에는 이유가 다 있는 것. 찾아보니 영국에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기까지 했다고(영어 제목은 Wuthering Heights) 흥행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였다면 굉장히 흥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들끓는 감정과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가며 독자를 간질거리게 하는 이야기 때문.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사랑으로 인한 증오로 여러 사람의 죽음과 파멸로 도달한다. 어떻게 이런 막장이 세계고전문학이 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지만, 소설의 인물들의 세밀한 감정묘사로 인하여 한 명 한 명에게 감정이입하게 되고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기다릴 수 없게 만드는 책이었다. 600페이지가 넘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읽히는 이 책은 올해의 첫 책으로 아주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게 해 주었다.
책은 황량한 동네를 록우드라는 인물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인간관계에 넌더리가 난 그는 외딴곳에서 사회에 대한 연을 잠시 끊고 워터링 하이츠에 사는 히츠클리프의 또 다른 저택 드로시크로스에 머물며 인간관계의 단절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히스클리프와의 첫 만남 이후 그에게 관심을 가진 록우드는 워터링하이츠에 거친 눈보라를 뚫고 들어가 그 집에서 살고 있는 헤어튼과 캐서린, 질라와 조셉을 만나고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인간애는 느낄 수 없는 공간에서 거친 눈보라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된 그는 워터링 하이츠의 방에 하룻밤 머물게 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다가 귀신에게 가위까지 눌리게 된다. 그 귀신에 대해 집주인인 히스클리프에게 이야기하자 되려 손님을 쫓아내고 방에서 오열하는 집주인을 보며 록우드는 이 집의 이야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한다. 드로시크로스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돌봐주는 하녀에게 이 집에 깃든 이야기를 알려달라고 하고, 하녀 넬리 딘을 통해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워터링 하이츠에 사는 언쇼가의 주인이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는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려옴으로써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만나게 된다. 교양이 없어 보이는 히스클리프는 언쇼가의 아들 힌들리 언쇼의 증오를 온몸으로 버텨야 했고 캐서린 언쇼는 히스클리프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들이 되었지만 히스클리프는 어딘지 모르게 사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부유한 집 아가씨인 캐서린 언쇼 또한 버릇없게 굴 때가 많았다. 비슷한 또래였던 당시의 하녀 넬리는 이들과 친구로 지내기도 했지만 주인을 모셔야 하는 하녀의 눈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판단들을 록우드에게 이야기하면서 서슴없이 드러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둘의 만남부터 헤어짐, 오해, 새로운 집안의 등장,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오해로 인한 증오의 발전 등이 주가 되는데 서로의 말을 제대로 다 듣지도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다가 히스클리프는 결국 집을 떠나게 된다. 그 결과 캐서린은 결국 드로시 크로스에 사는 에드거 린튼이라는 다른 사내와 결혼을 하게 되고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그녀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자신을 평생 동안 싫어한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리 언쇼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이야기는 계속 복수와 오해, 증오와 안타까움 등이 대를 이어 만들어지게 되면서 끊임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모든 것이 죽어 없어진다 해도 그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할 테고,
다른 모든 것이 있더라도 그가 사라진다면 내게 이 세상은 아주 낯선 곳이 될 거야.
<폭풍의 언덕> 中
한때는 풍요롭고 활기차던 집안이 하녀 넬리를 쫓아내고 사랑의 오해가 점점 강화되면서 싱그러웠던 삶의 터전은 점점 황량하고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곳으로 변하게 된다. 한 번 피폐해지기 시작하는 마음과 집은 속도가 붙어 더 빠르게 파멸로 이어지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어떠한 마음의 힘도 만들어내기 힘들게 한 것 같다. 히스클리프는 사랑하던 여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캐서린을 계속 원망한다. 캐서린이 죽고 나서도 이 세상에 자기를 홀로 남긴 그녀를 저주하며 복수를 위해서만 삶을 사는데 너무 깊었던 사랑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너무 깊은 증오가 되는 것이 참. 아닌가. 어쩌면 너무 깊은 증오도 사랑의 일종인가. 무언가에 대한 강력한 감정은 모두 사랑으로부터 나온 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런 관심을 주기조차 어려울 텐데. 하지만 어찌 이렇게 뒤틀릴 수 있을까. 스스로가 가진 사랑이라는 것이 주변을 보지 못하고 나만을 내세우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이처럼 조용한 대지 밑에서 편안히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리란 것을 아무도 상상조차 못 하리라.
<폭풍의 언덕> 中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깊은 터널을 홀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인 듯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생각과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 더 깊어지지만 결국 그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멀게 만드는. 그리고 만약에 사랑에 의한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 터널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기 어렵다. 어떤 출구로 나가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지는 터널 밖을 나와야 아는 건데, 나와서 마주한 풍경이 마음에 들 지 안 들지는 그때 가서 스스로가 감내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한때 짝사랑 마니아였던 나는 누군가를 좋아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생각들은 그 사람이 아닌 나의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사랑이 이루어지겠지 꿈만 꾸고 지나가는 시간도 너무나도 많았고. 사랑을 올바르게 받지 못했던 과거와 그 과거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현재로 오게 되었을 때, 하지만 사랑을 온전히 받아먹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극은 더 짙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사랑은 어렵고 가끔은 파괴적이다. 그러나 그런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도 눈을 열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익숙지 않더라도 사랑을 온전히 받을 마음을 가지면 그런 어둠 속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어둠의 터널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덜 무서울 테니까. 캐서린의 딸이 히스클리프가 만든 지옥에서 사랑주기를 결심한 것처럼, 히스클리프 밑에서 자란 헤어튼이 증오와 저주, 자기 멸시를 내려놓고 사랑받기를 선택한 것처럼.
오늘 만난 친구가 사랑을 받아먹는 사람이 되자고 한다. 한 동안 주기만 했다면 이제 10년 정도는 그냥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을 받아먹어도 되는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받아먹으라고. 익숙하지 않더라도 해 보라고. 그랬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