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는 수박 향이 났는데 가을이 오고 있는 지금 이 비는 건조한 나뭇잎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바스락하고 추상적이어서 당최 냄새를 뭐라 칭하기 어렵다.
나는 어릴 적에 비 오는 날은 나만의 우산과 비옷과 장화를 갖고 싶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비가 오는 날에는 학교가 더 가기 싫었다. 비를 피해 쓸 수 있는 변변한 우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 성한 우산 하나는 아버지가 출근하실 때 쓰고 가신다. 우산장에 남은 건 잘 펴지지 않거나, 비닐우산인데, 우산살이 꺾어 있어 우산을 펴면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는 우산만 남아있다. 오빠는 변변치 않은 우산을 쓰느니 그냥 비를 맞고 학교에 가곤 했다.
“비가 얼마나 자주 온다고 식구 수 대로 우산을 사니?”
라고 하시면서 엄마는 비 오는 날 우리 집 우산 사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다.
몇 해 전, 미술관에 갔다가 전시 작가의 그림이 그려있는 우산을 샀다. 생각보다 비싼 값을 주고 사서 그런지, 우산에 그려진 그림이 좋아서인지 나는 명화 우산이 퍽 맘에 들었다. 또 대학 다닐 때 남자친구가 사준 흰색의 깔끔한 우산은 솔로 빨아서 깨끗함을 유지하고 몇 년간 쓰고 다녔다. 나는 주방에 장비를 잘 갖추고 요리하는 주방장처럼 비 오는 날 활용 가능한 장비들이 많이 생겼다. 여러 가지 기능과 색깔을 가지고 있는 우산들, 비 올 때만 특별하게 입을 수 있는 비옷, 장화 따위가 내 우산장에 수북하다.
어릴 적 비 오는 날 느끼던 결핍은 나를 우산 부자로 만들었다. 우산도 없이 학교를 뛰어가던 소년에게서는 여름비 수박 향이 났는데, 지금 우산 부자가 된 나는 왜 건조한 나뭇잎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다. 정말 어릴 적 결핍은 다 채워졌을까?
서로 덜 구멍 난 우산을 쓰려고 우산장 속에서 헤매던, 우산을 쫙하고 펴보면서 이것이 더 성한지, 저것이 더 성한지 견주어 보던 그 꼬마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손주를 본다고 한다. 우리 엄마 말처럼 여름날에만 비가 잠깐 와야 하는데, 가을비는 비로 쓸어 담을 만큼 귀하게 내려야 하는데 그 옛날 가을은 다 어디로 가고 나는 왜 어젯밤 내린 비의 양을 걱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괴물처럼 덮치는 비가, 우산도 소용없게 해 나의 우산을 우산장에 숨겨놓는다. 성한 우산을 말이다.
나는 오늘 장 속에 많은 우산 중,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우산을 쓰려고 한다. 수박 향과 나뭇잎 향의 비 내음은 이제 그리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