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와 학업

3.1. 걸으면서 이해되고 정리되며 외워진다.

by 성효경

학원가의 저녁은 늘 분주하다. 수많은 학생들이 학원차에 몸을 싣고 이동하고, 부모들은 아이를 태우기 위해 차로 골목을 가득 메운다. 빠른 이동, 짧은 휴식, 다시 강의실. 이 리듬 속에서 아이들에게는 배운 내용을 정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뇌는 배움과 배움 사이의 '틈'에서 더 깊이 정리한다. 그 틈을 가장 잘 채워주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걷기다.

이스라엘 와이즈만 과학연구소 신경생물학과의 야딘 두다이는 기억 고착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기억은 학습 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학습 직후 뇌에서는 해마를 중심으로 두 단계의 고착 과정이 일어난다. 먼저 수 분에서 수 시간에 걸쳐 시냅스 수준에서 신경 연결이 강화되고, 이후 수 주에 걸쳐 해마에 임시 저장된 정보가 대뇌피질로 재배치되며 장기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은 추가 입력이 적고 자극이 낮을수록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새로운 정보가 밀려들면,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기억이 덮어씌워질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습 직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최선일까. 에든버러 대학교의 듀어 교수 연구팀은 이를 직접 실험했다. 참가자들에게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 뒤, 한 그룹은 10분간 조용히 눈을 감고 쉬게 하고, 다른 그룹은 같은 시간 동안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하게 했다. 30분 뒤에도, 7일 뒤에도 조용히 쉰 그룹이 이야기의 세부 내용을 훨씬 더 많이 기억했다. 이후 37개 연구를 종합한 메타분석에서도 학습 후 조용한 휴식은 기억 향상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걷기는 어떨까?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의학심리학연구소의 슈미트-카소프 등이 이를 실험으로 확인했다. 참가자들은 트레드밀 위에서 초당 1.3걸음, 그러니까 느긋한 산보 속도로 걸으며 폴란드어 단어 40개를 외웠다. 이는 최대 심박수의 53~59% 수준으로 미국 스포츠의학회 기준 '매우 가벼운 활동'에 해당한다. 같은 참가자가 다른 날에는 의자에 앉아 동일한 단어를 외웠고, 24시간 뒤 기억 검사를 시행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 걸으며 외운 그룹은 평균 5.5개, 앉아서 외운 그룹은 4.8개를 기억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그 차이가 더 벌어져 걷기 5.3개 대 앉기 4.1개, 약 30% 차이가 났다. 두 실험 모두 참가자의 63%가 걷기 조건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연구진은 네 걸음에 한 번꼴로 단어가 제시되는 리듬이 주의 자원 배분을 돕는 내적 박자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했다. 산책 수준의 느린 걷기는 인지적 간섭이 거의 없어서 '조용한 휴식'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보가 뇌에 입력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규칙적 리듬, 완만한 심박수 상승, 혈류 증가 같은 생리적 보너스가 더 붙는 것이다.

걷기의 타이밍에 따라 기억 효과가 달라지는지도 검증되었다. 미시시피 대학교의 로프린지 교수 연구팀은 대학생 88명을 네 그룹으로 나누어 15분간 중간 강도 트레드밀 걷기를 수행하는 시점을 달리했다. 첫째 그룹은 단어 학습 전에, 둘째 그룹은 학습 도중에, 셋째 그룹은 학습 직후에 걸었고, 넷째 그룹은 전혀 걷지 않았다. 학습에 사용된 도구는 청각 언어 학습 검사로, 15개의 단어를 들려준 뒤 20분 후와 24시간 후에 얼마나 기억하는지 측정했다. 네 그룹 중 학습 전에 걸은 그룹이 24시간 후 장기 기억에서 가장 높은 수행도를 보였다. 15분의 걷기가 뇌를 학습에 유리한 상태로 미리 준비시켜 준 셈이다.


image.png 대치동 학원가


대치동 학원가 학생들을 떠올려 보자. 학원에서 영어 독해와 수학 문제풀이를 배우고 난 직후, 곧바로 차에 태워져 다음 학원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빠르게 이동하는 동안 아이들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배운 공식과 문장이 정리될 틈도 없이 다음 과제로 밀려난다. 그러나 영어 학원에서 수학 학원까지 10분만 걸어간다면 어떨까. 그 걸음은 오늘 배운 수식을 머릿속에서 다시 배열하는 시간이고, 단어 뜻을 자기 문장에 넣어보는 시간이다. 걸으면서 반복되는 발걸음의 리듬이 뇌의 잡음을 줄이고, 학습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가만히 앉아 복습하는 것보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사고가 이어질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모든 학생이 긴 시간을 걸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학원과 학원 사이 10~15분의 걷기"는 아이들에게 이동이 아닌 학습의 연장선일 수 있다. 부모가 차로 태워주는 대신, 학원 사이 거리가 허락하는 만큼 스스로 걸어가게 하는 것. 이 짧은 여정이 오히려 가장 값진 정리 시간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두다이의 논리대로라면, 차에 태워져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자극이 적은 상태'이니 걷기와 마찬가지 아닐까. 하지만 차 안은 '조용한 휴식'과 거리가 멀다. 듀어의 실험에서 기억 향상을 보인 조건은 조명을 낮춘 방에서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실제 차 안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다음 학원 숙제를 뒤적이거나, 부모와 대화를 나눈다. 모두 새로운 정보가 뇌에 입력되는 활동이다. 오히려 학원 차 안에서 유튜브를 보는 10분이야말로, 방금 배운 내용을 가장 빠르게 덮어쓰는 시간일 수 있다. 걷기는 이 함정을 피한다. 두 발을 번갈아 내딛는 단순한 동작은 인지적 간섭을 거의 일으키지 않으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 여유도 주지 않는다.




물론 걷기도 완전한 무자극은 아니다. 가로수가 눈에 들어오고, 옆에서 친구가 말을 걸고, 신호등 앞에서 멈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극의 양이 아니라 종류다. 골목의 풍경, 바람, 발소리 같은 감각은 주의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가 놓아주는 약한 자극이다. 뇌의 집행 기능을 소모하지 않는다. 반면 스마트폰 화면, 숙제 지문, 유튜브 영상은 주의를 강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강한 자극이다. 친구와 나누는 수다도 자극이지만, 수학 공식이나 영어 지문과 경쟁하는 종류의 정보는 아니다. 슈미트-카소프의 실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참가자들은 걸으면서 주변을 보고, 균형을 잡고, 발소리를 들었다. 그런데도 앉아서 외운 것보다 더 많이 기억했다. 걷기가 만들어내는 자극은 기억 고착을 방해하는 간섭이 아니라, 주의 자원을 정리해 주는 백색 소음에 가깝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부하다. 입력되는 정보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뇌가 이를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할 때 학습 효율은 오히려 떨어진다. 이때 걷기는 일종의 '정리 창구'처럼 작동한다. 발걸음을 내딛는 단순한 리듬이 산만해진 신경 신호를 가라앉히고, 중요한 정보만 남도록 돕는다. 일상 속에서도 이 현상은 쉽게 관찰된다. 시험 준비로 도서관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학생들은 종종 머리가 무겁고 집중이 잘 안 된다고 호소한다. 그런데 잠깐 밖으로 나와 교정을 한 바퀴 돌며 10분만 걸어도 머리가 맑아졌다고 말한다. 이는 단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걷는 동안 심박수가 완만히 상승하고, 그에 따라 뇌로 향하는 혈류와 산소 공급이 증가한다.




걷기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공부를 강요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여백을 마련해 주는 일에 가깝다. 문제를 한 개 더 풀고, 단어를 몇 개 더 외우는 시간은 쉽게 눈에 보이지만, 그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연결되고 의미를 갖는 과정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빠르게 달리는 하루 속에서 그 여백을 잃어버리면, 배움은 흘러가는 정보가 된다. 강의실에서 이해한 것처럼 느꼈던 개념도, 이동과 과제 사이에서 정리되지 못한 채 다음 입력에 덮여 버린다. 반대로 발걸음을 내딛는 짧은 순간, 뇌는 속도를 늦추고 방금 전의 정보를 다시 불러낸다. 학생 스스로는 그 과정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몇 분의 걸음 속에서 무엇이 중요했고, 무엇이 아직 헷갈리는지 스스로 점검하며, 지식은 '남의 설명'에서 '내 생각'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보면 걷기는 공부의 바깥이 아니라, 공부가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에 가깝다. 교재와 문제집에서 끝나지 못한 학습이, 학원과 학원 사이의 발걸음 속에서 조용히 마무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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