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이렇게 두꺼운 책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나는 두꺼운 책은 읽기 전에 '내가 이걸 다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이 과연 이 정도의 두께여야 할 적당한 이유가 있을까'하는 의심이 늘 일어난다. 어떤 책들은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실패를 겪게 되고, 어떤 책들은 두 번째 질문에서 냉소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놀랍게도 1200페이지가 넘는(적어도 내가 읽은 판본으로는 해리포터와 혼혈의 왕자 정도의 크기가 되는 책이었는데 600페이지가 넘는 권 두 권이었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아주, 아주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원래 책이란 첫 100장이 제일 어렵다. 사람과 만날 때에도 친해지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책에게도 시간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그게 첫 100 페이지 동안의 시간이다. 인물들을 만나고 어떤 심리와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되면 인물들이 서로 얽히는 방법과 서로 간에 나오는 관계성들이 정말이지 다양하게 얽혀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인간 하나를 100 페이지 동안 정말 정성 들여 알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닌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정말 세밀하게 독자에게 소개한다.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면모에서부터 가장 추악한 부분까지, 내면에 겪고 있는 다양한 가치와 종교, 고결함 등을 향한 숭고한 투쟁과 동시에 한 없이 얕아서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감정.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온갖 문제들까지. 인간은 한 없이 깊고 아름다우면서 너무나도 얕고 추악하다는 것을 아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야기는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그는 2명의 아내로부터 3명의 아들을 슬하에 두게 된다. 성격이 불 같지만 천성은 착하고 고결함을 사랑하는 드미트리(미챠) 카라마조프, 지적이고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만큼 냉소적이기도 한 이반 카라마조프, 신앙심이 깊고 순수하며 콩가루 같은 카라마조프 가에서 사랑과 화합을 보여주는 알렉세이(알료샤) 카라마조프.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표도르비치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스메르쟈코프. 표도르는 가정적이지 않고 색욕이 강하며 돈에 대한 욕심도 많은 아버지이다. 3명의 아들 중에는 본인이 기른 자식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자만 주고 세상에 아이들을 꺼낸 정도의 역할밖에 한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책의 초반에는 무책임하고 막 나가는 그의 생에 대하여 서술한다. 그가 아내들을 대했던 방식과 본인의 삶을 꾸려 나가는 방식을 통해 이 사람이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을까, 진실한 사랑을 준 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정말 흘러가는 대로의 삶을 읽어 내려가고 나면 하인 그리고리 밑에서 자란 미챠, 할머니 밑에서 자란 이반과 알료샤 등이 아버지에 대한 어떤 감정적 연결점을 가지고 있을지 각자의 판단이 서게 된다. 이는 앞으로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된다.
물론 가정적이지 않은 아버지와 그 밑에서 (정확히 밑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자란 3명의 아들들이 화목한 가정을 이룰리는 만무하다. 미챠와 이반은 아버지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자리 잡아 있고 카라마조프가 아내들을 통해 상속받은 유산 및 아들들 앞으로 가지게 된 다양한 돈들은 이들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표도르의 두 명의 아내는 표도르와 결혼하고 모두 죽게 되었는데 그로 인한 재산 상속의 문제 및 정말 인간의 성격이 안 맞아 부딪히는 문제 등은 이 지붕 아래에서 평온한 날이 하루라도 있을 수 없게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이래서 가족은 따로 살아야 하는 것;;) 그리고 표도르의 하인이자 사생아로 추정되는 스메르쟈코프는 반 미쳤던 자신의 어머니와 표도르에 대한 증오를 품었지만 이를 묘하게 감출 줄 아는 인물로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해준다.
서로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소설의 초반에 늘어놓으면서 각 인물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난 후에는 본격적인 사건이 터지게 된다. 미챠와 표도르가 그루셴카라는 여자를 향해 둘 다 사랑고백에 나선 것..!(아빠와 아들의 사랑싸움이라니 정말 막장의 막장스) 변덕이 많은 그루셴카는 이들의 마음을 둘 다 혼란하게 하는데 이는 예민하고 감정적인 미챠에게는 거의 정신병이 생기게 하는 정도로의 타격을 입힌다. 계속되는 내면의 혼란이 중첩되는 와중에 어느 날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살해되면서 미챠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데....
이 지상에는 바로 그 어리석은 소리가 지나칠 만큼 필요한 거야.
이 세상은 어리석은 소리, 어리석은 일을 발판으로 하고 서 있거든.
만일 그것이 없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우리는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의 것을 알고 있을 뿐이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中
단편소설들이 많아지다 보니 요새는 단편들을 많이 읽었는데, 이러다 보니 진한 장편소설들이 읽고 싶어진 시기가 있었다. 뭐랄까, 진하게 책이랑 사귀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 안에 나오는 인물의 깊은 내면이 어떨지에 대해서 더 알고 이해하고, 이해가 안 되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정말 한 명의 인간을 진하게 사귀듯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올해 고전을 읽겠다는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되면서 그런 진한 사귐들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그 사람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다가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응원하게 되고, 진심으로 같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러다가 그것이 어쩌면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와 똑같이 혼란스러워지는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책 속의 한 인물을 알게 되는 동시에 나 자신도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고찰하게 되는 것 아닐까.
이 책이 좋았던 거는 정말 삶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정말 처절한 삶을 제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 인물의 시선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보여준다. 소개한 인물들은 굉장히 적은 거 같지만 한 마을의 사람들을 거의 다 보여준다. 그만큼 작가가 얼마나 이 이야기의 세계,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다. 거의 조정래 작가님의 <태백산맥>급으로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인물들은 아주 세세하게 다루어냈기 때문에 억지가 없다. 아이, 상인, 농부, 하인, 귀족, 장로, 성인 등 여기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다양하다. 사람을 통해 여행을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나는 당신에게 파를 드렸을 뿐입니다.
아주 조그만 파 한 뿌리 밖에 드린 것이 없습니다. 그뿐이에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中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지점들은 종교에 대한 토론들을 빼먹을 수는 없을 거다. 성인군자시 되던 장로가 별세하자 이틀 만에 몸에서 썩은 내가 나는 반면,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이는 며칠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은 기이한 세상의 일들. 믿음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신과 믿음에 대해 올라오는 다양한 논쟁들에 대한 답을 내리진 않지만 질문을 던진다. 이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들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되는 때에 갑자기 모든 것이 이치에 맞게 생각될 수도 있다는 것.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 잇는 이야기들은 쉽게 정의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가 있다. 언제나 완벽하고 언제나 친절한 사람이기엔 인간은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복잡한 존재다. 복잡해서 깊지만 불완전하기에 얕다. 사랑하기에 깊지만 동시에 사랑하기 때문에 얕다는 것. 늘 옳음과 스스로의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고, 내려진 선택들에 대해서 후회를 계속 반복하는 개인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있다. 언젠가 필요한 사람에게 파뿌리 하나를 건네주는 일이다. 나에게는 사소한 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니 그 생각조차 필요 없다. 어떤 의도나 생각 아무것도 없이 그저, 겨우 파 한 뿌리를 내어 줌으로써 누군가에게 사람의 변화를 만들어주는 것.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흘러갈 수 있는 그저 하나의 선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하루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며 괴로워할 수 있지만 그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스스로가 좋은 사람인지 진정 알 수 없듯이, 진짜 나쁜 사람임도 진정 알 수 없는 거니까, 그저 할 수 있는 대로 누군가에게 파뿌리를 한 번씩 건네주면서 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