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몹쓸 놈의 카페인

by 김정

오랜만에 여고 친구들을 만나러 카페에 갔다. 내가 다닌 시골 학교 운동장만 한 주차장에 자동차가 한가득하다.

몇 층 건물에는 카페를 즐기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카페 2층에 빵을 사는 곳이 있는데 줄서기가 한창이었다. 도대체 무슨 빵을 사려고 다들 저렇게 줄을 서고 있을까? 나는 식당이나 카페에 문도 열기 전에 먼저 줄서기 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줌마인 내 눈에는 대형 카페도, 운동장만 한 주차장도, 시간 맞춰 나오는 빵을 사려고 줄 서는 사람들도 모두 신기했다. 우리는 빨간 쌀 빵을 사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다른 빵 판매대로 갔다. 하얀 생크림을 듬뿍 뒤집어쓰고 먹음직한 딸기가 쿡쿡 찔러져 있는 작은 케이크와 소금 빵을 골랐다. 요즘 대세인 단짠 단짠한 빵은 아메리카노와 짝꿍이어서 구색 맞춰 주문했다.


아줌마들의 수다는 여고 시절 도시락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학교는 공부하는 것을 포함해 여럿이 도시락 먹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늘 공부하던 친구랑 미국 가서 부자로 살고 싶다는 친구랑 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간 친구도 점심시간을 함께 한 밥 동무이었다. 한창 수다 중에 친구 한 명이 여름날 학교 교문 안쪽에 심어있던 샐비어 꽃 이야기를 하다가 맥락도 없이 도시락 이야기를 하였다.

여고 2학년 여름이었나? 교실에서 시금털털한 냄새가 났다. 열무김치의 쉰 맛이 도시락 주머니를 뚫고 온 교실에 퍼졌다. 그 냄새는 창피하거나 부끄럽기보다 우리 반 친구들의 배꼽시계를 울려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을 꺼내는 일탈 동기가 되었다. 작은 병에 꼭꼭 담겨 있는 김치 반찬 통은 등굣길 도시락 가방이 앞뒤로 흔들리면서 국물이 새곤 한다. 더운 여름날 김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오는 날에는 국물 샐 것과 냄새를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한다. 다른 친구의 도시락 메뉴는 늘 밥과 고추장이었다. 그 친구는 요즘 말로 핵 인싸 친구이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책상 위에 펼쳐 놓은 도시락 위로 숟가락을 내밀었다. 커다란 양푼에 도시락 서너 개를 넣고 쓱쓱 비벼 먹던 점심시간 이야기로 우리는 모두 잠시 여고생이 되었다.


수다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서너 시간을 훌쩍 넘겼다. 부끄럼 많고 새침했었던 여고생들은 저녁은 무얼 해 먹냐면서 차가 많이 빠진 주차장으로 갔다.

“야들아! 야들아!”

저쪽에서 부르는 큰소리 쪽으로 고개를 일제히 돌아보았다. 여고 때 듣던 정겨운 사투리에 우리는 웃음이 나왔다. 친구는 빨간 식빵을 여러 개 들고 있었다. 줄이 짧아 오래 기다리지 않고 빵을 샀다며 시험 잘 본 아이 얼굴처럼 씩씩했다.


문제는 밤잠이었다. 내가 커피 카페인에 취약하다는 것을 밤잠을 청하면서 깨달았다. 오랜만에 여고 동창들을 만나는 것에 들떠서 “오후 커피 금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큰 컵 아메리카노를 다 마셨으니 오늘 밤은 커피에 홀딱 내어 줄 것이다. 이 몹쓸 놈의 카페인은 지루한 여름 장마처럼 밤새 주룩거리면서 수면을 방해하였다. 커피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밤이 깊도록 그 시절을 추억한다. 커피 덕분에 머리가 맑아지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친구는 빨간 쌀 빵을 어떻게 샀을까? 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맛있는 빵을 사 주고 싶어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서너 번 줄을 서다 못산 그 빵을.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친구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렵게 줄을 서서 샀다고 한다. 그 마음이 두고두고 고마웠다.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친구는 다음엔 자기가 줄서기 잘해서 빵 사 줄 테니 또 만나자고 했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커피가 그리 몹쓸 놈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덕분에 두 번 다시 없을 풋풋한 여고 시절을 그리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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