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와 인간관계

2.7. 나란히 걸으면 대화가 달라진다

by 성효경

오랜만에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왔는데 양재천이나 같이 걷자고. 특별한 용건은 없었다. 그냥 걷자는 거였다.

나란히 걸었다. 학생들 이야기, 연구실 운영 이야기, 가족 이야기. 두런두런. 대단한 주제는 하나도 없었다. 카페에 마주 앉아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걸으면서 하니까 뭔가 달랐다. 말이 더 쉽게 나왔다. 침묵이 찾아와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무가 지나가고, 자전거가 지나가고, 오리가 물 위를 미끄러져 갔다. 풍경이 대화 사이의 빈자리를 채워줬다. 왜 그런 걸까.


눈을 안 마주치면 솔직해진다

정신의학자 앨버트 셰플린은 사람이 대화할 때 몸을 배치하는 방식을 '프레임'이라고 불렀다. 마주 보기와 나란히 서기. 마주 보면 눈 맞춤이 가능해지고, 상대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긴장도 높아진다. 나란히 서면 눈 맞춤이 사라지고, 같은 방향을 본다. 긴장이 낮아지고, 대화가 편해진다.

2021년 다트머스 대학교 심리뇌과학과의 볼트젠과 위틀리 연구팀이 이 차이를 실험으로 보여줬다. 186명에게 아이트래킹 안경을 씌우고 마주 앉아 10분간 자유롭게 대화하게 했다. 연구팀은 두 사람의 동공 크기가 같은 리듬으로 변하는지를 실시간 추적했다. 동공이 같은 타이밍에 커지고 작아지면 두 사람이 같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다. 연구 결과, 눈을 맞추는 순간 동공 동기화가 정점에 달했지만, 눈을 맞춘 직후 급격히 떨어졌다. 눈을 돌리고 나서야 각자 머릿속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각을 가져올 수 있었다. 대화가 굴러가려면 눈을 맞추고, 또 돌려야 한다. 위틀리 교수는 "긴 자동차 드라이브에서 서로를 안 쳐다보는데도 깊은 대화가 잘 되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란히 걸으면 이 '돌리는' 상태가 기본값이 된다. 눈을 맞추고 돌리는 리듬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없다. 물리적으로 마주 볼 수가 없으니까. 같은 방향을 보면서 이야기하면, 눈 맞춤에 따른 긴장 없이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꺼낼 수 있다.

맥길 대학교와 퀘벡 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2023년에 발표한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을 짝지어 앉히고, 가상의 생존 시나리오에서 물품 우선순위를 함께 정하게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이트래킹 장비를 착용했다. 대면 대화에서 두 사람이 실제로 눈을 맞추는 시간을 측정했더니, 전체 대화의 3.5%에 불과했다. 서로의 얼굴을 동시에 쳐다보는 시간도 12%밖에 안 됐다. 나머지 시간에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마주 앉아 있어도 사람들은 대화할 때 서로를 잘 안 본다. 나란히 걸으면 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물리적으로 완성되는 셈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환경에서 자기 개방이 쉬워진다고 설명한다. 눈 맞춤이 없으면 정서적 각성이 낮아지고, 상대의 판단을 덜 의식하게 되면서 더 솔직한 이야기가 나온다. 치료 상담에서 산책 상담이 효과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리듬이 유대감을 만든다

마주 안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함께 걸으면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춰진다. 의식하지 않아도 속도와 보폭이 비슷해진다.

이 리듬의 동기화가 사회적 유대감에 미치는 영향을 2017년 뉴질랜드 빅토리아 대학교의 모건, 피셔, 불불리아 연구팀이 정리했다. 함께 걷기, 함께 노래하기, 함께 박자 맞추기 등 리듬을 공유하는 활동에 대한 42개의 독립 연구(총 4,327명)를 모아 메타분석한 결과다. 리듬 동기화는 협력, 도움 행동, 신뢰, 공감 등 친사회적 행동에 중간 크기의 효과를 보였다. 같이 걷기만 해도 상대를 더 신뢰하고, 더 돕고 싶어진다.

구체적으로 이런 실험들이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윌터무스와 히스(2009, Psychological Science)는 세 번의 실험을 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 참가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은 같은 리듬으로 캠퍼스를 함께 걷게 하고, 두 번째 그룹은 각자의 리듬으로 걷게 했으며, 세 번째 그룹은 걷지 않게 했다. 이후 경제학에서 쓰는 협력 게임(약한 고리 게임)을 시켰다. 그 결과, 같은 리듬으로 걸은 그룹은 상대를 더 신뢰했고(7점 만점에 5.6점 vs 4.1점), 유대감도 높았다(4.5점 vs 2.9점). 협력 수준도 나머지 그룹보다 높았다. 재미있는 건, 같은 리듬으로 걸은 그룹이 기분이 좋아져서 서로 도운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세 그룹의 기분은 비슷했다. 같은 리듬으로 걸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한 팀"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뇌 수준에서도 확인된다. 두 사람이 함께 리듬을 맞추는 동안 각자의 뇌를 동시에 촬영하는 방법(하이퍼스캐닝)을 쓰면, 왼쪽 중전두엽 영역에서 뇌간 동기화가 나타난다. 두 사람의 뇌가 같은 박자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뇌간 동기화가 강할수록, 이후 서로를 돕고 싶어하는 경향이 높았다. 옥시토신을 투여하면 이 사회적 동기화가 더 강해진다는 연구도 있다.

카페에서 마주 앉으면 각자의 리듬이다. 한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다른 사람은 폰을 본다. 몸이 따로 움직인다. 걸을 때는 다르다. 두 사람의 몸이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Pixar Animation Studios - The Steve Jobs Building


스티브 잡스의 산책, 픽사의 아트리움

스티브 잡스는 중요한 대화를 할 때 걸으면서 했다. 신제품 구상, 핵심 인재와의 면담, 어려운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잡스는 회의실 대신 팔로알토 주변을 걸었다.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에 따르면, 잡스는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을 때 항상 "산책하자"고 말했다.

잡스는 이 철학을 건축에까지 적용했다. 2000년 픽사 본사를 설계할 때, 그는 한 가지를 고집했다. 건물 전체에서 화장실을 중앙 아트리움 한 곳에만 두겠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건물 전체에 화장실을 딱 하나만 두려고 했다가 직원들의 거센 반발로 수정됐지만, 핵심 아이디어는 살아남았다. 700명이 넘는 직원이 화장실을 가려면 반드시 아트리움을 걸어서 지나가야 했다. 카페, 우편함, 피트니스 센터, 시리얼 바까지 전부 아트리움에 몰아넣었다. 컴퓨터 과학자, 애니메이터, 경영진이 각각 다른 건물에 있었던 원래 설계를 잡스가 뒤집은 것이다. 사무실 배치가 창의성에 미치는 영향을 잡스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배치가 잘 되어 있으면 사람들이 복도를 지나가다 문턱에서 대화에 참여하는 식의 우연한 교류가 빈번해진다. 잡스가 원한 건 바로 그런 우연이었다.

잡스의 논리는 단순했다. "건물이 협업을 촉진하지 않으면, 혁신과 세렌디피티의 마법을 잃게 된다." 라따뚜이와 인크레더블을 연출한 브래드 버드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공간 낭비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티브는 사람들이 마주치면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픽사의 존 래스터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의 평가는 더 직접적이었다. "스티브의 이론은 첫날부터 작동했다. 이만큼 협업과 창의성을 촉진하는 건물은 본 적이 없다."

화장실을 가려면 걸어야 했다. 걸으면 사람을 만났다. 만나면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토이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인사이드 아웃. 픽사의 작품들이 그 아트리움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회의실에서 마주 앉으면 직급과 위치가 고정된다. 상사와 부하, 발표자와 청중. 걸으면 그 구조가 흐려진다. 나란히 걷는 순간 위계가 약해지고, 대화가 수평에 가까워진다.


그냥 나란히

주말에 하도 아이들이 밖에 산책 나가자고 해서 같이 걷자고 하니 막내가 자기는 다리가 아파서 걷기는 싫다고 한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하면 될지 물어보니 자전거 타고 싶단다. 애들은 둘 다 아직 네발 자전거인데 데리고 나가려면 내가 끌어주고 밀어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빠가 절대로 자전거 못 밀어준다, 혼자서 탈 수 있으면 타자고 약속을 받고 나왔지만, 가다가 첫째가 빈 페달을 저으며 자전거 안 나간다고 울고, 둘째가 또 오르막길에 안 올라가진다고 징징대고. 결국 혼자 자전거 다 끌어주고 다 밀어준다.

중간에 가다가 양재천의 잉어를 만났다. 애들이 잉어에게 밥주고 싶다고 해서 잘 관찰해 보니 근처에 떨어진 작은 열매를 오물오물 먹고 있다. 손이 보라색으로 물들도록 주변에 있던 작은 열매들을 손에 한 가득 주워서 가지고 왔다. 아이가 잉어를 향해 던졌는데 바로 코앞에 떨어졌다. 울면서 아빠한테 던져 달라고 했다. 자전거를 길모퉁이 세우고 다리를 같이 건넜다. 계단도 오르락 내리락했다가 흙 길도 걸었다가 손 잡고 폴짝폴짝 징검다리도 건넜다. 잉어 근처까지 가서 하나씩 열매를 던져줬다.

혼자 걸어도 괜찮다. 하지만 함께 걸으면 거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쑥쓰러워 꺼내지 못했을 이야기가 나오고 함께 걷다보면 추억이 생긴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걷자"고 말해보는 것도 괜찮다. 특별한 용건 없이. 그냥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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