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동안 몸에서 일어나는 일

2.5. 코르티솔 감소에서 해마의 역성장까지, 걷기가 만드는 몸의 최적화

by 성효경

걷다 보면 문득 깨닫는다. 잔뜩 움츠려 있던 어깨가 자연스럽게 내려가 있고, 꽉 쥐고 있던 생각의 실타래가 스르르 풀려 있다는 걸. "기분 탓인가?" 싶겠지만, 이건 착각이 아니다. 우리 몸 안에서 실제로 무언가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느려지면 재부팅을 한다. 백그라운드에서 돌고 있던 프로세스를 정리하고, 메모리를 비우고, 다시 깨끗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걷기가 우리 몸에 하는 일이 이것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심장,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뇌 구조까지. 걷는 동안 이것들이 순서대로 움직인다.


1단계: 심장이 '휴식 모드'로 전환된다

걷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심장이다. 자율신경계는 수초 내에 움직이기 때문에, 발을 떼는 순간 이미 심장 박동의 패턴이 바뀌기 시작한다.

미네소타 대학교의 마크 페레이라 교수 연구팀은 중년 성인 23명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50분간 걷게 했다. 이 중 절반은 수목원 녹지에서 걷고, 나머지 절반은 교외 주택가 보도에서 걸었으며 크로스 체크를 위해 2주를 쉰 뒤 장소를 바꿔 다시 걷게 했다.

실험 결과, 수목원 녹지에서 걸은 사람들의 심박변이도(HRV)가 더 높게 유지되며 몸이 휴식 상태에 들어갔다.

심박변이도란 뭘까. 심장은 두 가지 신경의 지배를 받는다. 교감신경(긴장, 전투)과 부교감신경(이완, 회복). 스트레스를 받으면 교감신경이 심장을 일정하고 빠르게 몰아친다. 메트로놈처럼 정확한 간격으로 박박 뛰게 한다. 이때 심박변이도가 낮아진다. 반대로 편안한 상태에서는 부교감신경이 작동한다. 숨을 들이쉴 때는 조금 빨리, 내쉴 때는 조금 느리게, 미세하게 조절하면서 리듬에 여유가 생긴다. 이 미세한 변동이 심박변이도다. 변동이 크다는 건 부교감신경이 여유 있게 심장을 조율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게 곧 "몸이 쉬는 중"이라는 신호다.

특히 걷기 중반, 15분에서 30분 사이 구간에서 녹지 그룹과 교외 그룹의 차이가 뚜렷하게 벌어졌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초록빛, 피톤치드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뇌의 스트레스 반응을 낮추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용한 녹지를 걷는 행위 자체가 심장을 강제로 휴식 모드로 전환하는 일종의 '디버깅'인 셈이다.

그렇다고 꼭 숲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교외 보도를 걸은 그룹도 수축기 혈압이 유의미하게 낮아졌다. 녹지만큼은 아니었지만, 걷기 자체가 심장에 보내는 신호는 환경에 상관없이 존재했다.


2단계: 코르티솔 감소 - 15분 만의 스트레스 해소

심장이 먼저 전환된 뒤, 조금 느리게 따라오는 것이 스트레스 호르몬이다. 코르티솔은 시상하부에서 뇌하수체, 부신을 거치는 경로(HPA axis)를 통해 분비되어 걷기 시작 후 15분이면 눈에 보이는 변화가 나타난다.

숲에서 15분 걸었을 뿐인데 코르티솔 수치가 14% 낮아졌다. 일본 치바 대학교의 미야자키 요시후미 교수 연구팀이 성인 74명을 대상으로 확인한 수치다. 숲에서 걸은 참가자들의 코르티솔 평균 농도가 9.70에서 8.37 nmol/L로 떨어진 반면, 도심에서 걸은 그룹은 10.28에서 10.01로 약간 감소하는 데 그쳤다.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초록빛과 흙내음이라는 외부 입력값이 몸의 화학적 구성을 실시간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같은 연구팀이 이전에 일본 전역 24개 숲에서 진행한 대규모 실험(280명)에서도 숲에서 걸은 그룹의 코르티솔이 도심 그룹보다 유의미하게 낮게 나타났다. 숲의 초록빛, 흙냄새, 나뭇잎 사이 바람. 이런 것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몸에 직접 작용하는 자극이다.


3단계: 세로토닌 활성화 - 뇌로 향하는 고속도로 개통

걷기가 20분 넘게 이어지면 몸 안에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뇌 안의 화학물질이다.

세로토닌. 기분을 조절하고, 불안을 낮추고, 수면 리듬을 잡아주는 신경전달물질이다. 가장 널리 처방되는 우울증 치료제인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가 이 세로토닌의 농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작동할 만큼, 정신 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걷고 나서 괜히 기분이 나아지는 느낌. 그게 세로토닌과 관련이 있다.

메커니즘은 이렇다. 세로토닌의 원료는 트립토판이라는 아미노산인데, 평소에는 혈액 속 다른 아미노산들과 경쟁하느라 혈액-뇌 장벽(BBB)을 잘 통과하지 못한다. 그런데 걷기 시작하면 근육이 에너지를 쓰면서 경쟁자인 다른 아미노산들을 소모한다. 트립토판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고, 뇌로 더 잘 넘어간다. 막혀 있던 고속도로에서 차선이 뚫린 것과 비슷하다.

다만 이 효과는 운동 강도에 따라 달라진다. 달리기나 자전거처럼 중강도 이상의 유산소 운동에서 트립토판의 뇌 유입이 더 뚜렷하고, 느릿느릿한 산책 수준에서는 제한적일 수 있다. 그래도 걷기에는 리듬감, 햇빛 노출, 풍경 변화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세로토닌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분 전환의 나머지를 이런 요소들이 채운다.


4단계: 도파민 분비 - 보상 회로의 재가동

걷기만으로도 세로토닌의 원료가 뇌로 넘어간다면, 여기서 운동 강도를 조금 더 올리면 어떨까. 걷다가 빠르게 걷고, 빠르게 걷다가 가볍게 뛰어본다. 그러면 다음 단계가 열린다. 도파민이다.

"하고 싶다", "해냈다"는 느낌을 만드는 신경전달물질. 파킨슨병, ADHD, 우울증, 중독 같은 질환이 모두 도파민 시스템의 이상과 관련되어 있을 만큼, 뇌의 핵심 연료에 가깝다.

2024년 포츠머스 대학교와 일본 전기통신대학교의 공동 연구팀이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으로 이를 직접 확인했다. 참가자가 자전거를 타는 동안 선조체를 포함한 뇌의 보상 관련 영역에서 도파민 방출이 늘었고, 반응 속도도 함께 빨라졌다(Journal of Physiology, 2024).

자전거 타기는 중강도 이상의 운동이다. 그렇다면 느린 걷기에서는 도파민이 안 나올까? 인간 대상의 직접 측정은 아직 제한적이지만, 단서는 있다. 동물 실험에서는 자발적 운동만으로도 선조체의 도파민 방출이 증가했다(Journal of Neuroscience, 2022).

느릿느릿 걸어도 보상 회로는 조금씩 움직인다. 거기에 속도를 조금 올리면 도파민이 더 뚜렷하게 반응한다. 양재천에서 걷다가 좋은 노래가 나와서 저절로 발이 빨라지는 순간, 그때 이미 도파민이 올라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걷고 나서 "뭔가 해볼까"라는 의욕이 드는 건 근거 없는 긍정이 아니다. 뇌의 보상 회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5단계: 옥시토신 촉진 - 함께 걸으면 달라지는 것

혼자 걸어도 코르티솔은 떨어지고 세로토닌은 올라간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여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옥시토신이다.

신뢰와 유대감을 만드는 호르몬. 출산, 수유, 포옹 같은 신체 접촉에서 분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룹으로 함께 운동할 때도 분비가 촉진된다. 같은 방향으로, 같은 리듬으로 몸을 움직이는 행위 자체가 뇌에 "이 사람은 내 편이다"라는 신호를 보낸다. 함께 노래하거나, 함께 춤추거나, 함께 걷거나. 리듬을 공유하는 활동이 옥시토신 분비를 촉진한다는 연구들이 쌓이고 있다.

'나는 솔로' 같은 프로그램에서 데이트 상대방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카페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과 또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만으로 유대감이 강화되는 생리적 조건이 만들어진다.


6단계: 뇌가 스스로를 수리한다

앞의 다섯 단계가 걷는 동안 비교적 빠르게 일어나는 변화라면, 여섯 번째는 시간이 쌓여야 나타나는 변화다. 가장 느리지만, 가장 놀랍다. 뇌의 하드웨어 자체가 물리적으로 바뀐다.

핵심은 BDNF(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뇌유래신경영양인자)라는 단백질이다. 뇌에서 새로운 신경세포가 만들어지고, 기존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이 강화되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특히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해마에서 많이 발현되며, 나이가 들면 수치가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기억력 감퇴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물질이다.

BDNF는 도파민 방출을 촉진하는 역할까지 한다. 앞서 다룬 도파민, 세로토닌, 코르티솔의 변화가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BDNF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걷기가 몸 안에서 만드는 변화들은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얽혀 있다.

2011년 피츠버그 대학교의 커크 에릭슨 연구팀은 55세에서 80세 사이 건강한 성인 120명을 둘로 나눴다. 한쪽은 1년간 일주일에 세 번, 40분씩 걷게 하고, 다른 쪽은 스트레칭만 시킨 후 1년 뒤 각각 MRI를 찍었다.

그 결과, 걷기 그룹의 해마는 약 2% 커져 있었고 스트레칭 그룹은 약 1.4% 줄어 있었다. 해마가 커진 사람들은 혈중 BDNF 수치도 함께 올라가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 40분씩 걸었을 뿐인데 뇌의 노화 시계가 1~2년 거꾸로 돌아간 것이다. 노화로 줄어들기만 하던 해마가 오히려 역성장했다. 걷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뇌에 적용되는 '업그레이드 패치'다.

2025년 발표된 논문(Brain Sciences)에서도 걷기가 BDNF를 유의미하게 올린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고강도 운동이 아니라 걷기만으로도 뇌가 자기 자신을 수리하는 조건이 만들어진다.


어디서든 작동하는 시스템

정리하면 이렇다. 걷기 시작 수초 만에 심장이 휴식 모드로 전환되고, 15분이면 코르티솔이 떨어지고, 20~30분 사이에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움직이고, 함께 걸으면 옥시토신까지 더해지고, 이걸 주 3회씩 몇 달 쌓으면 뇌의 해마가 커진다. 우리가 "걷고 나니 개운하다"고 느끼는 순간, 몸 안에서는 이만큼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꼭 숲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한강변이든, 회사 앞 블록 한 바퀴든, 점심시간 청계천이든, 걷기만 하면 이 시스템은 작동한다. 중요한 건 어디를 걷느냐가 아니라, 걷느냐 안 걷느냐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여는 순간, 시스템 최적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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